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화. 칼린 앙카르트의 본색 (28/155)


28화. 칼린 앙카르트의 본색
2023.04.01.


“……!”

미샤는 입을 벌린 채 굳어 버렸다. 칼린의 온화한 얼굴에서 저런 말이 나온 것이 맞는지, 자신의 귀를 믿을 수가 없었다.

미샤는 겨우 정신을 수습하며 꿋꿋하게 말했다.

“내 성적을 올려 주어서 정말 감사해요, 앙카르트 양. 하지만 당신의 하녀 노릇은 그만하겠어요. 나는 자랑스러운 세 번째 사자의 딸이에요. 내 부족함으로 가문에 누를 끼칠 수는 없어요.”

“…….”

“당신에게 받은 건 너무 많지만, 나도 당신이 주는 수모를 다 견뎌 내고 봉사했으니까 내 잘못은 충분히 갚은 것 같아요.”

“혹시, 배은망덕이라는 단어 알아, 미샤?”

격을 갖추어 성을 불러 달라고 했더니, 칼린은 아예 하대를 하고 있었다. 그녀가 빚을 다 갚았으니 다시 존중받아 마땅한데, 칼린은 그럴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미샤는 자신의 권위가 먹히지 않는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하다못해 그 독한 로리샤도 아버지를 들먹이면 물러났는데!

칼린은 책상에서 일어나 미샤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미샤의 가슴에 잉크를 부으며, 노래하듯 말했다.

“그 세 번째 사자께서 따님의 손버릇을 알면 어떠실까, 미샤? 분명히 신문에 날 텐데…….”

“하아……!”

미샤는 잉크 병이 바닥을 드러낼 때까지 충격에 바들바들 떨 뿐 움직이지 못했다.

칼린은 잉크 병을 다시 책상에 놓고 자리로 돌아가서 말했다.

“어머! 미샤, 잉크를 쏟았군요. 어쩌면 좋아. 얼른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어요. 내 티 파티 날짜는 따로 연락할 테니까.”

“끄으윽…….”

미샤는 가슴에서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는 잉크가 끔찍하여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어떻게 걷는지도 모르는 채로 문으로 향했다.

칼린은 그런 미샤의 뒤에다 말했다.

“당신이 아카데미와 제국 사교계에서 동시에 퇴출당하지 않는 이유가 내 자비 덕분이라는 걸 잊지 말고요. 그게 없으면 당신이 겪을 치욕은 그 잉크보다 훨씬 더 검고 끈적거릴 테니까.”

그렇게 아카데미에 방학이 찾아왔다.

5. 빛나는 날들

그레이언은 몸이 회복되자 지극한 해방감을 느꼈다. 다시 검을 잡고 신체를 단련했다. 부상은 이제 흉터와 기억에만 남아 있었다.

그는 종종 로카르드가 기생충이라는 단어를 꺼내면 정색하고 공격했다. 제국의 황태자인 자신이 그까짓 벌레에 그토록 고생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분간 한숨 돌리겠네요.”

방학을 맞아 입궁한 로카르드는 모처럼 긴장을 풀고 말했다. 그도 황궁과 아카데미를 동시에 드나들며 피로가 누적되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황궁이 갑갑하다, 로카르드.”

그레이언은 로카르드가 방학을 맞자 기다렸다는 듯 일어나 평복을 하고 출궁했다.

수도 중심가를 벗어나면 가까운 곳에 호수를 낀 숲이 있었다. 아직 뱃놀이 철이 아니라 주변은 한산했다.

그레이언은 호수에 설치된 덱에 서더니 서슴없이 옷을 벗어 던지고 물로 달렸다. 로카르드는 그걸 보며 어이없어했다.

황제의 아들로 태어나신 분이, 고작 호숫가 좀 왔다고 저렇게 신이 나셔서는.

로카르드는 손나팔을 하고 소리쳤다.

“그렇게 훌렁훌렁 벗으시면 또 옮을지도 모릅니다. 기생…….”

“닥치고 들어와!”

로카르드는 킬킬거리며 그레이언의 옷을 개켜 놓은 다음 자신도 옷을 벗어 정리하고 물로 뛰어들었다.

