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시녀 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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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시녀 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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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시녀 입문
2023.04.05.
나를 데려온 하녀는 내가 황궁의 치부를 들여다보는 것이 불편한 듯 나를 흘끔거렸다.
눈이 마주쳤을 때 내가 되레 씨익 웃어 주자 그녀는 흠칫하며 시선을 피했다.
반면 문 앞에 선 호위 기사는 ‘나는 귀가 먹었다’ 하는 얼굴로 먼 산을 보고 서 있었다. 하지만 그의 몸은 절대 무심해 보일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근육이 어찌나 울룩불룩한지, 서 있기만 할 뿐인데도 그가 내 앞으로 다가오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나는 황녀 전하의 고함을 듣다가, 문득 앞으로 미샤를 돌보게 되었다고 생각하자 싶었다. 그러자 갑자기 마음이 편안해졌다.
물론 신분은 비교가 안 되었지만.
“진정? 진정? 나더러 사생아를 데리고 다니라는데 진정이 돼? 모욕도 정도가 있지! 큰 오라버니께 가서 물어볼 거야. 아무리 내가 밉다고 이렇게까지 하실 일인지 가서 따질 거라고!”
안에 든 남자는 황녀 전하를 다독이느라 진을 빼고 있었다. 사생아란 말에 하녀는 다시 나를 흘끔거렸다.
아마 어느 사생아도 이곳에 발 디딘 적이 없었으리라. 나는 그 생각에 한숨을 뱉었다.
나는 하녀의 눈치에 신경 쓰지 않고 대화 내용에 집중했다. 보아하니 백작님에게 딸을 보내라고 한 사람은 ‘큰 오라버니’ 1황자 전하였다.
황제 폐하도 아니고 1황자 전하라니, 그분은 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 그리고 백작님은 정말 무사할까.
그러는 사이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더 나고, 마침내 궁내부 관리가 문을 열고 나왔다.
그의 얼굴은 완전히 썩어 있었고, 늙고 지쳐 보였다.
“따라오십시오.”
‘나 벌써 쫓겨난 거야?’
나는 그의 뒤를 따라가며 물었다.
“황녀 전하는 뵙지 않나요?”
“따라오십시오.”
그는 피로와 신경질이 빡빡하게 섞인 목소리로 대꾸하고, 빠르게 앞서 나갔다.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자는 자신의 직업을 혐오한다.
그는 나를 어느 사무실에 데려다 놓고 사라졌고 곧 노부인이 나타났다.
다 새어 회색이 된 머리를 틀어 올린 깡마른 여자는 척 보기에도 깐깐 그 자체였다.
“저는 황궁 시녀장 아멜라 콜리슨입니다. 로아르 양?”
그녀가 내 이름을 부르는 의문형은 네가 감히 로아르로 불려도 괜찮은 거냐고 묻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순순히 대답했다.
“로리샤 로아르입니다.”
“로아르가에 입적은 정식으로 되셨습니까?”
음. 이렇게 나오는구나.
“저는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제 신상에 대한 기본적인 조사가 되어 있지 않은 건가요?”
“…….”
시녀장은 나를 못마땅하게 보다가 대답했다.
“윗전에서 오간 이야기를 우리가 다 알 수 없습니다. 알 필요도 없고요. 지시가 내려오면 그때부터 우리의 일은 시작됩니다. 당신도 거기 익숙해져야 하고요. 황궁에 계속 머무르게 된다면 말입니다.”
첫 만남부터 걸어오는 기 싸움이 장난이 아니었다.
하기는 고관대작의 자녀인 시녀들을 데리고 궁내의 기강을 세우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일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지금 아쉬운 사람은 내가 아니다. 내가 먼저 포기한 게 아니라 황녀 전하나 궁내부 쪽에서 쫓아낸다면, 1황자 전하에게 내 출궁에 대해 해명해야 하는 쪽은 내가 아니라 그들이다.
나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건조하게 대답했다.
