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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화. 우린 경쟁자잖아요 (41/155)


41화. 우린 경쟁자잖아요
2023.04.14.


“잠깐만 있어 봐요, 할 말 있으니까.”

“하세요, 할 말.”

나는 그의 외모에 속지 않기 위해 그를 일부러 뚫어지게 보다가 말했다.

“그런데 저를 대하는 태도가 조금 달라지신 것 같아요? 말투라든가…….”

“맞아요. 달라졌어요.”

그가 너무 선선히 불어서, 나는 조금 당황했다.

“왜요?”

“우린 경쟁자잖아요.”

“…….”

그게 그렇게 되나?

당연한 말이었는데 이상하게 충격적이었다.

물론 경연이 시작되면 황자녀들이 경쟁하게 되니까 시종들도 경쟁자가 되는 거다. 하지만 내게는 전혀 실감이 나지 않는 이야기였다.

무엇보다 나 자신이 황녀 전하의 시녀가 되었다고 믿을 만한 근거가 없어서 그런 모양이었다.

그는 무감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적은 되지 말죠. 로리샤 양.”

“…….”

나는 이제야 그가 하는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미묘한 태도 변화가 무엇을 말하는지, 그가 야밤에 내 방 창을 넘어온 이유도.

하지만 좀 웃겼다. 앞으로 열릴 경연이 1, 2황자 전하 간의 싸움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가 나까지 경계하는 건 뜻밖이었다. 카이델 공자는 보기보다 근심 걱정을 끌어안고 사는 성격인 모양이었다.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완전히 진지하게 말했다.

“우리의 예전 일은 없던 걸로 해 주면 좋겠어요. 어떤 경우에도, 그것이 각자의 주인을 유리하게 하는 경우에도요.”

예전 일 어떤 거? 내가 길에서 치한으로 오해한 것? 제브론 해변에서의 일? 아니면 그레이언 전하의 기생충? 황가의 서고?

그러고 보니 그동안 그와 함께 겪은 모험이 많기도 했다. 세상에.

심지어 그는 나에게 마차를 몰래 빼내 주기까지 했다.

내 성년의 날을 완벽하게 만들어 준 것도 그였다…….

그런데 그와 경쟁자니 적이니 하고 있으니, 비현실적인 기분이 들었다.

나는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저는 벌써 다 잊고 있었는데 공자님 때문에 떠오른 것 아세요?”

“그렇습니까.”

“걱정 마세요. 다시 떠오른 것들도 바로 잊어 드릴게요. 아니, 바로는 좀 그렇고 내일 아침쯤요? 자고 일어나면 사소한 일은 잊게 되거든요.”

그러자 그가 빙긋 미소 지었다. 하지만 눈은 웃지 않고 있었다.

저것이 남성용 사교계 미소라는 거지.

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나 나름의 여성용 사교계 미소를 띠고 말했다.

“그러면 앞으로 저에게 그 편지 일을 추궁하는 일도 없으실 거라는 뜻이죠, 공자님?”

“…….”

나는 그의 눈동자가 순간 동요하는 걸 보고 짜릿한 기쁨을 느꼈다.

이렇게 당할 줄은 몰랐겠죠, 공자님?

그런데 그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건 안 됩니다.”

“하! 예전 일은 없던 걸로 하자면서요! 어쩜 사람이 자기 말을 이렇게 금방 뒤집어요? 공자님 그런 분이셨어요?”

“그게 아니라, 그건 그거고, 이건 다르지 않습니까!”

“뭐가 다른데요? 어떻게 다른데요?”

“그 편지는 어디까지나 당신과 나만의 개인적인 문제입니다. 완전히 별개라고요.”

그걸 내가 알지, 모르겠어?

모르는 건 오히려 카이델 공자 쪽이었다.

카이델 공자는 2황자 전하를 보호하려는 거고, 나는 나를 보호하려는 거다. 당연히 나는 그레이언 전하보다 내가 더 중요하고.

“별개 아닌데요. 예전 일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왜 그것만 예전 일이 아닌지 저는 모르겠어요. 개인적인 일이요? 지난 일들 중에서 공적인 일이 대체 뭐가 있었는데요?”

“로아르 양!”

카이델 공자는 분한 듯 나를 불렀다.

하지만 나도 비장하게 말했다.

“제 입을 막고 싶으면 저를 죽이셔야 할 거예요. 제가 어디 있는지는 이미 아주 잘 아실 테니까요.”

“…….”

그는 기가 찬 듯 나를 보더니 입을 다물었다.

“걱정 마세요. 론드 경이 함께 있다 해도 그분은 저를 보호하기 위해서 아무 수고도 안 하실 테니까. 절 죽이는 건 식은 죽 먹기일 거예요.”

“론드 경이 들으면 실망하겠군요.”

그가 내가 후원에서 뭘 하며 시간을 보내는지 잘 안다는 생각에 나온 말이었는데, 실언이었다.

나는 재빨리 해명했다.

“아니, 론드 경이 나쁜 사람이라는 게 아니라, 제가 황녀 전하가 아니잖아요. 황녀 전하를 보호해야 할 분이 시녀를 보호하려 위험을 감수한다? 안 될 말이죠! 론드 경은 책임감 강한 분이라고요.”

“…….”

나는 위기를 무사히 넘겼는지 확인하려 카이델 공자의 눈치를 보았고, 그는 여전히 굳은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케릴이 말실수 하나로 황녀 전하의 오늘 계획을 다 망쳤는데, 내가 똑같은 실수를 할 뻔하다니.

말조심하자!

하지만 그의 침묵은 나를 점점 더 불안하게 했다.

