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월담하는 공자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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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월담하는 공자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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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월담하는 공자님(2)
2023.04.11.
어라, 지금 내가 뭐랬어? 인간적인 매력? 우웩.
나는 그를 쌩하게 외면하며 허리를 세우고 앉았다. 하지만 백작 부인이 가르쳐 준 곧은 자세보다 등을 기대고 다리를 꼰 카이델 공자의 건방진 자세가 더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나도 그처럼 건방지게 앉아 보았다. 그러자 그가 살짝 못마땅한 기색을 흘렸다. 입가에는 설핏 웃음이 스쳤지만.
나는 인상을 쓰며 머리를 굴려 보았다.
“1황자 전하는 자기 선택이 틀린 것처럼 보일 생각이 없으세요. 황녀 전하의 기분보다는 폐하의 측근인 백작님을 보호하기 원할 거고요. 오히려 저를 휘어잡지 못하는 황녀 전하를 탓하시겠죠.”
“흠. 이미 필요한 건 다 파악했네요.”
“하지만 황궁의 질서를 바로잡으려면 저 같은 시녀를 가만히 두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질서. 귀족들은 거기 죽고 살지 않던가.
누군가의 불쌍한 엄마를 길거리 창녀로 만들 만큼. 또 여러 사람의 인생을 시궁창에 처박을 만큼.
“어쨌길래요?”
“바닥에 떨어진 마카롱을 다 씹어먹을 작정으로……. 아무튼 티 파티에서 깽판 쳤다고요.”
“…….”
나는 내가 ‘깽판’이라고 말했을 때 카이델 공자의 입가가 바르르 떨리는 걸 보고 말았다.
나는 그가 폭소를 억지로 참고 있는 사실보다 내가 그의 앞에서 긴장을 풀고 만 것이 짜증 났다.
나는 침울하게 말했다.
“황녀 전하의 입지가 그 정도로 좁으신 줄 몰랐어요. 음……. 하긴 제가 여기 있는 것부터가 그 증거네요.”
카이델 공자는 이제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누가 보면 퍽이나 잘생겼다고 착각할 표정이었다.
“지금 황녀 전하를 걱정하는 겁니까?”
“불쌍하시잖아요. 그렇게나 신분이 높으신데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방 안의 물건 부수는 것밖에 없다니.”
“…….”
내 말은 진심이었다. 황녀 전하는 나를 진저리 치게 싫어했다. 그런 사람을 곁에서 떼어 낼 수 없다는 건 끔찍한 일이 틀림없다.
카이델 공자는 내 말에 얼굴을 미묘하게 일그러트렸다. 그는 아마 나를 한심하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당연했다.
나는 두 팔을 공중에서 벌리며 말했다.
“공자님의 계획은 실패했어요. 저는 그렇게 겁먹지 않았고, 그 편지는 제가 쓴 게 아니고요! 그러니까 이만 돌아가 주세요.”
“제게는 차를 안 주시는군요. 매정하셔라.”
“제가 끓이는 차는 약차라고요. 그러니까…….”
그는 나와 론드 경의 티타임에 대해 아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황궁은 뱀 소굴이라던 백작 부인의 말이 뇌리를 스쳤다. 그땐 그녀 자신이 뱀이면서 무슨 소린가 했는데, 지금 보니 맞는 말이었다. 이곳에는 인정도 비밀도 없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좀 매정해요. 그 편지 이야기도 그만하고 싶고요. 이만 돌아가 주세요. 카이델 공자님.”
그러자 그도 일어나 내 앞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황녀 전하의 티 파티를 망친 이유는 아직 말 안 했어요. 당신도 지적했지만, 내가 좀 집착이 있어서요. 알고 싶은 건 꼭 알아야 하거든.”
목소리는 왜 깔고 그러는지.
나는 그때 퍼뜩 깨달았다. 내 이합체시 편지는 핑계였고, 그가 진짜로 알고 싶어 하는 건 내가 황녀 전하의 티 파티를 망친 이유였다.
