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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너였구나, 아카데미 수석 (33/155)


33화. 너였구나, 아카데미 수석
2023.04.06.


그는 화가 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합격이에요.”

“설마! 틀림없이 부족한 데가 있을 거예요, 카이델 공자님.”

“없는데요? 흠잡을 데 없어요.”

“공자님!”

“이 시험지를 누구에게 보여 주든 나와 같이 말할 겁니다. 굳이 떨어트리고 싶다면 글씨체가 마음에 안 들어서라고 하세요. 왜냐하면 나도 그러니까.”

방에서 나온 로카르드는 복도를 걸으며 흥분을 추슬렀다.

그는 로리샤의 시험지를 채점하다 자신이 이런 필적의 시험지를 전에도 본 적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럴 리가 없다고 부정했으나, 기억은 금방 떠올랐다.

아카데미에서 본 라보리 시하의 시험지.

라보리 시하는 분명 로리샤 로아르였다.

“너였구나. 아카데미 수석.”

로카르드는 복도에 멈추어 주먹을 꽉 쥐었다.

“……아나그램.”

로리샤 로아르는 밖에서는 ‘로바’라는 어머니의 성을 쓰고 있었다. ‘로리샤 로바’의 철자를 차례로 뒤섞으면 ‘라보리 시하’였다.

그는 어이가 없어 마른세수를 했다.

‘지금 제정신이야!’

그녀는 대체 어째서 아카데미 입학시험에 가짜 이름을 적어 내고 사라졌단 말인가.

그렇게 해서 자신을 가짜 수석으로 만들어 놓고!

로카르드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언제나 최고의 자리에 있었다. 제국 최고의 군벌 카이델가의 장자이며 첫 번째 사자의 아들.

그의 배경은 그 자체로 빛났으나 그는 자신이 가진 것을 가짜로 만들 생각이 없었다. 그 자신이 자리에 합당한 진짜 최고가 되려 했다.

어린 나이부터 아카데미의 수준을 넘어서는 교육을 받은 것도 그런 이유였다. 수석 자리는 오래전부터 그의 것이었다.

그것을 정체 모를 인물에게 탈취당한 것을 알았을 때, 그는 사실 자존심이 적잖이 상했다.

상대가 사라져 버리는 바람에 다시 승부하여 꺾어 줄 수도 없다는 사실은 그를 실은 예민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런데 그 범인이 그의 비밀 돈 항아리였다니.

그동안 그녀가 속으로는 가짜 수석인 그를 비웃지나 않았을까 생각하면 치가 다 떨릴 정도였다.

‘뭐 이런 여자가 다 있어!’

그는 오래전부터 자주 궁 안을 돌아다니며 하인들과도 스스럼없이 지내 왔다. 그의 빠른 정보 습득에는 그런 배경이 있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온다는 시녀장을 웃으며 대하는 것도 이곳 사용인 중에서는 로카르드가 유일하다시피 했다.

그래서 시녀장은 로리샤에게 낼 시험지를 급조해야 하는 상황에서 제일 먼저 로카르드를 떠올렸다.

‘귀족인지 평민인지 헛갈리는 시녀란 궁내 기강을 흐트러트릴 뿐이랍니다.’

로카르드는 로리샤를 떨어트려 달라는 시녀장의 말뜻을 이해했다. 그리고 자신의 돈 항아리를 되찾을 기회를 거절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아멜라 시녀장님의 부탁이라면요. 아카데미 생도들도 골머리를 싸맬 만큼 아주 어려운 문제로 내드리죠.’

몇 점을 합격선으로 정할지는 시녀장이 정할 일이다. 자신은 채점만 공정하게 하면 그만이었다.

그와 이해를 같이한 시녀장은 입가에 깊은 주름을 잡으며 웃었다.

‘아카데미 수석 입학생이신 공자님의 실력을 믿어 볼게요.’

그는 그때도 살짝 거슬리는 감정을 어쩔 수 없었다.

