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월담하는 공자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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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월담하는 공자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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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월담하는 공자님(1)
2023.04.10.
밀리오라는 입술을 씹었다.
“내 시종인 르네 자작도 통과 못 할 시험을 통과한 아이라면 작은 흠결 정도는 참아 주어야지. 네가 그 이상의 시종을 거둘 수 있을 것 같으니?”
“…….”
“네 곁에도 과자나 뜯어 먹는 계집애 이상이 필요할 거라는 생각이 안 드는 거니? 경연에 대해서 아무 생각이 없는 것 같아 걱정이구나. 폐하께서 실망하실 거야.”
밀리오라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다. 경연은 나중 일이고, 티 파티 멤버들이 모욕당한 것이 억울했다.
“오라버니, 그들은 모두 명문가의 자녀들이고 제 친구들이라고요!”
“세 번째 사자는 그들 모두를 합친 것보다 폐하께 더 유용한 인물이다. 그에게 불필요한 부담을 주지 마라.”
“부담은 그 애가 주고 있잖아요. 제 아버지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도 모르고 황궁에 머리를 디미는 사생아라니,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시겠어요? 저는 정말 비참하다고요! 제발 다른 애를 보내 주세요, 오를 오라버니.”
“미천한 인간일수록 작은 것에도 감사하며 명령을 받드는 법인데, 너는 그런 애 하나 다루지 못하는구나. 혹시 그 사생아가 네게 과분한 거니, 밀리오라?”
“…….”
밀리오라는 제 오라비의 미소에서 네가 사생아보다 나을 것이 무어냐는 질문을 읽었다.
과분하냐니. 사생아 따위가 과분하냐니.
밀리오라는 핑 도는 눈물을 참으려 습관대로 또 입술을 콱 씹었다. 피가 터진 입안에서 쇠 맛이 느껴졌다.
그녀는 제가 사생아를 보는 그 눈빛으로 저를 보는 오를의 시선을 더 견딜 수 없어 몸을 획 돌려 달아났다.
그녀는 문으로 향하며 방향을 조금 틀어 벽의 좌대에 놓인 도자기를 팔꿈치로 밀치고 지나갔다.
와장창 소리에 문 앞을 지키는 호위 기사들이 달려 들어와 오를의 안위를 확인했다. 황녀가 나가는 것을 지키는 자는 없었다.
그녀가 1황자궁을 나오자 산과 같은 몸집의 기사가 그녀 앞을 막아섰다.
론드는 이런 순간에 그녀 앞에 나타나는 것이 자폭이나 다름없는 행동임을 알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는 누구보다 두꺼운 근육을 갖고 있었고, 상처에 대해서라면 알 만큼 알았다.
밀리오라는 그를 발견하는 순간 갈등했다.
‘뭘 하고 있다가 이제 와!’ 하고 고함쳐야 할지, ‘누가 여기 나타나래!’ 하고 악을 써야 할지.
그리고 이런 고민을 하게 만드는 그를 즉시 미워했다.
그녀는 드레스 자락이 날리도록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오를 오라버니의 기사들은 도자기만 깨져도 전쟁이라도 난 듯이 달려들던데, 내 호위 기사는 어쩜!”
하지만 론드는 묵묵히 그녀의 뒤를 따를 뿐이었다.
밀리오라는 황녀궁에 도착하자 갑자기 그에게로 돌아섰다.
그녀를 따르던 론드는 본의 아니게 그녀와 바짝 마주 섰다. 그의 거대한 체구 앞에서 밀리오라는 꼬마처럼 보였다.
“왜!”
“……?”
“왜 안 물어봐?”
“뭘 말씀이십니까, 전하.”
“내가 왜 화가 났는지 왜 안 물어보냐고!”
론드의 깊은 회색 눈이 밀리오라의 촉촉한 눈을 가까이서 내려다보았다.
“제가 여쭤보면 화가 풀리시겠습니까?”
