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황녀 전하의 티파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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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황녀 전하의 티파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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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황녀 전하의 티파티(2)
2023.04.09.
“과연. 수치 속에서 태어난 사생아는 수치심을 모르는 걸까요? 나는 이제 마카롱을 더 먹지 못할 것 같아요.”
단 걸 이미 실컷 먹었으니까 그렇지.
그러자 맞은 편의 누군가가 다 들리게 중얼거렸다.
“더러워.”
저년이 아주 확…….
나는 입을 앙다물뻔했으나 침착하게 평정을 유지했다.
하지만 내가 반응하지 않는 만큼 그들의 분노에 찬 대화도 계속되었다.
“모름지기 시녀란 주인의 명예를 드높여야 하는데, 정말…… 차마 이 상황은 황녀 전하 앞에서는 입에 담을 수가 없군요!”
“시녀 하나가 황녀 전하의 위신에 얼마나 상처를 주게 될지……. 저는 심장이 마구 뛰어서……!”
저거다.
내가 참지 말아야 할 지점은.
저들은 나를 공격하고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실은 나를 돕고 있었다.
나는 입가에 번지는 웃음을 꾹 누르고 그들을 향해 다가섰다.
그리고 꽤 엄숙하고 결연하게 말했다.
“네. 여러분 말씀대로 저는 밀리오라 황녀 전하의 시녀예요. 타가르의 작은 태양 중 한 분의 추천을 받아 밀리오라 전하를 모시러 입궁한 시녀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저를 제 주인 앞에서 공공연히 모욕하시는군요.”
“세, 세상에! 어쩌면 저렇게 뻔뻔하지?”
“여기가 누구 앞이라고, 감히 황녀 전하 앞에서 또박또박 입을 놀려?”
나는 그들의 말을 무시한 채 똑바로 서서 턱을 쳐들고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시녀장의 턱짓을 따라 할 기회가 이렇게 빨리 올 줄이야.
“하나 묻지요. 이 자리의 영애들께서는 시녀를 모욕하는 것이 주인에 대한 모욕임을 모르시나요?”
“뭐, 뭐라고?”
“모르면 모르는 대로, 알면 아는 대로 문제군요.”
“저게……!”
케릴이 흥분을 못 이기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옆자리의 영애가 그녀의 팔을 잡아당겨 주저앉혔다.
그들의 실수를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저희가 먼저 나를 황녀 전하의 시녀로 인정함으로써 내게 권위를 실어 주고 말았다는 것을 말이다.
그 사이에 앉은 밀리오라 전하의 얼굴은 싸늘해서 쇠처럼 보였다. 은은한 광택을 내는 은발은 타가르 황족을 언제나 평범한 인간과는 다른 차갑고 동떨어진 존재로 보이게 만들었다.
영애들 중 하나가 상황을 수습하려는 듯 재빨리 말했다.
“우리에게는 그런 의도가…….”
황녀 전하의 명령은 짧았고 나직했다.
“다들 나가.”
사라락거리는 드레스 치맛자락 소리와 카펫에 뭉개진 구두 굽 소리가 순식간에 멀어졌다. 나는 그들 중 하나가 테이블에서 마카롱을 재빨리 쥐고 나가는 것을 보며 실소했다.
모두 나가고 문이 닫히자, 황녀 전하는 그제야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입술이 바르르 떨리는 모습을 보니 몹시 흥분한 것 같았다.
그렇게 흥분한 채로도 나 같은 것과는 말을 섞기 싫어 입술을 꼭 물고 있는 모습을 보니 그녀가 나를 얼마나 지긋지긋하게 싫어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 시선에 담긴 것은 내가 지금까지 익숙하게 겪어 온 것과는 다른, 더 날카롭고 예민한 혐오였다. 나는 솔직히 조금 상처를 받았다.
밀리오라 황녀 전하의 목소리는 체구와 어울리게 작았지만 날카로웠다.
“지금, 뭐 하는 짓이니? 로아르.”
나는 정중하게 머리를 숙이고 대답했다.
“저는 시녀장이 치른 두 번의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그 후에 부르셨으니 제 직무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가? 너를 시녀로?”
밀리오라 전하는 나를 도저히 못 견디겠다는 기색이었다. 물러설 때였다.
“티 파티가 끝났으니 이만 물러갈까요?”
“하!”
나는 그대로 응접실을 나왔다.
전실에서는 에리아가 두려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나는 곧장 내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귀족 영애다운 몸가짐과 예법은 사생아라는 모욕만큼이나 지치는 일이었다.
나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녀가 내게 욕을 하거나 물건을 집어 던지며 패악을 부리지 않은 이유를 나는 알고 있었다. 나를 적극적으로 모욕하지 않은 이유도.
그것은 내가 사생아였기 때문이다. 너무 더러워서 말을 섞거나 닿을 수도 없는 대상.
미움이나 분노는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그녀에게 나는 그 정도도 되지 못했다.
나는 신분이 더 고귀할 뿐인 미샤를 돌보는 거라는 내 관점을 버리기로 했다.
최소한 미샤는 나를 때리고, 모략하고, 싸우려 덤볐다. 이 정도까지 경멸하지는 않았다.
생각해 보면 이 로리샤 로아르는 곧잘 센 척을 해 보지만 결국은 언제나 현실에 지고 말았다. 엄마를 잃은 것도, 아카데미를 포기한 것도. 심지어 약재상 점원 자리조차 지키지 못했다.
이 자기 파괴적인 자괴감이 단지 황녀 전하의 침묵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녀는 과연 타가르였다.
“시녀님, 잠시 들어가도 되나요?”
