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백작님이 이런 사람이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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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백작님이 이런 사람이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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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백작님이 이런 사람이었다니
2023.04.03.
“백작님이 황가의 시녀 자리를 구해 오셨다. 로리샤.”
“…….”
“기쁘지 않니?”
“그게 뭔데요?”
시녀가 무엇인지는 물론 안다. 나는 3대까지 황가의 가계도와 귀족 명부도 전부 외우고 있다.
하지만 그녀가 내게 제안하는 시녀 자리가 무엇인지 내가 어떻게 아는가.
내 물음에 백작 부인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그녀는 짐짓 표정을 다듬으며 말했다.
“그건 황궁에서 살며 황족의 조력자가 되는 거란다. 명예직이지만 강력한 영향력을 가져. 아카데미 우수 졸업생 정도는 되어야 후보에 오를 수 있는 자리지.”
“어느 황족이요?”
나는 최대한 미소를 짓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 말투는 싸늘하게 들렸다. 백작 부인의 표정은 즉시 사나워졌다.
“그건 입궁하면 알 게다.”
백작 부인이 본색을 드러내자 나도 바로 인내심을 잃고 말았다.
나는 냉랭하게 말했다.
“미샤가 거절했나 봐요?”
“좋은 것을 주어도 가치를 모르는구나. 배은망덕하긴!”
지난 몇 년간, 나는 오직 아카데미 입학만을 목표로 살았다. 그것을 좌절당한 내 충격은 적지 않았다.
그 충격을 겨우 추스르고 새 진로를 정했는데, 또 나를 가로막겠다고? 약재상 일은 당신들과 아무 상관도 없는데?
그 시녀 자리가 정말로 좋은 거였으면 당신이 내게 줬겠어?
나는 약초를 팔 거야. 제국의 약사와 의사들, 연금술사까지 모두 내 고객으로 만들 거야! 그런데 뭐가 어째?
아무리 로아르가에 입적되었다고 해도 누가 사생아를 황족의 시녀로 삼는가. 이것은 분명 미샤의 일이었다. 백작 부인이 나서는 것은 미샤의 일뿐이었다.
나는 저도 모르게 이를 갈며 백작 부인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들거리며 백작님을 쳐다보았다.
“지금 너……! 백작님, 저 애를 좀 보세요!”
백작님은 그제야 돌아서 나를 보았다.
굳은 얼굴과 냉정한 눈빛. 백작님은 내가 처음 보는 사람 같았다.
설마…….
어느 틈에 내 목소리는 부들부들 떨렸다.
“백작님도 동의하세요?”
“그래. 로리샤.”
백작님은 무겁고 단호했다.
“…….”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려 내 방으로 달렸다.
* * *
침대 위에 털썩 앉았지만 이제는 눈물도 나지 않았다. 손의 경련이 멈추지 않았을 뿐이다. 한 손으로 다른 손을 잡아도 두 손이 다 떨려 소용이 없었다.
‘내가 왜 떨지…….’
이것은 아마도 배신감이었다. 백작님이 결국 나를 버렸다는 기분.
세상에 믿고 의지할 사람 같은 건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어쩌면 백작님은 예외일지도 모른다고 막연한 기대를 했던 게 사실이었다.
그는 나를 배신한 적이 없었으니까.
지금까지는.
시종의 정치적 입지는 황족의 힘에 따라 결정되고, 때로 황족과 함께 운명을 다해야 했다. 그래서 귀족들은 자신과 가문의 명운을 걸고 주인을 택한다.
2황자 전하께서 귀환하셨으니 이제 두 황자 전하 간의 후계 다툼이 시작될 터였다. 그런데 백작님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황족에게 미샤를 달라는 요구를 받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백작 부인은 대신 나를 번제 양으로 바칠 속셈이고.
눈엣가시 같은 사생아를 바쳐 적녀의 희생도 막고 집안의 오물도 청소하고. 일석이조가 아닌가.
백작님은 필요할 때는 로아르가의 딸을 보냈다고 말하다가, 불리하면 사생아의 연을 끊어 낼 것이다.
그는 이 거래에 마지못해 동의하는 모습이지만, 나로서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지금까지 백작님은 내놓고 내 편을 들어 준 적은 없었지만 백작 부인의 편을 들어 준 적도 없었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내심 그가 내 편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 믿음은 오늘로 끝났다. 이제 그는 내게 백작 부인의 남편이며, 흔하디흔한 귀족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엄마는 알았어? 백작님이 이런 사람인 거.’
나는 꾸역꾸역 눈물을 삼키다가, 내가 성년이 지났음을 깨달았다.
나는 가방을 챙겼다. 내가 애도 아니고 가란다고 가고 오란다고 올 필요는 없었다. 당분간 약재상에서 지내다가…….
아무튼 생각은 천천히 하면 된다.
가방에 넣을 짐을 챙기며 돌아다니다가, 문득 내 책상으로 눈을 돌렸다.
거기에는 내 제국법 공책이 놓여 있었다. 시험 전에 미처 외우지 못한 유일한 공책이었다.
저게 왜 저기…….
나는 내가 그동안 저 공책을 책상에 둔 채로 깨닫지 못하고 지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이젠 상관없었다. 이제 이곳은 내 방이 아니었다.
가방에 옷가지를 처넣고 나니 어느새 방에 백작님이 들어와 있었다.
“로리샤.”
나는 턱에 힘을 꽉 주고 씩씩거렸다. 이대로 입을 열었다간 무슨 소리를 할지 몰랐다.
