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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네가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 (40/155)


40화. 네가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
2023.04.13.


험악한 실내 분위기를 읽은 에리아는 고지 후에 즉시 사라졌고, 영애들은 일제히 일어나 예를 취했다.

밀리오라 황녀 전하는 방 안의 상황을 모두 알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녀의 사나운 눈빛과 경직된 턱을 보니 나까지 침이 꼴깍 넘어갔다.

어떻게 티 파티가 이렇게까지 엉망이 될 수 있는지!

밀리오라 전하는 분노하여 티 파티 멤버들을 차례로 쏘아보았다. 하지만 내 쪽으로는 그 시선조차 던지지 않았다.

“한심한 것들!”

황녀 전하는 그대로 나가 버렸고, 미샤도 뒤이어 나가다 내 앞에 멈추었다.

미샤는 아마도 아카데미에서 곤란한 처지였고, 그래서 그토록 이 자리로 탈출하고 싶어 했던 거다.

그런데 나 때문에 여기 불려와 모욕까지 당했으니…….

미샤는 아카데미라는 날개를 달았다가 남에게 손가락질당하는 자리로 추락한 충격을 견딜 만큼 강하지 못했다. 늘 그랬듯 원망할 사람이 필요할 터였다.

나처럼.

내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불행이 다 내 탓이라는 눈빛으로 나를 보다가, 사납게 속삭이고 돌아갔다.

“네가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 로리샤.”

솔직히 소름이 돋았다.

그때의 내 기분은 나도 설명하기 어렵다. 무서운 건 아니었다. 단지 슬프기도 하고 아프기도 했다.

미샤가 나가자 케릴은 승리감에 차서 웃었지만, 영애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말없이 자리를 떴다.

나는 순식간에 비어 버린 방에서 소파로 가서 앉았다.

그리고 테이블에 남겨진 마카롱을 우적우적 씹으며 생각했다.

정말 보기만큼 맛있네.

대체 미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밀리오라 황녀 전하에게는 화가 났다. 나를 괴롭히고 싶은 마음이 진심인 건 알겠는데, 집안사람까지 끌어들이다니.

하지만 오늘의 난장판은 내 잘못이 아니었다. 미샤를 티 파티에 갖다 놓기만 하면 그 애가 알아서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은 황녀 전하의 실수였다.

이 꼴을 보니 확실히 황녀 전하에게는 야무진 시녀가 필요했다. 그리고 나로서는 그게 내가 아니었으면 싶었다.

나는 까닭 없는 악의에 익숙했음에도, 황족씩이나 되어 사생아 하나를 못 잡아먹어서 이렇게 안달인가 싶어 빈정이 상하는 게 사실이었다.

“시녀님, 괜찮으세요?”

테이블을 치우러 들어온 에리아는 겁먹은 눈으로 나를 살폈다.

나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응. 괜찮아.”

나는 마카롱 하나를 더 집어서 통째로 입에 넣었다. 단 게 배 속에 들어가니 조금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두 개를 더 집어서 밖으로 나갔다.

* * *

나는 로이만 실장님의 약제실로 갔다. 그리고 미안한 부탁이지만 실장님에게 카이델 공자를 불러 달라고 말했다.

“무슨 일 있어요?”

실장님이 진심으로 걱정스러운 얼굴이라 나는 미안해하며 고개를 저었다.

“일은요. 공자님께 여쭤볼 게 있는데 2황자궁에 전언을 부탁하면 말이 어떻게 날지 몰라서요, 그래서 이리 왔어요. 귀찮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괜찮아요. 저야 늘 2황자궁과 소통하고 있으니까요. 잠깐 기다려요.”

“저는 그럼 약초밭에 가 있을게요. 이거 하나 드세요.”

나는 로이만 실장님에게 마카롱 하나를 건네고 약초밭으로 내려갔다.

허름한 벤치에 잠시 앉아 있으니 모든 게 바보같이 느껴졌다.

내가 미샤 사정을 알아서 뭐 하려고.

아무래도 그냥 돌아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을 때, 내 뒤에 사람의 묵직한 밀도가 느껴졌다.

“카이델 공자님.”

그는 소리 없이 다가와 내 옆에 앉았다. 그리고 퍽 냉랭하게 말했다.

“먼저 연락하다니, 영광이네요.”

“제 용건을 들으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실걸요?”

나는 손수건에 싼 마지막 마카롱을 그에게 쑥 내밀었다. 그는 잠깐 당황하면서도 그걸 집어 입에 넣었다.

카이델 공자의 표정을 보니 그것을 뜻밖에 맛있어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는 맛을 음미하며 고개를 주억거리면서도 눈으로는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입안에 든 걸 한꺼번에 꿀꺽 삼킨 다음 말했다.

“감동했어요. 내가 받은 어떤 고백보다 달콤하네요. 차는 안 가져왔나요? 론드 경과 마시는 차가 어떤 건지 늘 궁금했는데.”

나는 티 파티에서 진이 다 빠져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내가 대꾸가 없자 금방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죠?”

설마, 론드 경과 내가 차를 마시는 걸 알고 있다고?

“그렇게 다 아시면, 미샤가 입궁한 것도 알고 계세요?”

그는 후원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공자님은 모르는 게 뭐예요?”

“자주 듣는 질문인데, 그런 질문에는 답을 할 수 없는 게 당연하잖아요.”

“네, 네! 그렇죠. 모르는 게 뭔지 알면 모르는 게 아닐 테니까요!”

나는 혼자 울컥했다가 혼자 머쓱해졌다. 하지만 그는 참 평온했다.

나는 용기를 쥐어짜 말했다.

“미샤, 아카데미에서 무슨 일 있어요?”

