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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호위기사 론드 경 (34/155)


34화. 호위기사 론드 경
2023.04.07.


“알지요. 작년에 계단에서 넘어져 피부가 찢어졌는데 피가 한 방울도 안 나왔다더군. 소문이요.”

“풉……. 하하하!”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오는 사람보다 더한 사람이 여기 있었다.

내가 웃음을 터트리자 그가 피식 웃었다. 그의 기준으로는 그게 폭소인 모양이었다.

“큰일 날 뻔했네요. 어쩌다 넘어지셨대요?”

“누가 밀었다더군. 범인은 못 잡았는데 보나 마나 앙심을 품은 하녀겠지. 수시로 아무나 매질을 해 대니까.”

“어머, 저런.”

가만히 보면 이 황궁은 크고 화려한 건물 안에 백작 부인 같은 이가 열 명쯤 사는 것 같았다.

예전 같으면 앞날이 암담하다는 생각이 들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담담했다.

이것도 어른이 된 탓이려나.

“제 걱정은 마세요. 매질쯤이야, 뭐.”

그러자 론도 경은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가 진심으로 놀란 표정을 보고서야 나는 아차 싶었다.

“세 번째 사자께서 그리 엄하시오?”

“헉!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그는 내가 백작님께 맞고 큰 걸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나는 놀라 손을 휘젓다가 내가 할 수 있는 변명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백작님이 아니라 백작 부인에게 맞고 학대당해서 이골이 났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때 출입로 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우리 쪽으로 오는 사람을 보고 나는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저런 여유로운 걸음의 깜장 머리는 하나뿐이었다.

아, 깜짝이야!

“여기는 어쩐 일이시죠?”

나는 카이델 공자를 향해 도끼눈을 뜨고 물었고, 론드 경은 내 갑자기 달라진 태도에 놀라서 나를 바라보았다.

“카이델 공자님.”

“로아르 양. 론드 경.”

론드 경은 퍽 깍듯하게 인사했고, 카이델 공자는 인사를 받은 다음 내게 말했다.

“산책 중에 당신을 우연히 만나다니, 뜻밖입니다. 로아르 양.”

우와.

카이델 공자의 성의 없는 말투는 누가 들어도 ‘네가 여기 있지, 어디 있었겠어.’라고 들렸다.

이 자식이 진짜…….

나는 그와 아는 척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저절로 침을 꼴깍 삼키며 론드 경의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카이델 공자는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었다.

“소식 들었답니다. 밀리오라 황녀 전하의 시녀로 임명되셨다고요?”

“아직 교육 중이에요.”

내가 그렇게 대답하자 그는 눈썹을 살짝 기울였다.

“교육 중인데 여기 계셔도 되는 겁니까?”

“오늘 교육은 끝났어요.”

“시간이 난다면 백작님께 안부를 전해 드리세요. 가족을 황궁에 들여보내면 걱정이 많은 법이랍니다. 음, 편지 쓰는 걸 좋아하신다면 편지도 좋겠군요. 어때요, 로아르 양?”

왜 말 안 하나 싶었다. 그놈의 편지, 편지!

“설마요. 전혀요.”

나는 눈을 휘어 접어 웃으며 대답했고, 론드 경은 의뭉스러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는 지금은 론드 경을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카이델 공자가 더 나불거리기 전에 말을 막아야 했다.

그는 이제 내가 황궁에 있으니 독 안에 든 쥐라고 여기는 모양인데 어림도 없었다.

나는 그를 쏘아보며 생각했다.

‘너도 사람이면 좀 봐줘라. 내 처지가 짐작이 안 되니? 아니면 상관이 없는 거니.’

그러자 그가 눈을 휘어 접으며 웃었다. 그 미소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꿈도 꾸지 마시죠.’

카이델 공자는 웃는 채로 말했다.

“우리 앞으로 자주 보게 될 거예요. 로아르 양.”

