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나한테 고맙다고 해 봐, 미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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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화. 나한테 고맙다고 해 봐, 미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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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화. 나한테 고맙다고 해 봐, 미샤
2023.04.04.
그러잖아도 머릿속이 복잡해 죽겠는데 왜 너까지 지랄이야.
한동안 뜸하더니 또 패악질이다. 하지만 지금 나에게는 미샤에게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저렇게 손이 보드라운 계집애에게는 맞아 봐야 별로 아프지도 않았다.
나는 싸늘하게 말했다.
“나가. 나 자야 하니까.”
“수치심도 모르는, 더러운 사생아 년!”
“…….”
미샤의 욕을 들으니 잠이 확 달아났다.
“나 지금 기분 안 좋아, 미샤. 나가!”
“그 시녀 자리는 내 것이었어! 그런데 그걸 빼앗아?”
그거였구나. 나는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게 왜 내게 떠넘겨진 줄도 모르면서, 이 모지리를 정말…….
“사생아 주제에……. 너는 악마야, 로리샤. 황궁에 들어가면 나는 아카데미를 더는 안 다녀도 되는데! 너 때문에 다 망쳤어.”
나는 조금 멍한 상태로도 미샤 로아르의 머릿속을 신기해했다.
아카데미가 싫다니. 제가 가진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도 모르고.
조금 더 정신이 드니 화가 치솟았다.
이 멍청한 게, 지금 아카데미에 다니기 싫어서 시녀 자리가 제 것이라고 떼를 쓴다고? 그게 제정신으로 할 소리야?
미샤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너는 절대 우리 가문의 성을 사용해서는 안 돼. 아버지가 한 일생일대의 실수는 네 어미에게 씨를 뿌린 거야. 악!”
나는 이를 물고 팔을 휘둘러 따귀를 돌려주었다. 그리고 하, 하고 코웃음 쳐 주었다.
나는 놀라 얼어 버린 미샤에게 꽉꽉 씹듯이 말했다.
“미샤 로아르, 이 사생아에게 시녀 자리가 떨어진 이유가 뭔지 생각해 봤어? 적녀께서 똑바로 하셨으면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겠냐고. 죽고 싶으면 우리 엄마 얘기 더 지껄여 봐!”
미샤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악을 쓰기 시작했다.
“이, 나쁜……. 나쁜 것! 더러운 것! 나가, 우리 집에서 나가!”
“붙잡아도 나갈 거야. 황궁으로. 백작 부인이, 네 어머니께서 나한테 황궁에 들어가 달라고 애원하셨거든!”
“아아악! 로리샤! 나는 네가 미워! 네가 미워서 죽을 것 같다고!”
미샤는 이성을 잃고 내게 덤벼들었다. 내 부스스한 꼴이 무방비해 보인 건지, 그만큼 돌아 버린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참아 줄 생각이 없었다. 감히 엄마 이야기를 입에 담았을 땐 선을 넘은 거다.
나는 미샤의 팔을 그대로 쳐 내고 머리를 붙잡아 이불 위로 눌렀다. 미샤는 몸을 일으킬 수 없자 악을 쓰며 버둥거렸다.
미샤가 무력할수록 나는 더 화가 났다. 어째서 이런 바보 같은 계집애는 노력 없이도 모든 걸 다 가지고, 나는 늘 기를 쓰고 달려가도 눈앞에서 놓치고 마는지.
나는 잔인하게 말했다.
“나한테 고맙다고 해 봐, 미샤 로아르. 내가 지금 너를 구해 주는 거거든. 네가 입궁해서 세 번째 사자의 명예에 먹칠하는 데 얼마나 걸릴 것 같아? 한나절? 아니, 한 시간이면 족하지. 자, 나한테 감사해! 감사하라고!”
하지만 미샤는 끝까지 웅얼거렸다.
“시녀 자리는 내 거야. 나는 아카데미가 아니라 황궁에 갔어야 해!”
“로리샤!”
