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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그녀가 적녀가 아닌 이유 (29/155)


29화. 그녀가 적녀가 아닌 이유
2023.04.02.


그녀가 순순히 물러나는 것이 이렇게까지 허전할 일인지. 로카르드는 뚱한 표정을 지었다.

가게에 다녀온 로리샤는 천에 싼 묵직한 책을 그에게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 든 로카르드가 빙긋 웃자, 로리샤는 쌩한 얼굴로 외면하고 들어가 버렸다.

“조심해서 가세요!”

로카르드는 목을 긁듯 낮게 웃으며 말을 출발시켰다.

황궁에 도착한 그는 천을 풀어 보았다.

『행복한 황후의 일생-퀸나 황후의 자서전』

로카르드는 휘니드의 연구실에도 들렀다. 휘니드는 로리샤처럼 순순히 투항하지 않았다.

그는 사인에 대해 뒷말이 떠도는 선대 황제의 마지막 병증이 기록된 책을 껴안고 있다가, 울 듯한 얼굴로 내놓았다. 책을 붙잡은 두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며, 며칠만 더…….”

“쯧.”

“흑.”

로카르드는 그제야 두 권의 책을 안고 황가의 서고로 향했다.

그는 책만 제자리로 돌려 놓고 바로 집으로 돌아가 쉬리라 생각했다. 게릴라전을 치르듯 며칠에 이은 기말고사를 치고 나니 그도 지친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서가에 들어가 퀸나 황후의 자서전을 펼쳤다가 그대로 열람용 책상에 앉았다. 그는 밤이 깊어서야 출궁했다.

퀸나 황후는 선대의 황후였다. 선황제의 죽음은 후세에 다양한 의혹을 불러일으켰지만, 그의 치세에 제국은 번영했다.

그녀가 자서전 제목을 ‘행복한 황후’라고 붙인 것은 그녀의 개인적 행복을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선황제의 업적을 드러내려는 의도였다.

자서전의 내용 일부에는 선황제와 황자녀들의 감정적 골이 숨기지 못하고 드러나 있었다. 아마 이 자서전은 그 이유로 외부에 공개되지 못하고 황가의 서고에 남게 된 것 같았다.

로카르드는 뻑뻑한 눈을 비비며 말을 천천히 몰았다.

‘로리샤는 왜 하필 그 책을 골랐을까?’

로카르드는 그 의문이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그가 카이델 가문의 후계자라는 틀에 갇혀 치열하게 살아야 했듯, 로리샤는 툰바르 산촌 출신 사생아라는 자신의 출생에 갇혀 처절하게 싸워 왔다.

그가 물은 적 없고 그녀가 말한 적 없어도 그것은 자명했다.

제브론 해안에서 자신이 사생아이니 착각하지 말라던 그녀의 엄포는 자신에 대한 당당함이 아니라 자신을 상처 입히지 말라는 협박에 가까웠다.

그런 사람이 자신은 가져 본 적 없는 행복이라는 것의 실체를 알고 싶어 지존의 여인의 삶을 엿보기를 선택한 것이다. 지켜보기 안쓰러운 장면이었다.

그가 안쓰럽게 여긴다는 걸 알면 그녀는 쌍욕을 했겠지만.

‘그녀가 로아르가의 적녀였다면…….’

로카르드는 혀를 찼다. 장차 카이델가를 이끌 자가 가능하지 않은 가정이나 상상에 시간을 보내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로리샤가 계속 약재 배달을 하기를 바랐다. 그 가게는 그가 종종 필요할 때 그녀를 납치하기 적당한 거리에 있었다.

앞으로 벌어질 싸움에는 정신과 감정의 유혈이 낭자할 터였다. 거기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유능한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다.

또한 바라보기에도 즐거우니 더 완벽했다.

* * *

백작 부인은 황궁에서 돌아온 남편의 말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미샤를요? 황녀 전하의 시녀로요?”

“목소리를 낮추세요. 아직은 노출할 일이 아닙니다.”

