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티파티의 미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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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티파티의 미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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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티파티의 미샤
2023.04.12.
하지만 그녀는 진짜였다. 에리아는 내 앞에 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시녀님, 황녀 전하께서 부르세요.”
“곧 갈게. 고마워.”
나는 가져간 차를 주섬주섬 싸며 투덜거렸다.
“교착 상태가 끝나는 건 한쪽이 전투를 개시했을 때 아닌가요?”
“약에 대해서만 아는 게 아니로군요. 시녀님은.”
그의 목구멍 안을 울리는 웃음소리는 듣기 좋았지만, 나는 함께 웃을 수 없었다.
나는 그를 돌아보며 비장하게 말했다.
“무운을 빌어 주세요.”
* * *
나는 황녀 전하의 응접실에 들어갔다가 우뚝 멈추고 말았다.
케릴을 비롯한 티 파티 멤버들이 전처럼 소파에 앉아 있었는데, 거기에 새 얼굴이 있었다.
몹시 익숙한 새 얼굴이.
미샤는 그녀들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얘가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영애들은 나를 일부러 못 본 척하며 들떠서 떠들었다.
“카이델 공자님은 2황자 전하를 모시느라 수업을 자주 빠지는데도 수석을 놓치지 않으신다면서요?”
“저도 정말 놀라워요.”
“지난번에 공자님이 중앙 정원에 계신 걸 멀리서 봤는데, 어찌나 늠름하신지!”
“그런데 미샤 양은 그런 분과 함께 아카데미 생활을 하고 계시죠!”
꺄악 소리가 몇 번 나고, 케릴은 나를 흘끔거리며 들으라는 듯 말했다.
“미샤 양이 사생아와 한집에 사느라 얼마나 고생하셨겠어요. 그 정도 보상은 필요하시죠.”
그러자 그들은 서로 눈웃음을 교환했다. 미샤는 그 공기를 알면서도 미소 짓고 있었다.
뭐라는 거야, 이년들이.
나는 기가 차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것은 예상 밖의 참신한 계획이었다. 황녀 전하는 내 약점을 가장 잘 아는 미샤를 데려와 티 파티 멤버들과 함께 나를 잘근잘근 씹고 즐기기를 원한 것이다.
미샤는 내가 자기 시녀 자리를 빼앗았다고 길길이 날뛰었으니, 집안의 체면이고 뭐고 생각하지 않고 무슨 소리든 할 것이다.
이건 정말 당혹스러웠다. 나는 이들 앞에서 미샤를 괴롭힐 수도, 괴롭힘당할 수도 없었다.
‘아주 돌아 버리겠네.’
내가 멈칫하는 것을 눈치챈 영애들은 눈에 띌 정도로 신이 나 했다.
케릴이 말을 이으려 할 때 다른 영애가 먼저 물었다.
“로아르 양, 그러면 아카데미에서는 수업을 마치면 뭘 하며 놀아요? 카이델 공자님과는 자주 마주치나요?”
카이델 공자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그들의 눈은 반짝반짝 빛났다.
그 인간이 여자 방 창을 턱턱 넘어 다니는 끈질기고 징그러운 인간이라는 걸 아직 아무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하긴, 그가 이 영애들의 방 창문마다 넘어 다녔어도 그녀들의 반응은 똑같았을 거다.
나는 백작 부인에게 예법 교육을 받으면서 한 가지는 끝까지 배우지 못했다.
그녀는 그것을 그렇게 설명했다.
‘사교계에 나갈 땐 자기 자신이 아닌 가상의 인물을 연기하는 거란다. 철저히 때와 상황에 필요한 감정만 느끼고, 겉으로 드러내는 거야.’
미샤는 그 기술을 마스터했을까, 궁금증이 일었다.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미샤는 입을 꾹 다물고 선 나를 흘끔 보더니, 짐짓 잘난 척을 하며 말했다.
“놀 시간 같은 건 없어요. 학기 중에는 눈 뜬 시간 전부 공부해도 시간이 부족하거든요.”
“어머, 세상에!”
“아카데미의 명성은 괜히 생겨난 것이 아니랍니다.”
“과연 세 번째 사자의 따님이세요.”
“과찬이세요.”
“카이델 공자님이 전쟁에서 돌아오시자마자 아카데미에 들어가실 걸 알았다면 저도 아카데미 입학시험을 더 열심히 준비할 걸 그랬어요.”
“카이델 공자님과의 아카데미 생활이라니! 저도 똑같은 후회를 했다니까요. 미샤 양이 정말 부러워요!”
그러자 미샤는 얼굴을 발그레하게 붉히며 대답했다.
“네, 소중한 시간이랍니다.”
나는 좀 허탈함을 느꼈다. 미샤는 사람들이 자신을 얼마나 부러워하는지를 깨달으며 눈에 띄게 평온해지는 기색이었다.
그리고 저 계집애들은 카이델 공자에 대해 듣는 재미에 저희가 지금 나를 열심히 까 대야 한다는 것도 까먹고 있었다.
황녀 전하의 계획은 그럴듯했지만, 결국 이건 그녀의 실수였다.
이 계집애들은 종일 차나 퍼마실 줄 알았지, 저 좋은 것 외에는 관심이 없단 말이다.
바로 마카롱이나 무의미하게 잘생긴 남자 같은 것 외에는!
이 자리에서 정신을 차리고 있는 것은 케릴뿐이었다. 그녀는 쉬지 않고 눈동자를 돌리며 나를 공격할 타이밍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카이델 공자의 인기는 황녀 전하의 악의를 훨씬 앞질렀으니, 케릴이 애쓰는 모습은 안쓰러울 정도였다.
그리고 케릴이 일했다.