제가 라보리 시하의 실종과 무관했음에도, 수석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마치 남의 것을 훔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는 이 시험지를 받아 들고 눈썹을 잔뜩 찌푸린 로리샤 로아르의 얼굴을 즐겁게 상상하며 문제를 냈다.

그에게도 까다로운 문항으로, 아카데미 졸업생이라도 쉽지 않을 난도였다.

하지만 그는 시녀장이 시험지를 들고 돌아왔을 때 조금 멍해지고 말았다.

막힘 없이 술술 써 내려간 시험지는, 로리샤가 그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답을 썼나 싶을 정도였다.

“이건 아주…….”

로리샤의 답안은 흠잡을 데가 없었다. 어떤 문제는 그도 답하기 까다로운 것이었는데, 로리샤는 훌륭한 답안을 적어 냈다.

2황자궁으로 돌아가는 로카르드의 머릿속은 온통 로리샤의 글씨가 점령하고 있었다.

그는 숨이 다 차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아카데미 입학을 포기한 데는 무슨 사정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거기에 그를 모욕할 의도가 없을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그는 어쩐지 로리샤 로아르에게 지독한 배신감을 느꼈다.

알고 보니 그의 비밀 항아리에는 돈보다 비밀이 더 많이 들어 있었던 듯했다.

“진작에 데려왔어야 했어!”

로카르드는 분함을 삼켰다. 제브론 해변에서 여유롭게 군 것에 대한 후회가 압도했다.

하지만 이미 상황은 돌이킬 수 없었다. 로리샤는 자신의 지성을 증명할 시험지를 시녀장의 손에 들려 준 후였다.

“쉽게나 낼걸.”

로카르드는 쓰게 웃으며 제3황궁을 떠났다.

* * *

나는 심기일전하는 기분으로 새 옷으로 단장했다. 그리고 시녀장의 방을 찾아갔다. 오늘은 시험 결과가 나왔을 테니 가타부타 말이 있을 터였다.

“안녕하세요, 시녀장님.”

책상에 앉아 있던 시녀장은 나를 보더니 턱을 약간 끄덕거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책상을 바라보았다.

‘저러다 목 부러질라.’

나는 그녀의 몸짓을 따라 해 보았다.

턱을 쳐든 채 눈을 내리깔고 턱을 아주 약간만 까딱.

반쯤 장난이긴 했지만, 언제 한 번은 저렇게 과잉된 오만과 자만심의 몸짓을 써먹을 기회가 있었으면 싶었다.

시녀장이 무엇을 저리 뚫어지게 보나 했더니 내 시험지였다.

“어제 시험의 결과가 나왔나요?”

하지만 그녀는 대답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당신의 예법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필기는 합격했다는 뜻이군요?”

나는 그녀를 향해 가식적으로 웃었다. 하지만 그녀는 마치 나무를 깎아 만든 사람처럼 눈도 깜빡이지 않고 내 앞으로 왔다.

어떻게든 나를 흠 잡아서 쫓아내겠다는 투지에 살짝 존경심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예법 부분도 문제가 없었다. 백작 부인은 내가 황궁에서 쫓겨나지 않도록 예법 훈련을 집중적으로 해 주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공부를 하지, 시선 처리가 어떻고 고개를 숙이는 각도가 어떻고, 여기는 어떻고, 저기는 어떻고…….

웃는 것까지 방법이 정해져 있다고? 아아악!

욕이 다발로 튀어나올 일이었지만 나도 이제 성년이 되고 나니 겨우겨우 참을 수는 있었다. 성년이란 게 이런 쓸모라니, 비극이 아닌가.

아무튼 나는 시녀장 앞에서 일상적인 인사부터 폐하를 알현하는 예법과 의전까지 다 테스트를 당했다.

황족 앞에서 예외적으로 다른 예법 일부는 다시 배워야 했지만, 그런 것은 원래 보통 사람이 알기 어려우니 시녀장도 크게 지적하지 못했다.

내 교육은 이른 오후에 끝났다.

“오늘은 이만하죠.”

