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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황녀 전하의 티파티(1) (35/155)


35화. 황녀 전하의 티파티(1)
2023.04.08.


오전으로 접어들었지만 시녀장은 나를 불러내지 않았다. 필기와 실기를 다 통과했으니 황녀 전하도 다른 구실을 만들어 내지 못하면 나를 받아들일 차례였다.

황녀 전하가 그걸 고민하는 동안 오늘 하루는 여유롭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몇 가지를 챙겨 곧장 후원으로 갔고, 어제와 같은 자리에 바위처럼 앉아 있는 론드 경을 발견했다.

“론드 경!”

그는 귀찮은 벌레가 날아왔다는 듯이 이마를 찌푸렸다.

그것이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벌레만큼이나 그를 귀찮게 하는 것이 사실이었고, 앞으로도 그를 귀찮게 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마음에 두지 않기로 했다.

“경, 뭐 하고 계셨어요?”

“…….”

“네. 저도 그래요. 오늘은 좀 쉬려고요.”

나는 혼자 떠들기 시작했고, 그래서 론드 경은 내가 저절로 사라지리라는 기대를 포기한 것처럼 입을 열었다.

“전하는 조금 후에 티 파티가 있으시오.”

론드 경은 나를 거기로 보내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쉴 수 있는데 왜 일하냐고요.

나는 가져간 작은 병을 꺼내며 말했다.

“그래요? 그러면 우리도 뭐 좀 마실까요?”

론드 경은 기가 찬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다가 컵을 받아 들었다. 조금 맛보았다가 의외로 마음에 드는지, 그때부터 홀짝거리기 시작했다.

커다란 손에 바위 같은 덩치로 쪼끄만 찻잔을 들고 홀짝거리는 그의 모습은 의외로 귀여웠다.

나는 그에게 차를 따라 주고 나도 마셨다. 후원에 앉아 따뜻한 차를 마시니 기분이 그렇게 좋아질 수가 없었다.

“황녀 전하께 인사는 드리셨소?”

“아니요. 인사는 무슨. 시녀장님은 오늘도 아마 절 쫓아낼 구실을 찾고 계실 거예요. 어제 제가 예법 시험까지 통과했거든요.”

“아가씨를 누가 추천했다고?”

“1황자 전하이신가 봐요.”

“저런.”

“‘저런’이요? 그건 무슨 의미예요?”

“당분간 황궁에서 나가기는 힘들 거라는 의미요.”

“아. 네.”

좋아해야 할지 싫어해야 할지.

“제가 끓인 거지만 차 맛 참 좋네요.”

“흠.”

“그런데 경은 어쩌다가…….”

그때 우리는 누구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하녀를 동시에 발견했다.

“이만 가 봐야겠소.”

론드 경이 다시 바람을 일으키며 일어났다.

하지만 우리를 발견한 하녀는 그가 아니라 나를 불렀다.

“로아르 양, 황녀 전하께서 부르세요.”

나는 론드 경의 눈에 깊고 날카로운 실망감이 스치는 걸 보았다. 나는 얼른 품에서 약병을 꺼내 벤치에 놓고 하녀를 따라갔다.

“론드 경, 이거 물에 타서 하루에 한 잔만 드세요.”

갈색 머리를 곱게 땋아 내린 하녀는 잰걸음으로 나를 황녀궁 안으로 안내했다. 뭐가 그렇게 급한지.

“난 로리샤야. 너는?”

“저는 에리아라 합니다. 로아르 양.”

그녀는 기계적으로 대답했을 뿐, 나와 더 대화할 생각이 없었다.

황녀 전하의 응접실 앞에 멈추자 에리아는 낮고 빠르게 말했다.

“황녀 전하께 인사드리는 방법은 알고 계시지요? 전하께서 시선을 주거나 말을 거시면 그때 예를 갖추시면 됩니다.”

알아. 안다고.

나는 잔뜩 긴장한 채 문 앞에 섰다. 드디어 밀리오라 황녀 전하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문이 열리고, 나는 응접실로 걸어 들어가며 속으로 감탄했다.