“아……. 애석한 일이네요.”

내가 진심으로 그렇게 중얼거렸기 때문에, 론드 경과 카이델 공자는 동시에 당혹한 기색으로 나를 보았다.

하지만 나는 그냥 어색하게 웃었다. 백작 부인이 예법 교육 때 어디 가서 절대 그렇게 웃지 말라고 했던 썩은 미소였다.

나는 카이델 공자를 앞에 두고서는 진심을 숨길 자신이 없었다.

다행인 것은 론드 경이 엉덩이가 무거운 자라는 사실이었다. 론드 경은 이 후원의 구석진 벤치가 자기 거라는 듯 움직일 기색이 없었고, 카이델 공자도 보는 이가 있는 가운데 내게 노골적으로 말할 수 없었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씀하시죠. 로아르 양.”

카이델 공자는 이만 물러나겠다는 듯 말했다. 그런데 어쩐지 그의 태도가 평소보다 싸하고 묘해서 기분이 좀 이상했다.

“아이, 설마요! 호호호.”

내가 너스레를 떨자 론드 경이 고개를 돌리고 코로 약하게 웃었다. 그의 거대한 몸체 탓에, 숨만 쉬어도 주변에 바람이 일었다.

카이델 공자는 론드 경을 향해 말했다.

“부상은 좀 어떻습니까? 론드 경.”

카이델 공자의 말투는 내게 말할 때와 달리 상당히 정중한 호감을 표시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론드 경이 예민하게 대답했다.

“한번 검을 맞대어 보시겠습니까?”

“다음으로 미루죠. 그럼 저는 이만.”

카이델 공자는 그대로 돌아갔다. 보아하니 두 사람은 아는 사이가 분명했다. 아마도 악연이었다.

나는 얼굴이 굳은 론드 경을 바라보며 물었다.

“툰바르에 다녀오신 건가요?”

“아마타족 놈들이 굴린 돌에 깔려서 갈빗대가 몇 개 나갔지만, 지금은 괜찮소.”

괜찮을 리가 없다.

나는 그의 업무량에 반비례하는 우락부락함, 우울함, 한가함의 이유를 한꺼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부상으로 약해졌지만 계속 일하기를 원했고, 황실에서는 그의 뜻을 존중하여 그를 집으로 돌려보내는 대신 가장 한가한 황족의 호위 업무를 내린 것이다.

하지만 그가 원한 것은 결코 그런 게 아니었을 테니 그 한가함으로 인해 우울해지는 것이 당연했다.

돌에 깔려 갈비뼈가 부러질 정도였다면 척추나 다른 곳도 멀쩡했을 리 없었다. 후유증이 심할 텐데 그것을 근력을 키워 버티는 모양이었다.

“부상 때문에 운동하시는 거예요?”

“…….”

그는 네가 그걸 어떻게 아냐는 듯이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외면했고, 나는 민망해져서 말했다.

“제가 좀 알아요. 이것저것.”

“…….”

“좀 오지랖이 넓죠?”

그러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벽이 움직이는 줄 알았다.

나는 그가 인사도 없이 돌아가는 걸 보다가 괜히 미안해져서 일어났다.

* * *

“로바 양! 어쩐 일이에요. 카이델 공자님을 만나러 왔나요? 방금 막 다녀가셨는데, 어쩌죠?”

“네? 제가요? 어째서 그런 생각을…….”

나는 나를 반겨 주는 로이만 실장님을 향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실장님이 내 입궁 소식을 아직 모르는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지만, 내가 그 인간과 붙어 다닐 것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은 이해해 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내게는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실장님, 저……. 호칭 말인데요.”

“음? 내가 무례했나요?”

실장님은 바로 긴장했다. 그는 연구자답게 일정 부분 특이하고 꽉 막힌 면이 있었지만 누구처럼 무례를 즐기는 사람은 아니었다.

