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딸을 달라고 하려고요
(27/155)
27화. 딸을 달라고 하려고요
(27/155)
27화. 딸을 달라고 하려고요
2023.03.31.
“딸을 달라고 하려고요.”
황후의 미간이 좁혀지자 오를이 웃었다.
“세 번째 사자가 누구를 택하는지 보고 싶어서요. 저인지, 그레이언인지.”
“아니, 오를. 그건 좋지 못한 생각이야.”
오를의 의문스러운 시선이 황후에게로 향했다.
“아직은 이르다. 지금 선택을 강요하면 그는 중립을 유지하려 할 거다. 굳이 질문하여 그를 네게서 멀어지게 하지 말거라.”
“…….”
“제위에 오르면 적어도 사자 한 마리는 네 곁에 앉혀 두어야 해. 이미 한 마리는 놓쳤지 않니.”
대화가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오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제국의 병력을 쥐고 흔드는 첫 번째 사자의 아들이 그레이언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놓아둔 것은 쓰고 또 쓴 일이었다.
황후가 말했다.
“네게는 이미 르네 자작이 있잖니. 그이만큼 황궁 안팎으로 경험 많고 유능한 시종을 구할 수는 없을 거야. 경연에서 틀림없이 너를 돋보이게 해 줄 거다.”
“아니요. 백작의 딸은, 선물용이에요.”
* * *
“헬리든 로아르가 1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타가르에 영원한 광영을.”
오를은 편안하게 웃으며 백작에게 직접 차를 따라 주었다.
“최근에 건강은 어떠십니까, 전하.”
“늘 비슷해요. 몸에 힘이 들지 않아 말이나 겨우 타죠. 덕분에 머리만 혹사하고.”
“사람의 강점은 다양한 형태를 지닙니다.”
“친절하시긴.”
“저는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부탁할 게 있어서요.”
“하문하십시오.”
“폐하께서 황자녀들의 경연을 열겠다고 하셨어요. 제국만인 앞에 자신의 기량을 펼쳐 보이라는 뜻이시죠.”
“현명한 결정이십니다.”
백작은 웃으며 대답했으나 자신이 지금 호랑이 소굴에 들어와 있음을 자각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장자로서 보니 이 경연의 균형이 맞지 않더군요. 경연에서는 각기 시종을 두고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습니까. 내게는 르네 자작이, 그레이언에게는 카이델 공자가 있지만 밀리오라에게는 아무도 없어요.”
“…….”
“아시잖아요, 밀리오라의 입장이 어려운 것. 성격이 제멋대로라 모후도 품지 못하실 정도고……. 이대로는 경연의 공정성이 의심받게 될 겁니다.”
백작이 천천히 시선을 맞춰 오자, 오를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백작의 딸을 밀리오라의 시녀로 보내 주었으면 해요. 제국의 학문을 아우르는 세 번째 사자의 딸이라면, 밀리오라가 오라비들 사이에서 불리한 경연을 치른다고 말하는 이는 없을 겁니다.”
“……거절이 가능합니까?”
오를은 웃을 뿐이었다.
백작은 물었다.
“경연 고지가 언제 나겠습니까?”
* * *
칼린 앙카르트와 어울리던 생도들은 그들의 스터디 그룹에 새로이 끼어든 미샤를 몹시 불편하게 여겼다.
그들은 다 우등생이었는데 미샤는 수준 낮은 질문으로 그들의 공부 분위기를 깨곤 했다. 그들은 칼린이 왜 미샤를 받아 주었는지 불만하였으나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다.
칼린이 그녀를 감싸고 돌았기도 했거니와 지난 파티 때 본 지적이고 우아한 미중년 로아르 백작의 모습이 그들에게 어떤 존경심을 일으킨 탓이었다.
그의 환영사는 짧았지만 감동적이었다. 그들이 아카데미에서 자신을 혹사하며 공부하여 나아갈 길이 어디인지, 그는 그 정답이나 다름없는 자였다. 그들은 그의 모습이 자신들의 미래이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들은 칼린이 미샤를 동정심과 의무감으로 돕는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미샤의 아둔함으로부터 세 번째 사자님의 위상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중이라고, 칼린의 고결함에 감탄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 착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들이 함께 어울리는 것이 익숙해진 어느 때쯤인가부터, 칼린은 미샤를 로아르 양이 아니라 미샤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룹원들은 처음에는 그런 칼린을 보며 저래도 괜찮은가 서로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미샤는 그럴 때마다 눈을 내리깔거나 할 뿐이었다. 그래서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칼린을 따라갔다.
하지만 미샤가 그들을 이름으로 부르려고 하면 칼린이 엄한 표정으로 말을 끊어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들었다.
생도들은 그제야 칼린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칼린 앙카르트는 소녀처럼 다른 이를 동경하기보다 제가 지배하기를 원하는 성격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미샤는 필사적이었다. 그녀는 그들이 새벽까지 모여서 공부할 때면 손수 차와 다과를 준비하고, 도서관에서 그들의 책을 대신 대출하고 반납했다.