그런 게 왜 그렇게 궁금한지, 이 인간은 나에게 궁금한 것이 왜 이렇게 많은지 모를 일이었다.
달갑지 않았지만 그를 내보내려면 어쩔 수 없었다. 그가 이런 집착남이라는 걸 이제야 알게 되다니.
나도 그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제가 버릇없는 애들을 좀 많이 겪어 봤거든요.”
그러자 그가 웃었다. 가슴으로 웃는 듯한 소리가 그렇게 음흉할 수 없었다.
“더. 그걸로는 부족해요.”
나는 이를 바득 갈며 빠르게 속삭였다.
“이곳은 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 지내는 곳이지만, 사실은 동물의 왕국이라고요. 나도 같은 짐승이라고 보여 줘야 저를 쳐다보기라도 하겠죠!”
그는 비싯 웃으며 내 말을 따라 했다.
“짐승이라…….”
“알아요, 또 황족 모독인 것! 하지만 제가 먼저 재수 없게 굴면 그 영애들은 저한테 가장 타격이 될 만한 문제를 건드릴 거고, 그럴 만한 건 역시 제가 부적격한 시녀라는 거예요. 하지만 그건 제가 황녀 전하의 시녀인 걸 전제로 하는 말이니까……. 세상에, 내가 이런 말을 하다니!”
“당신을 배타하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당신이 황녀 전하의 시녀임을 기정사실로 만들었군요. 황족 모독죄를 감수하고서.”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은 기묘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마치 처음 보는 생물을 발견한 듯한 눈빛이었다.
나는 마른세수를 하며 한숨을 쉬었다.
“이제 돌아가 주실래요?”
그는 창을 넘어가며 말했다.
“삼 층을 기어오른 보람은 있었어요. 재미있었으니까. 그럼 용건은 다음에 말하죠. 그럼.”
다음에? 지금까지는 뭐 하고?
하지만 그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어휴, 저 자식이.
* * *
카이델 공자의 말대로 그날 밤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친 사고는 이대로 묻힐 모양이었다.
대신 황녀 전하가 침소 문을 닫아걸고 나오지 않았다.
나는 다음 날부터 매일 아침 밀리오라 전하의 응접실로 찾아갔다. 그러면 에리아가 나를 돌려보냈다.
복도에서 황녀 전하를 찾아온 티 파티 멤버들과 몇 번 마주쳤는데, 그들은 나를 향해 흰자가 보이도록 도끼눈을 떴다.
피부가 말랑말랑한 아가씨들이 째려본들 내게는 별 감흥이 없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황녀 전하에게 문 앞에서 퇴짜맞기가 내 일상이 되어 가고 있었다.
황녀 전하의 화가 쉽게 풀리지는 않을 텐데,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나와 마찬가지로 황녀 전하를 만나는 데 실패하는 다른 사람과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론드 경은 이제 내가 후원에서 그의 옆자리를 차지해도 불편한 티를 내지 않았다. 나를 편하게 여겨서는 절대 아니었고, 그냥 포기한 것 같았다.
뭐라고 해야 하나, 마치 바위가 잠시 달라붙은 벌레를 무심히 여기는 것과 같았다.
내가 그에게 준비해 간 차를 따라 주면, 그는 고맙다는 인사나 맛있다는 평가도 없이 그걸 마셨다.
내가 가져간 컵이 그의 커다란 손에서 소꿉놀이 컵처럼 보이는 것은 매번 신기한 광경이었다.
그는 먼 데를 응시한 채로 물었다.
“이 차에는 뭘 탄 거요?”
“어머, 론드 경! 누가 들으면 제가 경을 독살이라도 하려고 한 줄 알겠어요.”
“약을 타면 독도 타겠지. 결국 같은 거 아니요?”
“음……. 기사 중에는 염세적인 사람이 없는 줄 알았어요.”
“있어도 남들이 알아챌 틈이 없지. 다들 바쁘게 죽으니까.”