이 남자 진짜 성격 이상한 것 아니야? 그깟 편지가 뭐라고, 미친놈 소리는 그레이언 전하에게 질리도록 들으면서 뭐 새삼스럽게 기분 나쁠 게 있다고.

그사이 카이델 공자는 천천히 일어나 내 앞으로 왔다. 우리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나는 그의 눈을 보기 위해 턱을 쳐들어야 했다.

총체적으로 마음에 드는 구석이 결핍된 인간이었다.

그는 싸늘하게 말했다.

“거래하죠.”

“우, 우리가 거래할 게 더 있어요?”

“황궁 출입자 명부.”

“……아.”

로이만 실장님에게 약재를 배달하며 제3황궁에 로리샤 로바라는 이름으로 입궁했던 기록.

예전 같으면 카이델 공자만 입을 다물고 있으면 그만이지만 지금은 또 상황이 달랐다.

내가 과거에 벌인 작은 위법은 내가 황녀 전하의 시녀가 된 지금 황녀 전하와 백작님의 위기가 될 수도 있었다.

나는 그를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았고, 그는 빙긋 웃었다.

재수 없어!

“마음대로 하세요!”

우리 거래는 그렇게 끝났다.

나는 그레이언 전하와 관련된 모든 일을 함구한다. 그리고 그는 황궁 출입자 명부에 적힌 내 가명을 묵인해 주는 대신 편지 문제를 계속 추궁할 권리를 유지한다.

내가 어이가 없어서 정말.

카이델 공자는 담담하게 말했다.

“미샤 양은 자신만의 생존 방법을 배우는 중이고, 아마 당신이 도울 수 있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럼 이만.”

그는 그대로 돌아갔다. 평소의 정중한 예법은 어디 가고, 마치 친구나 적과 헤어지는 듯한 태도였다.

하여튼 예쁘게 봐 주려 해도……!

나는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어처구니없이 바라보다가 방으로 돌아왔다.

* * *

“풉…….”

로카르드는 복도를 지나가는 하인이 의아하게 바라보자 얼른 표정을 굳혔다. 그러나 비싯거리는 웃음이 곧 되살아났다.

그가 자기보다 먼저 간다고 로리샤가 약이 올라 죽으려고 하는 꼴을 떠올리자, 그는 즐거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의 반응은 그의 예상대로였지만, 거기서 그가 느끼는 즐거움은 예상을 훨씬 넘어서고 있었다.

하지만 방으로 돌아와 책을 펼쳤을 땐 약간의 허탈감을 느꼈다. 그녀의 신경을 건드릴 이야깃거리 몇 개가 더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까 알차게 놀려 먹었어야 하는데.’

오늘 상황은 여러모로 뜻밖이었다. 그는 아까 로리샤를 황녀궁에서 빼돌리러 가고 있었다.

밀리오라 황녀가 미샤 로아르를 불러들인 이유는 뻔했다. 적녀를 데려와 오늘 로리샤의 영혼을 갈가리 찢고 짓뭉개려는 것이다.

그것은 타가르의 잔인함이었다.

로리샤가 강한 여자라 해도 누군가에게 그런 압박을 견디게 하는 건 부당한 일이었다. 로카르드는 그렇게 생각했다.

장래의 경쟁자가 고꾸라질 기회를 일부러 날리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하면 대답할 말은 없었다.

그저 로리샤가 그런 일을 당해도 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그녀는 앞으로 그를 즐겁게 해 주어야 한다는 것 정도였다.

그러니 그 전에 그녀가 너덜너덜해진 채 황궁에서 쫓겨 나가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한발 늦어 버렸고, 휘니드의 전갈을 받고 갔을 땐 로리샤는 멀쩡했다. 너무 멀쩡해서 오히려 미샤 로아르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것은 뜻밖의 전개였다.

그는 로리샤에 대해 은밀한 조사를 진행했다. 로리샤 로아르가 올해의 진짜 아카데미 입학 수석이라는 것을 안 후로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그녀가 입학시험에 가명으로 응시하고 사라져 자신을 가짜 수석으로 만든 이유를 알아야 했다.

그 조사는 그가 원하던 답을 주지는 못했지만 추정은 가능하게 했다.

그가 알게 된 로리샤의 인생사 대부분은 그녀가 백작 부인과 미샤 로아르에게 당한 부당한 취급에서 비롯되었다.

그걸 몰랐다면 그는 오늘 그녀를 위해 걸음을 옮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그녀는 미샤 로아르를 걱정할 수 있다니.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로리샤 로아르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불가해함이 위험하게 여겨졌다면 로카르드는 그녀를 예민하게 경계했을 것이다. 싹이 자라기 전에 제거하기로 마음먹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반대였다. 아까 그녀는 미샤를 마치 친언니처럼 걱정하고 있었다. 본인은 절대 인정하지 않을 기세였지만.

미샤 로아르가 앙카르트 영애의 하녀 노릇을 하는 건 아카데미 내에서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일이었다. 미샤의 부자연스러운 성적 상승이 그 결과물이라는 것도.

하지만 그건 로리샤가 끼어들어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기 인생 문제에 힘을 쏟는 편이 나았다.

앞으로 그녀가 헤쳐 나갈 일들은 최선을 다해도 힘겨울 것이므로.

그녀는 우선 적과 친구를 가르는 방법을 배워야 했다. 왜냐하면 황궁에는 적도 친구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잘못된 적을 친구로 삼는 건 위험했다.

이 난삽한 표현은 황궁에서 지내본 자만이 이해할 것이다.

“밖에 있나?”

로카르드는 하인을 불러 마카롱을 가져오게 했다. 하인은 심지어 그의 요구를 바로 알아듣지도 못했다.

그는 하인에게 ‘마카롱’이라고 반복해 발음하면서 옅은 수치심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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