그때 문을 벌컥 열고 백작 부인이 달려왔다. 그녀는 버둥거리는 미샤를 보고 얼굴이 새파랗게 굳었다.
‘좋겠다. 엄마 오셨네.’
내가 속으로 조소하며 미샤를 놓자, 미샤는 헐떡거리며 백작 부인의 팔에 안겼다.
백작 부인은 미샤가 멀쩡한지 얼굴을 더듬으며 살폈고, 미샤는 서럽게 울먹거렸다.
“엄므아, 엄마! 방금 봤어요? 저게, 저게 나를……!”
“미샤! 세상에, 얼른 가자.”
“……엄마?”
미샤는 울음을 뚝 그쳤다. 붉은 머리카락이 산발이 되어 눈을 동그랗게 뜬 꼴이 볼만했다.
백작 부인의 반응은 나도 의외였다. 미샤의 머리를 짓누른 걸 들켰을 땐 오랜만에 매질까지 각오했다.
그런데 그녀가 내 눈치를 보며 미샤를 달래는 것이 아닌가.
미샤는 입술을 달달 떨며 말했다.
“엄마? 방금 저게 나한테 어떻게 했는지 봤잖아요! 그런데 그냥 둬요?”
“알았어. 엄마와 얘기하자, 미샤. 어서. 로리샤, 자는 걸 깨웠니? 어서 더 자렴.”
“엄마……? 제정신이세요? 엄마!”
백작 부인은 매달리는 미샤를 질질 끌고 나갔다.
백작 부인이 내 편을 들다니, 나는 방금 본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충격 속에서 조용히 읊조렸다.
“나 황궁 가면 진짜 죽는 거 아냐?”
다음 날 나는 테리아를 통해 상황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미샤는 자신을 무시하는 것들은 언젠가 값을 치르게 될 거라며 몇 시간이나 악을 쓰며 울었다고 한다.
나중에 그 애의 눈에 핏발이 서 있어서 하녀들이 깜짝 놀랐다나. 전에는 없던 일이었다.
* * *
응접실로 돌아온 그레이언이 피식 웃자 로카르드는 의아하여 고개를 돌렸다. 그는 2황자의 발코니가 제집인 양 늘어져 책을 읽고 있었다.
“재미있는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재미있다면 재미있는 일이지. 세 번째 사자의 사생아 말이야.”
로카르드의 눈썹이 금방 일그러졌다.
“밀리오라의 시녀로 입궁했대. 오를 형님께서 백작에게 딸을 보내라 했더니 사생아를 데려다 놓은 거야. 밀리오라는 방을 뒤엎어 놓았고.”
“…….”
“형님께서 백작을 불러들였더니, 그가 말하길 ‘명하신 대로 제 딸을 들였습니다’ 했다더군. 하하하!”
로카르드는 대꾸가 없었으나 그레이언은 즐겁게 말했다.
“경연이 공정하게 진행되길 원한다고 하시어 독학으로 제국 아카데미 수료 수준의 공부를 마친 아이로 데려왔다고.”
그레이언은 백작의 단조로운 말투를 흉내 내어 말했다.
“‘다른 딸은 아직 아카데미 1년 차 과정에 있어 황녀 전하의 경연을 돕기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로카르드는 책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웃음기가 없는 얼굴이었다.
‘로아르 백작이 1황자와 거리를 두는 것인가?’
이 소식을 들은 사람은 누구나 그렇게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그레이언은 못된 장난을 계획하는 아이처럼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게 백작이 나를 선택한다는 뜻은 아니야. 중립을 취하려는 것일 뿐. 하지만 겉으로 보기엔 그렇게 보이지 않겠지. 대개는 세 번째 사자가 오를 형님을 거절했다고 생각할 거야.”
로카르드의 침묵은 동의를 표시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레이언은 그의 정신이 다른 데 가 있는 것을 알았다.
그레이언은 로카르드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감히 황족의 지척에 사생아를 들이다니, 백작이 그리 과감할 줄이야. 자신의 치부를 만천하에 드러내면서까지 말이야. 그를 다시 봤어.”