“황녀 전하는 황궁에서 입지랄 것도 없는 분이에요. 1황자 전하 곁도 아니고, 우리 미샤를 어떻게 그런 자리로 보낸단 말이에요! 더구나 이제 겨우 아카데미에 자리를 잡았는데, 절대 안 돼요. 백작님.”

“1황자 전하께서 특별히 요청하셨소. 그분의 요청이 황후 폐하의 뜻이고 또한 폐하의 뜻임을 부인도 모르지 않을 거요.”

“그런……!”

백작 부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미샤가 기적적으로 아카데미 출교를 면했다고 좋아했더니 이건 무슨 날벼락인지!

그녀는 울먹이듯 말했다.

“왜, 대체 왜 오를 전하는 우리 가문을 핍박하시는 거죠?”

“그분은 밀리오라 전하의 시녀를 원하시는 게 아니오. 내가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는지 확인하시려는 것이지.”

“…….”

백작 부인은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에 입술을 파르르 떨며 깨물었다.

지금부터 열릴 경연은 황자녀 간의 경쟁이 아니다. 모든 귀족들의 치열한 눈치 보기가 일어나는, 제국 전체가 조용히 흔들리는 사건이다.

다음 세대의 권력 구도는 바로 이 경연으로부터 정해진다.

백작 부인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미샤는 아니에요. 한번 황족의 시녀가 되고 나면 백작님에게도 파벌성이 덧씌워질 거예요.”

“미샤의 파벌에 신경 쓸 사람은 없을 테니 그 부분은 고려할 필요가 없소.”

백작 부인은 남편을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원망하며 바라보았다.

아카데미까지 보내 놓았건만 백작은 여전히 미샤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녀의 딸이 정계와 사교계를 주름잡으며 로아르가의 명망을 이어 가리라고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 자신도 미샤를 곱게 키워 유력가에 시집보내는 것을 일생의 목표로 삼았으니, 남편에게 원망의 말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지금 중요한 일은 미샤가 황녀의 시녀가 되는 일을 막는 것이었다.

“오를 전하가 정확히 뭐라고 하신 거죠?”

“내 딸을 밀리오라의 시녀로 보내 달라고 하셨소.”

“…….”

백작 부인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그녀는 남편의 얼굴을 살피다가 결연하게 입을 열었다.

“백작님은 딸이 둘이잖아요.”

“……!”

백작 부인은 남편의 코앞까지 다가가 서서는 격앙된 목소리를 잔뜩 억눌러 말했다.

“우리 솔직히 말해요, 백작님. 미샤를 황궁에 보내면 가장 비웃음당하는 사람은 백작님이 될 거예요. 미샤는 그런 일에 어울리는 아이가 아니라는 게 드러나고 말 테니까.”

“부인.”

“하지만 로리샤는요? 그 애는 황녀 전하를 버텨 낼 만큼 뻔뻔하고, 필요한 일 한두 개는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는 교육받았죠. 게다가 그 애에겐 지켜야 할 미래 같은 게 없어요. 이건 마치 신께서 우리를 도우신 것 같잖아요!”

“…….”

백작 부인은 미샤의 부족함을 외면하고 로리샤의 존재를 부정한다는 자신의 금기 두 가지를 동시에 깼다. 그녀는 그토록 갈급했다.

하지만 로아르 백작은 깊이 침묵했다. 백작 부인은 자신을 등지고 돌아선 남편의 표정을 볼 수 없어 답답했다.

그가 지금 분노하고 있는지, 계산하고 있는지. 아니면 둘 다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사생아를 시녀로 입궁시켰다는 비난은 없을 것 같소?”

“오를 전하가 그걸 신경이나 쓰실 것 같나요? 어차피 이 경연은 오를 전하와 그레이언 전하의 싸움이라고요. 당신의 말대로 오를 전하의 부탁을 들어주는 제스처를 취하는 걸로 상황은 끝날 거라고요.”

“…….”

백작 부인의 지적은 날카로웠다. 예전 같으면 딱 잘라 거절할 백작이 긴 시간 침묵하자, 백작 부인은 그것으로 대답은 충분하다고 여겼다.