“아니요, 그게 아니라 앞으로 저를 로바 양이라고 부르시면 제가 몹시 곤란해질 거라서요. 사실은 제가 사생아라 성을 두 가지를 쓰는데…….”

실장님은 곤혹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렇군요. 그럼 뭐라고 불러 줄까요?”

“그냥 로리샤라고 불러 주세요. 로리샤…… 로아르요.”

“……그 로아르요?”

나는 몹시 어색하게 웃으며 끄덕였고, 그는 당혹해하면서도 애써 웃어 주었다.

“저 시녀 교육을 받는 중이에요. 앞으로 황궁에서 지낼 것 같아서 실장님께 인사나 드릴까 하고요.”

“그렇군요! 오히려 먼저 찾아 주어서 내가 고마워요. 로리샤 양이 2황자 전하의 시녀가 된 건 당연한 일 아니겠어요?”

실장님은 그렇게 말하며 내게 한쪽 눈으로 윙크를 했다.

나는 그제야 내 실수를 깨달았다. 실장님은 지난번 사건 때문에 큰 착각을 하고 있었다.

대체 어쩌다가 그 깜장 머리와 이렇게 꼬이고 말았는지!

“그게 아니라, 저는 밀리오라 황녀 전하의 시녀로 입궁했어요.”

“뭐라고요?”

“그렇게 되었어요. 하하. 하하…….”

로이만 실장님은 내 말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데, 그걸 티를 낼 수도 없다는 얼굴로 인상을 쓰다가 말했다.

“아무튼 걱정 말아요. 약재상 점원 로바 양에 대해서는 이미 잊어버렸으니까.”

“감사합니다.”

“황녀궁이라고요?”

다시 확인하듯이 묻는 실장님의 얼굴에는 동정심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황녀 전하의 악명은 이미 궁 안에 파다한 것이다.

그는 약불에 끓고 있는 찐득한 녹색 액체를 저으며 어색하게 말했다.

“어쨌든 로리샤 양을 황궁에서 볼 수 있다는 뜻이잖아요. 그건 좋은 일이죠. 암. 그래요.”

나는 로이만 실장님이 내 상황의 좋은 점을 쥐어 짜내는 걸 보고 점점 절망감이 들었다.

그러다가 그는 미샤와 살아 본 적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달랬다.

“2황자 전하께는 사람이 많이 필요하죠. 그래서 무심결에 그렇게 생각했나 봐요. 누구 곁이든 황족의 시녀란 명예로운 자리예요. 축하해요. 로리샤 양.”

‘억지로 긍정적인 평가는 그만해 주셨으면 하는데요.’

나는 그제야 그레이언 전하가 제브론 호텔에서 나를 불러낸 이유를 깨달았다.

아마타전에서 돌아온 그는 황궁에서 쓸 사람이 필요했을 것이다. 전쟁터와 황궁은 엄연히 다른 곳이니까.

그런데 세 번째 사자가 딸을 데려왔다고 하여 불러내 보았더니 사생아가 나타나 그냥 돌려보낸 것이다.

내가 사생아라고 말했을 때, 나는 그레이언 전하의 눈에서 어떤 빛이 꺼지는 걸 똑똑히 보았다. 사실 그러라고 미리 말한 것이기도 하지만.

가만히 보면 내 출생은 나 자신에게보다 남들에게 백배 천배 중요했다.

나는 뻔뻔하게 대답했다.

“그러게요. 제가 감히 황궁에 들어오다니 이런 일이 일어날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그럼요. 그럼요.”

실장님은 최선을 다해 가식적으로 대답해 주며 녹색 액체를 열심히 저었다.

“그거 뭐예요?”

“엽세 잎을 우려내는 중이에요.”

“누가 발진이 났나 봐요?”

우리의 대화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실장님은 일과 관련된 대화라면 멈추는 법이 없었고, 나는 자연스럽게 그의 조수가 되어 일을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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