아이보리 프레임에 금빛 테두리로 장식된 실내는 조도와 관계없이 눈이 부시는 착각을 만들어 낼 정도였다.

고풍스러운 붉은 꽃무늬 소파에 나란히 앉은 아름다운 드레스 차림의 영애들은 커다란 꽃들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밀리오라 타가르, 제국의 황녀 전하가 앉아 있었다.

허리까지 오는 곧게 찰랑거리는 은발에 창백할 정도로 완벽한 피부. 작고 오목조목한 얼굴에 녹색 눈이 유난히 크고 빛났다. 키는 작은 편이 아님에도 골격이 작아서, 마치 살아 있는 인형처럼 보였다.

예쁘다.

그것이 밀리오라 황녀 전하에 대한 내 첫인상이었다.

내가 인사하기 위해 소파로 다가가자 우아한 몸짓으로 차를 마시던 영애들이 일제히 나를 돌아보았다. 그 작은 정적에는 적지 않은 긴장감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황녀 전하는 내가 보이지 않는 듯이 무심한 몸짓으로 디저트를 입에 넣고 있었다.

“이거 정말 맛있지 않아?”

그러자 황녀 전하 곁에 앉은 여자가 재빨리 대답했다.

“최고예요, 황녀 전하. 가끔 자기 전에도 이 마카롱이 생각날 정도라니까요.”

“어머, 케릴 양도요? 저도 그래요.”

“저도요. 호호호.”

여자들은 일제히 까르르 웃었고, 그것으로 방 안에서 내 존재는 지워졌다.

나는 마치 기사가 결투에 앞서 검을 뽑기 직전의 기세로 예를 갖출 준비 동작을 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졸지에 투명 인간이 되어 버렸고, 황녀 전하는 영애들과 무의미한 대화와 웃음을 이어 갔다.

‘이런 뭣 같은…….’

나는 밀리오라 전하가 나를 떼어 내는 데 실패하자 괴롭히기로 했음을 직감했다. 이런 개무시로 모욕감을 주어 내가 울며 뛰쳐나가도록 말이다.

‘어쩌지……. 나 안 나갈 건데.’

나는 당황을 추스르고 눈을 흘끔 들어 실내를 바라보았다. 이 정도로는 내게 이도 안 들어간다는 걸 깨달으면 황녀 전하는 훨씬 포악해질지도 몰랐다.

이 방 안 물건들이 모두 반짝반짝 빛나는 새것인 이유는 그녀의 사치가 심해서가 아니었다. 자꾸 때려 부수니까 늘 새것이 비치되는 거다.

그러니 그녀가 내게 저 마카롱을 접시째 집어 던져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사실 슬쩍 기대되기도 했다. 내가 날아온 마카롱을 받아먹어 버리면 그녀가 어떤 얼굴을 할지.

저 마카롱은 퍽 맛있어 보였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티 파티의 영애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피식거리고 있었다.

나는 황족에게 먼저 말을 걸면 안 된다는 사실을 곱씹으며 입을 꾹 다물었다. 예를 갖추려고 살짝 붙잡았던 치맛자락은 그대로 꽉 붙잡은 채였다.

케릴이라는 여자가 황녀 전하에게 말했다.

“저희 아버지께서 바다 건너에서 구해 오신 다리프 차가 있는데 황녀 전하께 바쳐도 될까요?”

“좋지. 나도 다리프 좋아해. 마카롱이랑도 잘 어울리잖아. 그렇지?”

“역시 황녀 전하의 취향은 고상하세요.”

“난 아부는 싫어해. 케릴.”

“어머! 저는 사실만 말한답니다. 안 그래요, 여러분?”

“그럼요. 케릴 양은 늘 사실만 말하는 걸요, 전하.”

어찌나 지랄 맞게 화기애애한 티 파티인지.