밀리오라는 그의 반문에 움찔 몸을 물렸다. 두려움을 느낀 소동물의 몸짓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사납게 말했다.
“경이 알 리가 없지. 쓸모없어! 어쩜 내 주변엔 하나같이 다 쓸모없는 인간들만 있는지!”
그 말에 론드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밀리오라는 자신이 방금 부상으로 야망이 꺾인 기사를 모욕한 사실을 깨닫고 놀라 입을 벌렸다.
“경, 나는 그런 뜻이 아니라…….”
하지만 론드는 고개를 들어 앞을 가리켰다.
“들어가시지요, 전하.”
신장 차이 때문에 밀리오라는 그의 눈빛을 볼 수가 없었다. 자신에게 화가 났는지 아닌지.
그녀는 확인할 수 없는 그 사실이 다시 절망스러워서, 눈물이 핑 도는 채로 앞장섰다. 쇠 맛이 다시 났다.
* * *
금방이라도 병사들이 들이닥쳐 나를 끌어낼지도 몰랐기 때문에, 나는 방 안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사방이 너무 조용하게 느껴졌다.
황족 모욕죄로 감옥에 끌려가면 내 이름을 로리샤 로아르가 아니라 로리샤 로바라고 말해야지 싶었다가, 원망하는 마음이 불쑥 올라왔다.
그러게 백작님은 왜 나를 이런 데로 보내서는. 내가 속할 수 없고, 내게 어울리지도 않는 이런 곳으로.
미샤라면 적어도 이런 식의 사고는 치지 않았을 것이다.
감옥에 끌려가면 말해야지. 나는 백작님이랑 몇 년 살지도 않았고, 어릴 때부터 막돼먹은 년이라서 아무도 어쩌지를 못했다고.
백작님의 애정과 교육은 나를 교화시키는 데는 소용이 없었다고…….
“그거 되게 끔찍하게 들리네.”
나는 내가 만들어 낸 변명에 침울해졌다.
그때 창이 가볍게 탕탕 울렸다.
“아, 깜짝이야!”
나는 쌍욕을 할 뻔한 걸 겨우 삼키고 창가로 달려갔다.
병사들이 창으로 들어올 리는 없…….
“오우, 썅…….”
나는 결국 욕을 뱉고 말았다. 내 창문을 톡톡 두드리는 사람은 카이델 공자였다.
나는 놀라 입을 쩍 벌렸고, 카이델 공자는 빨리 열라고 찌푸렸다.
나는 홀린 듯 창을 열 수밖에 없었다.
“……하.”
카이델 공자는 몹시 우아한 자태로 창을 넘어 들어와 문을 닫았다. 그리고 옷을 탁 털어 매무새를 다듬었다.
그는 도둑질을 해도 저렇게 태가 나겠지 싶었다. 빌어먹을 귀족 놈들.
그가 돌아서 나를 향해 웃었다.
“로아르 양.”
“제가 인사를 받아야 하나요?”
나는 팔짱을 끼며 삐딱하게 말했다.
“첫 번째 사자의 아드님이 여자 방 창문이나 넘어 다닐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요?”
“그만 빈정거려요. 나는 당신이 걱정되어서 온 거니까.”
“그…….”
나는 뭐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생각이 안 났다. 제기랄.
“아니, 아니……. 왜 공자님이 제 걱정을 하세요?”
“그러게 누가 사고 치래요? 귀찮아서 정말.”
이 또라이 새끼가 지금 뭐라는 거야?
나는 울컥하여 다시 말문이 막혔다. 동시에, 내가 황녀궁에서 방에 남자를 끌어들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순간 피가 다 식는 기분이었다.
‘이대로 병사들이 들이닥친다면……!’
나는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고 카이델 공자가 들어온 창으로 팔을 쭉 뻗어 손가락질했다.
“나가요!”