에리아였다.
“그래. 들어와.”
그녀는 내 눈치를 보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나는 그 웃음의 의미가 궁금했다.
저처럼 황녀 전하에게 구박당하는 약자로서의 동질감인지, 내가 귀족 아닌 저희와 별반 다를 것 없는 사생아라고 그러는 것인지.
나는 늘 어중간한 상태로 여기도 저기도 걸맞지 않은 인간이었으니, 그녀가 나를 로아르로 대우하지 않는다고 불쾌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에리아는 내 눈치를 보며 물었다.
“괜찮으세요, 시녀님?”
시녀님이라니.
바뀐 호칭을 들으니 쓴웃음이 나왔다. 아까의 내 목숨 건 객기가 최소한 황궁 하녀 하나는 감동하게 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호칭은 신기하게도 내 기분을 금세 나아지게 했다.
완전히 기운을 차려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아까 다 말아먹은 게 아니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정도는 되었다.
“그냥……. 아까 좀…….”
“괜찮지, 당연히. 하하하.”
나는 그쯤 일이야 아침마다 똥 누기 전에 치른다는 듯이 웃었고, 에리아는 그런 나를 의구심 가득한 시선으로 보다가 더 찌푸렸다.
“시녀님, 지금 황녀 전하께서 1황자궁에 드셨어요.”
“응?”
“알려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저는 그럼.”
에리아는 달아나듯이 가 버렸다.
1황자궁이라니, 밀리오라 전하가 도저히 참지 못하고 폭발해 버린 모양이었다.
나는 다시 침대에 드러누우며 킬킬거렸다.
“약초나 팔아야겠네.”
* * *
오를 타가르는 자기 앞에서 씩씩대는 누이를 향해 가볍게 찌푸렸다.
가볍게 숱이 쳐진 앞머리, 눈을 살짝 가린 은빛 모발 사이로도 누이에 대한 혐오감은 퍽 신랄하게 드러났다.
어쩌면 차가운 금속을 연상케 하는 타가르의 은발은 누구라도 경멸하는 듯이 보이게 하는지도 몰랐다.
로리샤 로아르는 자신에 대한 황녀의 지극한 혐오와 경멸이 자신의 출생에서 비롯된다고 믿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2황녀 밀리오라는 누구나, 아무나 그토록 혐오했다. 바로 자신이 이 땅의 가장 고귀한 자들에게 그런 식으로 경멸당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단지 배운 대로 행하는 것뿐이었다. 그 배움을 행할 때마다, 그녀의 영혼은 낫지 않는 상처를 입었다.
그녀는 지금도 스스로 새 생채기를 만들고 있었다. 큰 오라비 오를은 그녀에게 무엇이 문제냐고, 왜 화가 났느냐고 물을 생각조차 없었다.
오히려 자신 앞에 나타난 그녀의 존재가 문제라는 듯이 눈살을 찌푸릴 뿐이었다.
하지만 밀리오라의 혈관에는 오를과 마찬가지로 타가르의 자존심과 오만함이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억울하고 비참한 사람이라는 확신 속에서 분노를 내비쳤다.
“오라버니, 오늘 그 사생아가 제 티 파티를 어떻게 망쳐 놓았는지 알기나 하세요? 오라버니가 그 꼴을 보셨다면 당장 끌어내서 교수형을 시켰을 거예요! 당장 병사들을 부르려다 오라버니께 온 거예요. 그 애를 물려 주세요.”
“밀리오라. 목소리가 크구나.”
“세 번째 사자가 저를 이토록 능멸하다니 믿을 수가 없어요. 그는 오라버니 또한 능멸했죠. 그가 아무리 폐하의 총애를 받았다고 해도 감히 자기 사생아를 황궁에 넣을 생각을 해요? 미치지 않고서야…….”
“밀리오라.”
“오를 오라버니!”
오를의 음성이 커지자 밀리오라도 언성을 높였다. 그녀가 가진 무기란 막내딸의 지위를 우려먹는 것이었다.
영원히 자라지 않는 소녀가 되어 철없이 울며 떼를 쓰는 것이 그녀에게 허락된 존재 방식이었다.
그녀가 황녀로서의 위엄을 드러내려 하거나 오라비들과 힘겨루기를 하려 든다면, 그날로 그녀의 안전은 끝이라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제가 뭘 잘못했다고 사생아를 곁에 두어야 해요? 그 애가 있으면 제 티 파티에는 아무도 오지 않을 거예요. 큰 오라버니는 저를 왜 그렇게 미워하시는 거예요?”
오를은 그녀를 면전에 두고 보는 것만으로도 지친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너야말로 나를 능멸하고 있구나, 밀리오라.”
“오…… 라버니!”
오를의 그 말 한마디는 밀리오라를 겁먹게 했다. 타가르의 장남은 그녀가 건드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말문이 막힌 밀리오라에게 천천히 말했다.
“사생아라지만, 그 아이는 세 번째 사자의 핏줄이다. 게다가 이미 능력을 증명했다던데.”
“무슨 증명을…….”
“시녀장이 낸 매우 어려운 시험을 통과했다던데 내가 틀리게 들었니?”
하지만 그녀도 이번만은 물러날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는 티 파티가 소중했다. 이번 일은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밀리오라는 분하여 씩씩거리며 대꾸했다.
“시험만 붙으면 길거리 거지도 제 시녀로 쓰실 건가요?”
“말조심하거라.”
오를의 목소리는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기백이라고 부를 것은 결여된 병색이 깃든 음성이었으나, 그런 탓에 거기 깔린 위협이 오히려 선연하게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