내일도 뭐가 더 있다는 말투였지만, 나도 지쳐 토 달지 않고 얼른 나왔다.

숨을 좀 돌리러 후원에 나가니 황녀 전하의 호위 기사가 가장 구석진 벤치에 앉아 있는 게 보였다.

그의 우락부락한 몸과 울적한 분위기는 그를 거대한 회색 바위처럼 보이게 했다. 잘못하면 사람 다치게 하는 날카로운 바위.

“땡땡이치는 중이세요?”

“…….”

그는 내 품위 없는 말투에 놀랐고, 나도 내 말에 놀랐다.

이놈의 주둥아리! 여긴 황궁인데.

내가 눈만 깜빡깜빡하고 있자 그가 한숨을 쉬었다.

“새 시녀님이 왈가닥이시군.”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벤치 끝에 앉았다.

“좋게 표현해 주셔서 감사해요. 저는 로리샤에요.”

“로아르가의 사생아. 들었소.”

“어머! 직설적이시네요.”

나는 귀한 가문 아가씨들이 그러듯 눈을 크게 뜨고 몹시 당혹한 척을 했지만 좀 맥이 빠졌다.

욕은 뒤에서 해야 거슬리는 거다. 이렇게 면전에서 심드렁하게 말해 주는 사람은 별로 악의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게다가 그는 연극은 집어치우라는 표정으로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나는 론드요. 론드 아모에.”

“반가워요, 론드 경. 남부의 서펜트를 만나게 되어 영광이에요.”

내가 아모에 자작가의 문장에 대해 아는 척을 하자 그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나한테 친한 척해 봐야 소용없소. 로아르 양.”

“론드 경은 황녀 전하의 안전을 책임지는 분이시잖아요. 시녀인 제가 당연히 친해져야죠.”

“그럼 그렇게 생각하시든지.”

그의 짧은 갈색 머리는 멋을 내려고 하는 의도는 조금도 없이 쥐어뜯은 듯이 잘려 있었고, 엄청나게 굵은 그의 목과 팔뚝은 곰이 사람인 척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깊은 회색 눈은 어쩐지 슬퍼 보여서, 그를 마치 저주에 걸려 곰으로 변신한 슬픈 동화 속 기사처럼 보이게 했다.

아니면 성질 더러운 황녀의 호위 기사로 변신하게 된 재수 없는 곰이든지.

아무튼 나는 그의 까칠함이 싫지 않았다.

나는 명랑하게 물었다.

“황녀 전하께서는 저만 싫어하시는 줄 알았는데 경도 싫어하시는 거예요? 대낮에 이런 데 계시고…….”

“전하는 티 파티 중이시오. 황녀 전하는 바깥출입을 거의 하지 않으시는 데다 내가 곁에 있으면 분위기가 흉흉해진다고 티 파티는 근처에도 못 오게 하시오. 모든 기사가 내 자리가 부러워 죽으려고 하지.”

그의 말은 명백히 반어법이었다. 그는 자신의 자리를 한직이라 여기고 싫어하는 게 분명했다.

어쩐지 황궁에는 자기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게 아닌가 싶었다.

나는 멋쩍게 대답했다.

“아아.”

“황녀 전하는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을 거요. 빨리 돌아가는 게 피차 편할 거요.”

그는 마치 ‘나는 가고 싶어도 못 가니까’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가 야망이 큰 기사여서 더 힘 있는 황족의 호위를 맡지 못한 열패감을 표현하는 걸 수도 있었지만, 론드 경은 아무리 보아도 야망에 찬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나는 뚱하게 대답했다.

“그게 쉬우면 경도 벌써 다른 데로 가시지 않았을까요?”

“…….”

나는 한숨을 푹 쉬며 말을 이었다.

“그게 안 쉬우니까 저도 시녀장님에게 구박받아가면서 교육을 듣는 거고요.”

“아. 그 할망구.”

그의 입가에 번지는 비웃음을 보고 나는 대번에 내가 친구를 찾은 걸 알았다.

“론드 경도 시녀장님을 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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