그의 정리벽은 타고난 성격 때문만은 아니었다. 병영이나 다름없는 카이델 공작저에서 살다 보면 정리 정돈은 칼 같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뛰어든 물은 아직 차가웠으나 그쯤은 거뜬했다. 툰바르의 빌어먹을 냇물은 이맘때도 얼어 있었다.

* * *

“우와!”

나는 얼른 입을 틀어막고 머리를 수그렸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야트막한 풀밭에는 돗자리 위의 나 말고 아무도 없었다.

무슨 소리가 나는 것 같아서 고개를 들었더니 호수 건너편 덱에서 저 남정네들이…….

“아니, 저러면……. 저건……. 아휴…….”

나는 나체로 목욕하는 두 남자를 보고 놀라 입에 넣으려던 땅콩이 뚝 떨어지는 것도 모를 정도였다.

거의 점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남자는 남자고 알몸은 알몸이었다.

나는 백작저에서 잠시 피신 나온 상태였다.

방학이 되어 집에 돌아온 미샤는 눈빛마저 달라져 있었다. 철없이 헤실거리기만 하던 것이, 이제는 눈에 독기를 품고 걸핏하면 짜증을 내며 집 안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백작 부인은 미샤의 성적이 엄청나게 올랐다며, 공부가 얼마나 힘들었냐고 그녀를 달래기 여념 없었다.

공부하는 게 힘들어서 성격이 파탄 날 거면 학술원 사람들은 다 사형당했게?

나는 지나가던 미샤가 나를 보고 죽일 듯한 눈빛을 쏘는 걸 보고, 일단 집을 나오기로 했다. 하는 짓을 보니 만만한 나한테 시비를 걸러 올 것이 뻔해서였다.

지랄, 아주 공부가 유세다, 진짜.

그래서 나는 책과 돗자리, 볶은 땅콩을 챙겨 와 여기에 자리를 폈다.

호숫가에서 조금만 시간을 보내다 약재상에 나가려고 했는데, 조용한 물가에 누워 책을 읽다 보니 세상 근심이 다 남의 일 같았다. 그래서 통 일어날 생각이 들지 않았다.

속세의 인간들은 어쩌자고 그렇게 아웅다웅 처절하게 사는지.

나는 기왕 이렇게 된 것, 책이나 읽으며 간만의 오후를 꽉꽉 눌러 즐기기로 했다.

그런데 저런 걸 보고 만 것이다.

“오오. 씨X.”

내 눈, 내 눈 어떡하냐고.

머리로는 얼른 고개를 돌려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얼마나 놀랐는지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내 영혼을 구제하기 위한 투지를 발휘하여 가까스로 뒤로 벌렁 누웠다. 보던 책을 얼굴에 덮자 조금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아직 수영철도 아닌데!’

나는 혼자 투덜거리다가 내 얼굴이 살짝 달아오른 걸 깨달았다.

“안 되겠다. 산책이라도 하고 와야지.”

나는 돗자리를 놓아둔 채 숄만 걸치고 숲으로 산책을 갔다.

* * *

로카르드는 느긋하게 수영을 즐겼다. 접영으로, 배영으로. 오랜만에 넓고 얼음이 끼지 않은 물을 헤엄치니 저절로 흥이 났다.

어느덧 호수 건너편에 닿은 것도 모를 정도였다.

“……?”

그는 멀리서 숲으로 사라지는 사람의 인기척에 놀라 눈만 남기고 몸을 물속에 집어넣었다가, 다시 솟아 나왔다.

그는 물가에 흩어지는 고소한 냄새를 감지하고 물 밖으로 몸을 내밀어 보았다. 진한 볶은 땅콩 냄새는 이질적이어서 금방 지각되었다.

그는 수풀 사이를 살살 걸어 기슭으로 올라갔다가, 빈 돗자리 위에 놓인 땅콩을 발견하고 한 줌 집어 입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와구와구 씹으며 물속으로 사라졌다.