그때 일제히 깔깔거리던 여자 중 하나가 웃다가 마카롱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그것은 바닥을 도르르 굴러 내 치맛자락에 부딪혀 멈추었다.

나는 무심결에 그걸 주워 치우려다가 동작을 멈추었다. 그런 채로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자, 투명 인간에게 주워 달라고 말할 거야?’

그녀는 당황하여 나와 황녀 전하 쪽을 번갈아 흘끔거리다가, 밖에 있는 하녀를 불러들였다.

“밖에 있니?”

에리아가 달려 들어오자 그녀가 말했다.

“마카롱을 흘렸는데 치워 줄래? 나중에 전하께서 밟기라도 하시면 큰일이잖아.”

“예.”

에리아는 얼른 바닥을 살피다가 내 치맛자락 앞에 놓인 마카롱을 발견하고 당황했다. 내가 그걸 쏘아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밀리오라 황녀 전하는 나와 에리아 쪽을 외면하듯이 몸을 돌려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에리아는 쭈뼛거리며 내게 다가왔고, 나는 그녀보다 먼저 마카롱을 집어 내밀었다.

그리고 크게 말했다.

“로리샤 로아르가 타가르의 작은 태양 밀리오라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타가르에 영원한 광영을.”

놀란 티 파티 손님들은 일제히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황녀 전하는 그 정적 속에서 희고 가는 손가락을 뻗어 찻잔을 들었다.

아주 작게 크흠, 하고 불편한 소리를 내면서.

그러자 라이선 남작가의 케릴이 내가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여전히 내가 투명 인간, 아니면 오물이라도 된다는 듯이 내 쪽을 외면한 채로 말이다.

“허락도 구하지 않고 황족에게 말을 걸다니. 후안무치한 것을 보니 역시 사생아는 사생아네!”

“어머, 세상에!”

“신성한 황궁에서 이런 걸 보게 되다니!”

티 파티의 영애들은 내 목소리를 들은 것만으로도 자신들이 더럽혀졌다는 듯이 호들갑을 떨며 손으로 부채질을 하기도 했다.

시장에서는 이럴 때 쓸 만한 표현이 상당히 다양하게 존재한다. 주로 ‘눈깔’이나 신체 훼손과 관련한 어휘가 들어간 생동감 있는 표현들이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묵묵히 바라보기만 했다. 성년이 되니까 자제력도 좀 생기고 상황을 관조하는 능력도 생겼다고 해야 하나.

나는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었다. 이대로 황족에게 무례를 범한 천한 사생아가 되든지, 아니면 황족 앞에서 무례를 범한 미친 시녀가 되든지.

갑자기 카이델 공자가 2황자 전하에게 미친놈 소리를 듣는 것은 직업 재해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물론 그와 내 상황이 같았을 리는 없지만 말이다.

내가 상큼하게 웃으며 케릴을 똑바로 바라보자, 그녀는 놀라 입을 쩍 벌렸다. 내 반응이 그녀의 예상을 벗어난 탓이었다.

케릴 라이선, 너는 지금까지 이렇게 뻔뻔한 사생아를 본 적이 없을 거야. 이건 내게 흐르는 피 탓이야.

내 피의 반은 사자거든.

나는 정중하게 말했다.

“무례를 용서하세요. 에리아, 다과가 부족한 것이 없는지 확인하고 더 채워 줘.”

나는 허리를 깊이 숙여 사과한 다음 벽 앞으로 가서 섰다. 황녀 전하의 지시가 떨어지면 바로 실행하겠다는 의지가 뚝뚝 떨어지는 자세였다.

내가 소파에서 멀어지자 영애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하!’ 하는 소리만 연신 냈다.

돌아서며 흘끔 본 것이지만, 황녀 전하는 은발이 차갑게 보일 정도로 눈이 화가 나 있었다.

그사이 에리아는 눈으로 테이블을 훑고서 겁먹은 얼굴로 나갔다. 다과를 금방 들인 탓에 부족한 것은 없었다.

분해서 파들거리던 케릴이 포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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