이번에는 카이델 공자가 팔짱을 꼈다. 여자 방에 무단침입한 주제에, 자기가 먼저 얼굴에 짜증을 내고 있었다.
“황녀 전하의 티 파티를 망쳤다면서요? 황궁에 소문이 파다해요.”
“그, 그거야……. 공자님 안 바쁘세요? 방학이라고 막 노세요? 계속 아카데미 수석하시려면 방학 때 열심히 공부하셔야죠! 심지어 미샤도 공부한다고요.”
수석이라는 말에 그의 이마에 주름이 더 사납게 잡혔다.
하지만 그는 바로 빙긋 웃음을 띠더니 내게 호의라도 베푼다는 듯이 말했다.
“대체 무슨 생각이었는지 궁금해서 왔어요. 걱정 말아요, 끼어들어서 돕거나 할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 그저 순수한 호기심이랍니다.”
“…….”
나는 상황을 얼른 이해하기 힘들었다. 내 머리를 시궁창에 처박은 건 나 자신이었고, 그것이 2황자 전하에게 어떤 피해를 끼쳤을 리도 없었다.
그런데 카이델 공자가 월담까지 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백작님의 입장은 생각 안 합니까?”
이 자식이 진짜, 아픈 데만 콕콕…….
“저기요, 공자님. 지금이라도 병사들이 저를 황족 모독죄로 체포하러 이 방에 들이닥칠 거예요. 그 전에 나가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대답.”
나는 그의 뻔뻔한 얼굴을 바라보며 한 가지 사실을 더 깨달았다.
그에게는 병사들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첫 번째 사자의 아들이며 2황자의 시종, 아카데미 수석. 병사들은 그를 보면 오히려 방해해서 죄송하다고 사과하며 나만 잡아갈 것이다.
그것이 우리 두 사람의 근본적인 차이였다. 세상은 그를 위해 질서를 재정렬했고, 나는 세상의 질서를 따라가기도 버거웠다.
그런 생각이 들자 천천히 불쾌감이 번졌다.
그가 그렇듯 커다란 권력과 자유를 소유한 사실을 그의 잘못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건 알았지만, 그렇다고 내가 꼬라지가 안 날 수도 없었다.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악연도 이런 악연이 있는지.
그사이 그는 마치 자기 집처럼 편안한 태도로 소파에 앉았다. 긴 다리를 가볍게 꼬고 앉은 우아하고 여유로운 옆모습이 그렇게 재수 없을 수가 없었다.
아무튼 이 불쌍한 사생아는 불필요한 죄명을 추가하지 않기 위해 그를 빨리 내보내야 했다.
그런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그가 힘이 센 사람이라도 여긴 외간 남자의 출입을 엄격하게 단속하는 황녀궁인데…….
“병사들은 안 오나요?”
그는 내가 눈치가 빨라서 짜증이 난다는 듯이 눈썹을 살짝 휘었다.
나는 갑자기 긴장이 풀려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설명을 기다리며 그를 째려보자, 그는 재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체포당하지 않게 막아 줄 테니 당신이 그 편지를 썼다고 자백하게 만들려 했는데, 어렵겠군요.”
그놈의 장난 편지 한 통 때문에 황녀궁에 침입했다니, 나는 진심으로 놀라워 입을 쩍 벌렸다.
“우와……. 그거 엄청난 집착이네요.”
하지만 그는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했다.
“나 스스로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편이라고 평가하는 편이에요.”
“아. 기회.”
이번에는 내가 물었다.
“병사들은 왜 안 와요?”
“당신이 말해 보죠.”
좀 이상했다. 그의 말투는 전보다는 더 격식을 갖추는 듯 느껴졌지만, 전보다 조금 더 날이 서 있었다.
지금까지 그와 특별히 친한 적도 없었지만, 그동안 그에게서 저절로 흘러나오는 편안한 인간적인 매력 같은 것이 지금은 잘 느껴지지 않아 약간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