그가 물로 돌아간 후 바람이 불어 접혔던 돗자리 모서리가 펴졌다. 그 사이에는 낡은 책이 놓여 있었다.

『행복한 황후의 일생-퀸나 황후의 자서전』

로카르드가 돌아가자 덱 위에 사지를 펴고 늘어져 있던 그레이언이 말했다.

“혼자 뭘 우물거리는 거야?”

그것은 지금까지 로카르드가 먹은 땅콩 중 가장 맛있는 것이었다.

조금만 더 먹으면 좋겠는데…….

그는 무심결에 대답하다 말을 멈추었다.

“땅ㅋ……. 음, 흙 집어 먹었어요.”

“이 새끼가!”

두 남자는 다시 물로 풍덩 뛰어들었다.

* * *

오후 볕이 기울어 갈 때쯤, 옷을 챙겨 입은 그레이언은 젖은 은발을 털어 내며 말했다.

“시종 메달이 왔어.”

“…….”

로카르드의 눈매가 금방 가라앉았다.

황족의 시종과 시녀는 귀족이거나 귀족가의 자제 가운데 선발했다. 그들은 황족의 비서이자 참모였으며, 황족의 격에 따라 메달을 주어 신분을 증명해 주었다. 황족의 권위를 나누어 받는 신분 패였다.

그들에게는 모시는 황족의 침소 근처에 방이 제공되고 급여도 지급되었다.

모든 제국인은 황제에게 충성을 바쳐야 하지만, 시종과 시녀는 자신의 주군을 우선시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대신 현직의 시종과 시녀는 그 황족과 정치적 운명을 함께 해야 했다.

그레이언은 건조하게 말했다.

“폐하께서 황자녀들의 능력을 검증하기 위해 경연을 열기로 하셨어. 앞으로 우리를 시험하실 거야.”

“이제 시작인가요.”

“자신 있나?”

그레이언의 물음에 로카르드는 비웃음을 띠었다.

“지금 누구한테 물으시는 겁니까? 아마타전의 영웅께 이 몸이 새끼 사자임을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믿지. 로카르드.”

그들이 호숫가에서 나가자 말을 지키던 호위 기사 팔콘이 그레이언을 맞았다.

로카르드는 자신의 말에 올라 말했다.

“잠시 들를 데가 있으니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여자라도 만나나?”

“하. 설마요.”

눈살을 찌푸린 로카르드는 발로아 거리로 말을 달렸다.

그가 약재상 앞에 말을 멈추어 얼쩡거리자 로리샤가 바로 튀어나왔다.

로카르드는 그녀가 자신을 보고 도끼눈을 뜨는 것이 웃겼다. 그것이 몹시 거슬리는 순간이 분명 있었지만, 대개는 그랬다.

로리샤는 사방으로 눈치를 살피며 로카르드의 말을 길가로 데려갔다.

“뭐, 또, 왜 오셨어요? 또 납치하게요?”

“사람을 뭐로 보고.”

로카르드가 손을 내밀고 기다리자 그녀는 또 도끼눈을 떴다.

“……뭐, 뭐 달라고요? 이제는 삥도 뜯어요?”

삥이라니, 세상에!

로카르드는 한쪽 눈썹을 기울이면서도 그녀에게 집중했다. 그녀가 화를 내는 표정이 생생하게 눈에 들어왔다.

“보상. 이제 반납하죠?”

“보…….”

로리샤는 말을 하다 말고 입을 앙다물었다.

로카르드는 그녀가 머리를 굴리는 소리에 귀가 아플 정도였다. 그러나 한편 그녀가 뭐라고 변명할지 흥미진진한 기분으로 기다렸다.

‘또 쌍욕을 하려나? 자, 말해 봐요. 로리샤 양.’

그는 짐짓 냉정한 태도로 말했다.

“그날 새벽에 보상을 달라고 하지 않은 건 이미 챙겼기 때문 아닙니까? 이제 반납해요. 황가 서고의 장서가 없어진 것을 들키면 나도 곤란해지니까.”

책벌레들이 하는 짓은 거기서 거기인걸.

로리샤는 눈을 불안하게 굴리다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기, 기다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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