엄숙한 표정을 짓고 싶었지만, 그의 말투가 웃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웃음을 참느라 얼굴을 일그러뜨리자 그가 팔꿈치로 내 팔을 툭 치며 코로 웃었다.
나는 풉 웃고 말았다.
“죄송해요, 경. 웃으면 안 되는데.”
“나는 로아르 양이 웃겨요. 내 농담에 웃는 여자라니, 정상이 아니란 말이오.”
“농담에 능한 염세주의자라니. 그것도 정상은 아니라고요.”
“흠. 비긴 걸로 치지.”
그의 옆얼굴을 흘깃 보니 그의 입꼬리가 길어져 있었다. 이 정도면 폭소라고 생각해도 될 것 같았다.
“효과는 있으시던가요?”
“수도에 와서 처음으로 잠을 편히 자고 있소. 허리 통증이 점점 줄고 있어요. 혹시, 이상한 약은 아니오?”
나는 두 손을 마구 저었다.
“군종 의사들이 마약을 무분별하게 섞어 쓴다고 들었어요. 걱정하시는 게 그거라면 절대 걱정하지 마세요.”
“그럼?”
“신경의 회복을 위해 흔히 처방되는 약초인데 가공 방법을 바꾼 것뿐이에요. 최고의 실력자에게 검증도 받은 거니까 걱정 마시고요.”
약초의 성분을 고농도로 추출하는 새 제조법은 휘니드 로이만 약제실장님의 아이디어였다.
나는 실장님의 실험을 도우면서 그 재료로 론드 경의 병증에 도움이 될 만한 약초를 골랐다. 물론 허락을 얻어 결과물도 챙겨 왔고.
“나는 뇌물을 먹여도 쓸모가 없는 사람인데.”
“그런 거 아니라고요.”
내가 발끈하자 그가 나를 흘끔 바라보았다. 이런 부분에는 설명을 제대로 해 두는 편이 나았다.
“저는 툰바르 산촌 출신이에요. 아마타족의 근거지와는 거의 반대편이지만, 툰바르산맥이 사람을 얼마나 싫어하는지는 잘 알아요.”
그는 많은 기억에 치이는 사람처럼 긴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들 말하더군. 툰바르는 사람을 싫어한다고.”
“약초는 어릴 적 취미 같은 거니까 오해하지 마시고요.”
“취미로 그 정도면 의사가 되는 건 어떻소?”
“저는 이미 직업이 있어서요. 시녀라고…….”
나도 땅이 꺼지라 한숨을 쉬자 론드 경이 피식 웃었다.
나는 뚱하니 물었다.
“황녀 전하께서 며칠째 침소에서 안 나오시는데 혹시 방법 없을까요? 경은 황녀 전하를 저보다 오래 보셨잖아요.”
“전하는 원하는 걸 얻으셔야 하지. 다른 방법은 없어요, 로아르 양.”
“제가 황녀 전하께서 방에서 나오시길 원하는 건 시녀로 일하기 위해서인데, 제가 시녀 자리에서 물러나서 전하께서 방에서 나오시게 하면 아무 소용이 없잖아요, 론드 경.”
그는 내 정신없는 말에 이마를 잔뜩 찌푸리더니,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전장에서는 그걸 교착 상태라고 부르오. 그럴 땐 기다리는 것도 방법이오.”
“그건 지금 하고 있어요.”
나는 그렇게 대답하고 차를 들이켰다.
그의 말대로 지금 또 섣부른 짓을 했다가는 내 목이 위태로웠다. 황녀 전하가 나를 불러 욕을 하든 포기하고 나를 받아들이시든 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후원은 참으로 평화로웠다. 예쁘게 종알거리는 새소리에 산들거리는 바람까지.
황궁은 겉모습만 보면 모든 것이 완벽하게 정돈된, 마치 천국의 일부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안에서 편안해지는 건 여간해서는 힘든 일 같았다.
나는 멀리서 에리아가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걸 보고 데자뷔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