“잠시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로카르드는 굳은 얼굴로 그레이언의 침소를 떠났다.
그는 자신이 무슨 기분인지 알지 못한 채 황궁 복도를 걸었다. 일부러 인적이 드문 황궁 정원을 통과해 걸으면서야 자신이 매우 화가 났음을 자각했다.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로카르드에게 로리샤 로아르는 정원 구석에 몰래 파묻어 놓은 돈 항아리였다. 급할 때 꺼내 쓸 소중한 비상금 말이다.
언젠가 그녀에게 했던 ‘닥치면 하더라’는 평가는 그로서는 최고의 찬사였다.
실은 그는 어서 경연이 시작되어 그녀를 끌어들일 건수가 생기기를 은근히 기다리고 있었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녀가 버젓이 황족의 시녀가 되어 버렸다. 앞으로는 그녀의 도움을 구할 수도 없을뿐더러, 2황자와 관련된 지난 사건의 비밀마저 위태로울지도 몰랐다.
1황자가 그의 마당을 몰래 파헤쳐 소중한 항아리를 훔쳐 간 것이다. 그래 놓고서는 그걸 그냥 길거리에 부어 버렸다.
“황녀궁이라니!”
밀리오라 황녀는 그녀의 가치를 알아보지도 못할 것이며, 알아보더라도 사용할 생각이 없을 터였다. 로리샤의 가치는 그녀가 황녀궁에 배치된 순간 고사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1황자가 그의 소중한 비상금을 직접 사용하지 않은 것이었지만, 로카르드는 쓰린 속을 진정하기 어려웠다.
가슴에 차오르는 원망이 크니 로리샤까지 미웠다.
그녀라면 황녀의 시녀가 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를 리 없는데 그걸 덥석 물다니.
‘그 성질머리는 두었다가 어디다 쓰고!’
하지만 그녀가 과연 자의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질문해 보면, 그럴 것이라고 답하기 어려웠다.
약재상에서 일하는 그녀의 모습이 즐거워 보였다는 기억은 오히려 그녀를 안쓰럽게 여기게 했다.
“하아…….”
로카르드는 울컥한 감정을 추스르려 마른세수를 했다.
멀리 제3황궁 건물을 바라보다 휘니드의 연구실에서 항아리를 깨부수며 즐거워하던 그녀의 얼굴이 떠오른 것은 어쩔 수 없었다.
6. 시녀 입문
“미쳤어? 미쳤냐고! 대체 어떤 인간이 이런 생각을 했는지 내 앞에 데려와 봐!”
“전하…….”
“뭐라고? ……대체! 뭘! 내가 왜 목소리를 낮춰야 하는데?”
문 너머에서는 밀리오라 황녀 전하의 패악질이 한창이었다. 그녀와 대화하는 남자의 당혹한 목소리는 잘 들리지도 않았다.
아차, 나도 이제 황궁 생활을 하려면 말투를 조심해야 한다.
‘밀리오라 황녀 전하는 심기가 불편하셨다. 몹시.’
곧 뭔가가 부딪치고 깨지는 소리도 났다. 황녀 전하가 물건을 집어 던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내게 퍽 익숙한 상황이었다. 불과 며칠 전에도 미샤가 이런 꼴을 벌인 걸 봤기 때문이다.
미샤는 아카데미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게 틀림없었다. 최근에 부쩍 날카롭고 사나워진 것도 그렇고, 시녀 자리가 제 거라고 날뛴 걸로 봐도 그랬다.
그 애는 이 자리를 아카데미에서 명예롭게 도망칠 출구로 여긴 게 분명한데, 지금 이런 꼴을 직접 봤다면 그 생각을 즉시 접었을 것이다.
아무튼 내 입장에서 황녀 전하의 고함은 귀여울 정도였다. 그동안 내가 황족에 대해 가진 환상이 와장창 깨져 버린 것은 좀 아쉬웠지만.
타가르 황가 적녀의 버르장머리가 이렇게 엉망진창일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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