“하세요. 일.”
시녀장은 내게 조금도 호의를 보이지 않았고, 나도 그녀에게 호의를 보이지 않았다.
새 장소에 가면 친구를 사귀는 일이 중요하지만 절대 친구가 될 수 없는 상대를 알아보는 것도 중요하다.
이 할머니와는 친구가 될 수 없었다.
“황녀 전하께서는 황족의 위엄을 손상하지 않을 유능한 시녀를 원하십니다. 그러니 당신의 출신과 능력을 심각하게 우려하지 않을 수 없군요.”
그래서 내게 뭘 원하시는지.
내가 눈썹을 찌푸리고 바라보자 그녀가 말했다.
“자신의 능력을 증명할 만한 이력이 있나요?”
“제가 로아르가 맞는지부터 의심하시는 상황이니, 아마 없을 거예요.”
나는 그렇게 대답하고 빙긋 웃었다. 하지만 시녀장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말했다.
“우선 당신의 능력을 검증해야겠군요. 우리는 보통 이런 일을 하지 않는데, 번거롭게 되었어요.”
능력 검증이라니. 이건 아마도 아까 궁내부 관리와 황녀 전하의 협상의 결과인 것 같았다.
황녀 전하가 나를 못 받겠다고 하도 난리를 치니, 그러면 능력을 검증해 보자고 한발 물러난 것이다.
이들은 아마 내가 무식하고 무능해서 도저히 안 되겠더라는 변명을 기대하는 모양인데, 어떤 식으로 ‘검증’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슬슬 배알이 꼬였다.
사생아, 사생아, 사생아. 사생아.
내 평생 들어 본 사생아 소리를 오늘 오후에 몰아서 다 듣는 것 같았다.
예상 밖으로 강경한 분위기를 보니 내가 황궁에서 오래 버틸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나는 스스로 물러날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나는 오히려 속이 편해져서 일부러 더 뻔뻔하게 말했다.
“저는 폐하의 세 번째 사자 로아르 백작님의 딸이에요. 그걸로 부족한가요?”
“그 사실은 이미 알고 있어요. 하지만…….”
“아아. 백작님께서 밖에서 이렇게 신망을 얻지 못하셨을 줄이야…….”
나는 일부러 큰 한숨을 쉬며 들으라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시녀장은 몸을 획 돌려 나가 버렸다.
나는 시녀장을 기다리다 창가로 가 보았다. 제3황궁의 잘 꾸며진 정원, 부지런히 오가는 황궁 사용인들, 관리들…….
내가 황궁에 와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깡촌 계집애가 참 멀리도 왔네.’
그러고 보니 같은 울타리 안에 2황자 그레이언 전하와 카이델 공자도 있었다. 카이델 공자가 나와 여기서 마주치면 어떤 얼굴을 할까 생각하니 짜증이 났다.
“머리 아파.”
아닌가? 그는 배를 붙잡고 폭소를 터트리려나? 여기가 어디라고 네가 여기 있느냐고, 제정신이냐면서 말이다.
그는 누구보다 귀족적이면서도 또 철없고 소탈한 면모도 보였다. 아마 다양한 신분을 가진 병사들과 함께 구르며 생긴 태도일 터였다.
나보다 고작 몇 살 많은 나이에 전장의 지휘관으로서 카이델가 후계자의 의무를 다한 그는 존경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살벌한 눈을 하고 내가 한 짓을 추궁할 때면 한 대 쳐 주고 싶기도 했다.
아. 나는 양심도 없지.
‘피해 다니자.’
결론은 뜻밖에 간단하게 났다. 카이델 공자님께서도 이 사생아와 안면이 있는 것이 알려지기를 원치 않을 터였다.
황족의 시종으로서 어쩔 수 없이 부딪히는 일이 생기기는 하겠지만, 그럴 땐 철판을 깔면 되니까.
나는 내 얼굴이 얼마나 두꺼운지 확인하기 위해 뺨을 손끝으로 꾹꾹 찔러 보았다.