지금 이 꼬락서니가 나긴 했지만, 그래도 백작님은 그동안 나를 입혀 주고 먹여 주고, 가르쳤으니 그를 욕할 것도 없었다. 이별은 덜 꼴사나웠으면 싶었다.
황족의 시녀? 웃기지 말라고 해!
내가 짐을 싸기 위해 몸을 획 돌리자 그가 언성을 높였다.
“로리샤!”
그가 내게 고함친 것은 생전 처음이었다. 나는 우뚝 멈추었다. 손이 다시 떨렸다.
“입궁하여 밀리오라 전하를 모셔라, 로리샤.”
“뭐……. 왜…….”
나는 너무 숨이 차올라 말을 잘 이을 수 없었다.
백작님은 다가와 내 양팔을 붙잡았다.
나를 뚫어지게 들여다보는 그의 눈동자가 내 것과 몹시 닮아 있는 게 보였다. 그 사실에 가슴이 찢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부인의 말이 옳다, 로리샤. 이것은 기회다.”
나는 결국 소리쳤다.
“괜히 그랬어! 괜히 아버지라고 불렀어!”
백작님은 충격을 받아 굳었고 나는 몸을 뿌리치며 물러났다.
“너는 독립을 원하지 않았느냐. 로리샤, 나와 부인, 미샤의 곁에서 벗어나서 멀리까지 날아가라. 인제부터 네 날개로 네가 원하는 곳으로 날란 말이다.”
“지금 무슨…….”
“황녀 전하는 황후 폐하의 배척을 받고 있다. 섬처럼 고립된 분이다.”
지금 뭐라는 거야!
앞뒤가 하나도 맞지 않는 말을 하는 백작님의 얼굴은 미칠 듯 진지했다.
“2황자 전하는 이 경연에 목숨이 걸려 있다. 하지만 황녀 전하는 힘이 없기에 조용히 잊힐 수 있어. 너는 그 소용돌이 속으로 걸어 들어가 살아남아라.”
“백작님!”
“그 후에 네가 가고 싶은 곳을 결정해. 그때 네 날개는 충분히 크고 튼튼할 테니 어디로든 날아갈 수 있어. 가정 교사는 문제도 되지 않는다.”
“…….”
백작님이 이런 사람이었다니.
그는 세상이 아는 듯 차분하고 이성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사자였다. 제 새끼를 절벽에서 떨어트리고서 눈 깜짝하지 않는.
그걸 위해 황족조차 이용하는 냉혹한.
나는 침대에 털썩 앉았다. 내 목소리에서는 힘이 쭉 빠져나가 있었다.
“경연은 피 튀기는 후계 경쟁이잖아요. 저는 로아르가에 이익이 되는 처신 같은 건 할 줄 몰라요.”
그러자 백작님은 코웃음을 치듯 말했다.
“누가 너더러 그런 걸 생각하라더냐. 그것은 내 일이다. 로리샤 로아르.”
* * *
짐을 다 싼 내 가방은 발코니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나는 마음이 정해지기만 하면 그걸 들고 난간을 넘어갈 작정이었다.
하지만 이불 속에서 뒤척이는 사이 새벽이 되었다.
나는 발코니로 나가 희멀겋게 밝아 오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찬 공기가 오싹했다.
황족 시종 출신이라면 나중에 가정 교사 자리를 구하는 것 정도는 문제도 아니었다. 이번에는 백작 부인도 내 경력을 건드리지 않을 것이다.
내 목표는 줄리아 선생님처럼 남에게 기대지 않고 씩씩하게 혼자 늙어 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기회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역사를 공부했다. 힘없는 황족의 말로는 비참했고, 시종이란 주인의 운명을 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자들이었다.
나더러 그런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으라니.
백작님이나 로아르가의 이익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이 기회를 온전히 너의 것으로 삼으라고 먼저 선을 그은 건 백작님이었으니까.
그리고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나라는 변수를 포함한 큰 그림이 그려져 있을 테니까.
백작님의 말이 맞긴 했다. 이 경연은 1황자와 2황자 간의 경쟁이었다.
내가 할 일은 머리를 숙이고 살아남는 게 다였다. 내가 지금까지 해 온 것과 다르지 않은 일이었다. 그 사실이 내 기분을 이상하게 했다.
약재상에는 나중에라도 다시 돌아갈 수도 있었지만 이것은 앞으로 다시는 붙잡지 못할 기회일지도 몰랐다.
‘잘하면 내 꿈을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나는 성큼 밝아진 하늘을 보며 미친 생각을 했다.
‘목숨 한번 걸어 봐?’
그리고 시녀가 되면 카이델 공자처럼 황가의 서고에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을 것이다.
* * *
나는 밤새워 설치다 거의 아침이 다 되었을 때야 잠이 들었다. 그런데 문득 침대에 뱀이 풀린 것처럼 소름 끼치는 느낌이 들었다.
억지로 눈을 뜨니 미샤가 침대 끝에 앉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마, 깜짝이야!
“미샤! 놀랐잖아.”
나는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다듬고 앉아 초를 켰다. 그동안 미샤는 미동도 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내가 그녀를 돌아보았을 때, 바로 미샤의 따귀가 날아왔다.
“미샤! 왜 이래?”
나는 너무 놀라서 욕도 하지 못했다. 맞은 건 난데, 미샤는 제가 더 부들거리면서 말했다.
“감히 내 걸 빼앗아?”
“……하!”
귀가 막히고 코가 막혀서, 나는 입만 벌린 채 그 애를 쳐다보았다.
지금 뭐라는 거야, 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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