“헨리에타! 로리샤를 데려와.”

* * *

하녀 테리아는 놀라서 내게 속닥였다.

“미샤 아가씨가 방의 물건을 다 때려 부수고 계세요.”

“방학 때라고 정신도 방학이래? 왜 지랄이야?”

테리아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동기 생도에게 초대장이 하나 온 것 말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데, 모르겠어요.”

“어지간히 가기 싫은 모양이네. 볶은 땅콩 먹을래? 이번에 땅콩이 좋은 게 들어왔거든.”

테리아는 손바닥에 땅콩 한 줌을 받아 쥐고는 오물거리며 물었다.

“땅콩도 약재로 쓰나요?”

“껍데기를 쓰기도 해.”

“신기하네요. 엄청 맛있어요.”

“그치?”

“근데 백작 부인도 화가 나셨어요.”

“응?”

“백작님도 표정이 안 좋으시고, 집 안 분위기가 왜 이러나 모르겠네요. 미샤 아가씨는 방학 동안 저택에 계실 텐데 분위기가 계속 이러면…….”

“에이그. 고생해. 테리아.”

“아가씨만큼 하겠어요.”

테리아가 멋쩍게 대답했을 때 하녀 헨리에타가 찾아왔다.

“로리샤 아가씨, 백작님과 백작 부인이 찾으세요.”

“……응.”

나는 헨리에타가 나가자마자 화를 냈다. 미샤가 지랄 발광을 하고 있다더니 결국 나한테까지 불똥이 떨어진 거다.

“또, 또, 나만 만만하지! 나 오늘 트집 잡힐 일이 뭐가 있었더라?”

테리아는 나를 불쌍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고생하세요, 로리샤 아가씨.”

“하아…….”

나는 터덜터덜 걸어 응접실로 향했다.

그런데 가 보니 이상하게 백작 부인이 소파에 우아하게 앉아서 내게 부드러운 표정을 짓는 게 아닌가.

평소 같았으면 이 집 안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는 다 내 탓이라고 째려보았을 사람이 말이다.

반면 백작님은 나를 등지고 서 있었다. 나는 불길함에 사로잡혔다.

“부르셨어요?”

내가 말하자 백작 부인이 나를 향해 살짝 웃었다.

젠장, 나 얼마나 X된 거지?

“로리샤. 요즘 일거리를 찾고 있다지?”

“고민 중이에요.”

식은땀이 났다.

내 밥줄까지 떼 버리려고 그러나? 혹시, 내가 황궁 약제실과 거래를 튼 게 들킨 건가!

“성년이 되어 자립하려는 독립성은 높이 살 만하구나.”

“감사합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신지…….”

“나는 네가 아카데미에 입학을 포기한 게 늘 마음에 걸렸단다. 너도 사실 몇 년이나 입시 준비를 했잖니? 끝까지 힘을 내지는 못했어도 말이야.”

아, 그러세요?

나는 얼굴에 잔뜩 힘을 주었다.

몇 되지도 않는 내가 아끼는 것 모두를 망가뜨리겠다고 협박한 건 당신이었지 않느냐고, 조소하는 표정을 띠지 않도록.

이런 사람 앞에서 분노와 증오는 한편으로 내려놓는 것이 좋다. 그것이야말로 그들의 힘이니까. 대신 내가 원하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나는 백작 부인의 곱고 붉은 입술이 움직이는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래서 백작님과 내가 고민했단다. 아카데미를 졸업하는 만큼이나 네 장래를 보장해 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하고.”

“…….”

저 여자가 왜 내 장래에 대해 나불거리는가.

불길한 예감에 듣기 싫었다. 바로 몸을 돌려 응접실에서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 내 처지였다. 그녀가 내 삶을 또 한 번 뒤집어 놓으려 하는 순간에마저.

씨X. 다 죽어 버렸으면.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백작님이 황가의 시녀 자리를 구해 오셨다. 로리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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