그때 시녀장이 돌아왔다. 그녀는 아까보다 더 얼굴을 굳히고 있어서, 이제는 석고상처럼 보일 정도였다.
사람이 어쩌면 생기가 없어도 저렇게 없는지.
내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을 때 그녀가 말했다.
“시험을 치를 시간이에요. 로아르 양.”
나는 그녀에게 시험지를 받아 소파에 앉았다.
첫 두 문제를 보니 별것 아니었다. 제국과 황궁 조직에 대한 기본 정보는 누구라도 물어볼 만한 기초 지식이었다.
그런데 세 번째 문제부터는 난도가 급격히 올라갔다. 흡사 아카데미 입학시험을 떠올리게 했다.
시종 후보는 명문가 출신에 아카데미 우수 졸업생 정도나 되어야 가능하다더니 그래서 그런 모양이었다.
나는 시녀장의 매 같은 시선 아래에서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답안을 채워 갔다.
뒤로 갈수록 죽어도 너를 떨어트리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문제가 나왔지만, 나도 나대로 죽어도 일단 붙고 말겠다는 의지로 답안을 적어 갔다.
‘미안하지만 나는 일단 최선을 다해야 해, 시험아.’
이를 악물자 펜 놀리는 속도가 더 빨라졌다.
내가 다 푼 시험지를 건네자 시녀장은 나를 못마땅하게 흘끔 보더니 그대로 사라졌다.
그리고 황궁 하녀가 들어왔다.
“로아르 양, 침소로 모셔 드리겠습니다.”
채점하는 데 시간이 걸리니 오늘 일정은 이것으로 끝난 모양이었다.
황녀 전하의 침소 아래층 복도 끝에 있는 내 방은 백작저의 내 방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특별나게 좋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나쁜 것도 없는 보통 방.
황족의 시녀라고 해서 엄청난 대우를 해 주는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그래도 나쁠 게 없다는 사실에 집중하기로 했다.
“고마워.”
내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인사하자 하녀는 어색한 웃음으로 답하고 사라졌다.
나는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대충 푹신하네…….”
나는 한숨을 돌린 다음 옷을 갈아입으려 백작 부인이 준비해 준 옷 가방을 열었다가 깜짝 놀랐다.
백작 부인께서 이 사생아가 나가서 기죽지 말라고 어찌나 새 옷만 넣어 주셨는지. 개중에는 미샤가 맞추기만 하고 안 입은 옷들도 있었지만 상당수는 새것이었다.
나가서 로아르가의 체면을 지키라고. 혹은 미샤를 위해서 제대로 죽어 달라고 말이다.
* * *
“부디 형편없기를 바랍니다. 공자님.”
로카르드는 로리샤의 시험지에서 고개를 들어 되물었다.
“부정 채점을 하라고요?”
의도를 들킨 시녀장은 그의 미소가 퍽 못마땅한 듯 시선을 마주쳤다. 그리고 창밖을 향해 돌아섰다.
로카르드는 시험지를 읽으며 건성인 듯 말을 이었다.
“세 번째 사자님의 명예에 대한 고려는 빼고서라도, 저는 곧이곧대로 채점할 겁니다. 2황자 전하의 시종인 제가 황녀 전하의 시녀를 고의로 떨어트린다면 뒷감당은 누가 해요? 시녀장께서 해 주실 리는 없고.”
“저는 황녀 전하의 뜻을 전했을 뿐입니다.”
“밀리오라 전하께서 화가 많이 나셨어요?”
“자칫하면 앞으로 황궁이 바람 잘 날이 없겠어요. 사생아 하나 때문에!”
“…….”
뭐라고 대꾸하려던 로카르드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시녀장을 어르듯 빙글거리던 미소도 식어 사라졌다.
그는 시험지를 쏘아보다가, 곧 시험지를 뒷장으로 넘겼다. 눈빛도 온도를 잃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