내 질문은 카이델 공자가 예상한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는 한쪽 눈썹을 찌푸리더니 말했다.

“그런 질문에는 답해 줄 수 없다는 걸 알잖아요.”

“…….”

그의 말이 옳았다.

그처럼 내면이 복잡한 인간은 미샤처럼 단순한 인간에게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할 테니까. 아는 것이 없는 것이 당연했다.

그리고 그는 알더라도 숙녀의 사생활을 고자질할 정도로 저질이 아니다.

만에 하나 알려 준다면 대가를 요구하겠지. 예를 들어 내가 절대 인정할 수 없는, 어떤 편지의 저작권을 인정하는 것 같은.

나는 답을 이미 알면서도 허탈하게 물었다.

“마카롱 하나로는 안 되나요?”

그러자 그는 잠깐 심각하게 고민하는 척을 했다.

“음. 안 될 것 같아요.”

“애초에 그거 뇌물도 아니었거든요? 제가 열받아서 단 걸 좀 먹으려고 가져왔는데 입맛이 떨어진 것뿐이었어요.”

사실 그와 하나씩 나눠 먹으려고 두 개 가져온 게 맞았지만, 나는 잔뜩 토라져서 말했다.

그런데 그가 마치 내가 ‘공자님께 드리려고 소중하게 챙겨 왔어요!’라고 말한 듯이 대꾸하는 게 아닌가.

“감동했어요. 과자를 집는 순간부터 마음속에 나를 떠올리고 있었다니.”

마음속? 머릿속이라도 했어도 될 걸 일부러 저렇게 능글거린다. 재수 없어!

내가 불편한 한숨을 쉬자 그가 물었다.

“나는 당신이 지금쯤 미샤 양 때문에 상당히 불편한 상태일 줄 알았어요.”

“저는 지금 엄청나게 불편한 상태인데요.”

“미샤 양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

카이델 공자의 말을 들으니 과연 내가 주제넘은 짓을 하고 있다 싶었다.

황궁에 들어오는 바람에 잠시 까먹었는데, 나는 미샤 로아르를 미워한단 말이다.

지금 상황에서 그나마 다행인 것은, 카이델 공자에게 상황을 설명하려 애쓸 필요가 없다는 부분이었다.

그는 대개 나보다 더 많이 알았고 이해력도 뛰어났다. 그라면 오늘 미샤의 입궁 이력만으로 황녀 전하의 의도를 짐작했을 터였다.

그러게. 내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면서 남에게 집안일까지 도와 달라고 부탁할 생각을 하다니, 내가 뭘 하는 건가 싶어 정신이 퍼뜩 돌아왔다.

“안 알려 주실 거면 이만 일어날게요.”

“성급하긴.”

내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그는 음모가처럼 웃었다.

“거래 조건은 같아요. 당신이 미샤 양을 걱정했다고 속마음을 솔직하게 말하면 마음이 바뀔 것도 같고, 아닐 것도 같고…….”

이 새끼가…….

이건 복잡하고 교묘한 함정이었다.

내가 미샤를 걱정하다니. 나는 그 애를 미워하고 백작 부인은 증오한다.

백작 부인이 엄마의 편지를 태우지 않았다면 엄마는 여전히 내 곁에 살아 있었을지도 모르니까.

엄마를 잃은 것도, 아카데미 입학이 좌절된 것도, 모두 백작 부인 때문이었다. 백작 부인은 미샤 때문에 그런 것이고.

그러니 그들 모녀는 내 원수였다. 내가 그들 중 하나라도 아낀다거나 걱정한다면 그건 엄마와 내 인생에 대한 배신이었다.

하지만 미샤가 여러 명 앞에서 공격당하는 걸 보며 기분이 좋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적녀는 부자 친구의 시녀 짓을 하고, 사생아는 감히 황족의 시녀 자리를 욕심낸다고 백작님이 손가락질을 당할 것도 뼈가 아팠다.

솔직히 말하면, 미샤를 엿 먹이는 건 나만의 권리였으면 싶었다.

나는 카이델 공자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서 그가 내 감정의 틈을 들여다보게 하는 게 싫었다. 이미 우리 사이에는 다른 문제가 많았다.

나는 새침하게 말했다.

“공자님을 부른 건 잘못한 일인 것 같아요.”

“이런. 결론이 점점 제가 원하지 않는 쪽으로 나는군요.”

카이델 공자는 웃음기 없는 얼굴로 나를 보다가 하늘로 고개를 들었다. 어느 틈에 하늘이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예쁘지 않아요? 가끔 저 빛깔을 보려고 정원을 거닐곤 해요.”

“…….”

“당신도 나를 만나고 싶으면 이맘때 정원을 산책하도록 해요. 그땐 우연이라고 믿어 줄 테니.”

“하.”

연이은 감정의 소용돌이 때문인지, 나는 참을 생각도 못 하고 헛웃음을 웃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퍽 담담한 얼굴로, 내가 내숭이라도 떤다는 것처럼 말했다.

“약속하죠.”

“아, 혈압 올라.”

“괜찮아요? 로이만 실장님께 데려다줄까요?”

나는 씨 소리가 나오는 걸 입을 꽉 다물고 그를 쏘아보았다. 그러자 그가 웃었다.

차분하게 사람을 끌어들이는 듯한 보기 좋은 웃음에, 어이가 없어 나도 정말로 웃고 말았다.

이런 식으로 제국의 영애들을 허우적거리게 만드는 거구나. 미샤도.

하지만 나까지 당할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공자님.

“좋을 대로 생각하시고요. 제 부탁은 없던 일로 해 주세요. 이만 가 볼게요.”

“잠깐만 있어 봐요, 할 말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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