“미샤 양이 아카데미에 좀 더 일찍 입학하셨다면, 지금 황녀 전하의 시녀가 되는 건 미샤 양이셨을 텐데, 안타깝지 뭐예요.”
“…….”
케릴의 말에 미샤는 나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 눈에 든 원망은 깊고도 생생했다. 나는 이제 억울해하기도 지쳤는데, 미샤는 지치지 않는 것 같았다.
‘미샤…….’
그녀는 영애들을 향해 우아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도 빨리 졸업하면 좋겠어요. 모든 게 제자리를 찾아갈 수 있도록요.”
“그렇죠. 사람들이 사생아가 시녀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고 오해해서는 안 되니까요. 미샤 양의 책임감이 크시겠어요.”
케릴은 자기 마지막 말에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고, 미샤는 금세 눈을 새초롬하게 떴다.
로아르가에서 사생아를 제대로 단속하지 못해서 일이 이렇게 된 것이 아니냐는 케릴의 암시는, 백작 부인이 말하던 대로였다. 쓴웃음이 나왔다.
“케릴 양은 무슨 책임을 말씀하시는 거죠?”
미샤의 물음에 케릴은 괜히 차를 마시며 딴청을 피웠고, 분위기는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했다.
케릴은 자신의 말실수에 당황했지만, 그녀도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었다.
“저는 미샤 양이 시녀가 되기 힘든 상황이었다면 로아르가에서 시녀를 보내지 말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미샤 양에게 다른 자매가 있었다면 당연히 다른 문제겠지만요.”
그러자 미샤는 백작 부인과 꼭 닮은 샐쭉한 미소를 지었다.
“저도 그런 지적이 나올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1황자 전하께서 로아르가가 아니라 라이선가에 시녀를 내라고 명하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을 정도예요.”
미샤의 대꾸는 1황자 전하가 케릴의 가문인 라이선가보다 로아르가의 사생아를 더 낫게 평가하신 걸 나더러 어쩌라는 거냐고 들렸다.
오오, 미샤. 좀 하는데?
케릴은 눈이 커졌다가 입을 꼭 다물었고, 영애들은 긴장한 채 서로 눈치를 보았다.
분위기는 살벌하고 팽팽해서, 아까 카이델 공자 이야기를 하며 꺅꺅거리는 분위기는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황녀 전하는 졸개들이 나를 처리하는 동안 자리를 피하신 모양인데, 그건 실수였다. 쟤들은 적절한 관리 감독이 필요했다.
왜 내가 다 안타까운지.
케릴이 발끈했다.
“그 말씀은 마치 우리 라이선 가문에 대한 무시처럼 들리네요. 미샤 양.”
“네? 어쩌다 그런 오해를 하셨는지? 절대 아니에요, 케릴 양. 아무래도 시종은 능력을 중요시하잖아요. 예를 들면 아카데미 출신만 선발된다든가. 그런 점을 지적한 것뿐이랍니다.”
미샤의 겸손 연기는 완벽했지만 여긴 다들 선수만 모인 자리였다.
케릴은 눈빛으로 미샤를 뜯어먹으며 말했다.
“그렇죠. 아카데미 생도는 뛰어난 자질을 가져야만 하니까요. 저는 얼마 전 앙카르트 양의 파티에서 미샤 양의 지도력을 보고 역시 아무나 아카데미 생도가 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녀가 말한 지도력은 분명 원래 뜻이 아니었다.
그런데 앙카르트라면, 그 떼부자 앙카르트 자작가?
미샤는 흙을 씹은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케릴이 미샤의 약점을 제대로 건드렸다는 뜻이었다.
“영식들이 미샤 양의 미소를 보느라 한시도 곁을 떠나지를 않더군요. 당신이야말로 그 파티의 꽃이었죠.”
케릴의 말투는 미샤가 꼭 무슨 접대부처럼 굴었다는 듯이 들렸다.
하지만 나는 의아했다. 나는 미샤가 파티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 알고 있었다. 미샤는 사람들이 많은 곳에 있을 땐 분수와 같다.
사람들이 잘 보이는 곳 중간에 가만히 앉아서, 모두가 자신을 감탄하며 지켜보게 한 다음 분수 안에 동전을 던지듯 찬사나 소원을 바치기를 기다린다.
그런 애가 남의 파티에서 남자들을 기쁘게 하려 애를 썼다고? 카이델 공자에게 반해서 울고불고하던 게 엊그제인데 말이다.
미샤가 내려놓는 찻잔은 손이 떨려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고, 영애들의 시선은 서로를 향해 어지럽게 돌아다녔다.
도무지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그렇게 힘들게 아카데미에 들어가서는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건지!
미샤는 억지로 웃고 있었지만 목소리의 떨림은 숨기지 못했다.
“케릴 양,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어요. 제 미모나 영식들의 관심은, 어느 것도 제 탓이 아니잖아요?”
“미샤 양이 앙카르트 영애를 위해서라면 뭐든 한다는 건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에요. 혹시 듣지 못하신 거예요?”
케릴은 작게 속삭였다.
“그러고 보니 이미 시녀이셨네.”
미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 손에 다시 쥐어진 찻잔은 다음 순간에라도 케릴에게 날아갈 기세였다.
제기랄.
로아르 백작님의 두 딸이 모두 황녀궁에서 사고를 칠 수는 없었다.
“미샤!”
내가 조그맣게 부르자 미샤는 부들거리며 나를 노려보았다.
케릴의 공격은 잔인하기 짝이 없었는데, 그럼에도 미샤가 이 방에서 가장 증오하는 사람은 나였다.
그걸 본 케릴은 기다렸다는 듯 빈정거렸다.
“사생아가 적녀에게 목소리를 높이다니, 역시 저기서부터 문제였어.”
그때 문이 열렸다.
“황녀 전하 드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