그녀는 칼린이 기침이라도 하면 바로 말했다.
“어머, 앙카르트 양. 뜨거운 차를 드시겠어요?”
그걸 보는 생도들은 생각했다.
‘꼭 하녀 같아.’
출교를 피하려는 미샤의 처절함은 그녀의 스터디 그룹뿐아니라 그 모습을 보는 다른 생도들에게까지 긴장감을 부여했다.
나도 낙오하면 미샤 로아르처럼 될 거라고, 다른 생도에게 저런 꼴로 천시당하게 될 거라고, 졸음이 확 달아나 공부에 집중하게 되는 것이다.
어느 날, 로카르드는 휴게실에서 칼린과 형식적인 인사를 나누다가 미샤가 스터디 그룹원의 책을 한꺼번에 대출하여 힘겹게 안고 가는 걸 보았다.
“로아르 양이 당신을 매우 따르는군요. 앙카르트 양.”
그러자 그녀는 웃으며 대답했다.
“늘 노력하다 보니 저절로 사람이 따르더군요. 매력도 기를 수 있는 건가 봐요. 하지만 공자님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걸요.”
로카르드는 대답 대신 눈을 휘어 접어 웃었다.
그렇게 치열한 기말시험 기간이 지나고, 마침내 결과가 발표되었다.
그것은 기적이었다. 미샤 로아르가 단 1점 차로 출교를 면한 것이다.
성적을 확인한 미샤는 게시판 앞에 털썩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생도 하나가 다가가 속삭이는 소리로 나무랐다.
“미샤, 앙카르트 양의 체면을 생각해요!”
“흡! 네!”
미샤는 자동으로 대답하고 벌떡 일어났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저쪽에서 칼린이 그녀를 오물 보듯 쏘아보고 있었다.
미샤더러 닥치라고 사람을 보낸 것도 그녀였다.
칼린 앙카르트는 아마도 도둑질보다도 품위 없음을 더 경멸하는 사람이었다.
“로아르 양, 성적이 큰 폭으로 올랐군요. 축하드립니다.”
어김없이 1등을 차지한 로카르드가 그녀를 달래려 친절하게 말을 걸었지만, 심지어 그가 먼저 말을 건 것이 처음이었음에도, 미샤는 압도하는 수치심에 그를 바라보지 못했다.
미샤는 그대로 기숙사 방으로 달렸다.
* * *
미샤 로아르는 자신이 아카데미에 잔류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혐오하고 있었다.
분명히 기쁜데, 너무 기쁜데, 자신이 더는 카이델 공자와 눈을 똑바로 마주칠 수 없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치미는 분노를 느꼈다. 오랫동안 차곡차곡 쌓여 온 분노였다.
칼린 앙카르트와 그녀의 스터디 그룹을 위해 하녀처럼 굽실대고, 개새끼처럼 그녀가 숨만 쉬어도 귀를 쫑긋 세우는 생활은 그녀의 자존심을 처참하게 짓밟았다.
그녀는 태어나 지금까지 누군가를 위해 무엇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칼린 앙카르트를 위해 했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돌무더기를 등에 진 듯 선명한 고통으로 자각되었다.
시험 기간에는 이것이 자신을 위한 일이며 가문의 체면을 지키고 카이델 공자의 곁에 머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스스로 다독였다.
하지만 막상 자신이 출교를 면한 걸 확인하고서 칼린의 경멸하는 시선과 마주치자, 꾹꾹 밟아 놓았던 감정의 둑이 터지고 말았다.
‘내 죗값은 다 했어.’
미샤는 칼린과 결별하기로 했다. 그동안 그녀의 지도로 공부 요령도 어느 정도 익혔으니, 앞으로는 가정 교사의 도움으로 어떻게든 해 볼 작정이었다.
아카데미에서 이 정도의 성적 상승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미샤는 도움을 받아서나마 이런 기적을 이룬 것이 자신에게 흐르는 세 번째 사자의 피 덕분이라고 믿었다.
미샤는 생각했다.
앞으로도 거기 의지하여 나아가자, 로아르가의 적녀로서의 자존심을 지키자. 그게 내가 진짜로 해야 할 일이야.
그렇게 결심하고 나니 그제야 어머니에게서 뺨을 맞은 통증이 낫는 기분이었다.
1학기가 끝난 아카데미 기숙사 분위기는 어수선해졌다. 생도들은 본의 아니게 어질러 놓았던 방을 대청소하고, 짐을 싸서 방학 동안 본가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마음을 추스른 미샤는 칼린을 찾아갔다. 칼린은 그때도 공부를 하고 있었다.
카이델 공자를 한번 이겨 보겠다고. 지긋지긋한 독종 같으니.
미샤는 칼린의 그런 모습이 자신을 짓밟으려는 노력처럼 느껴져 물밀듯 차오르는 증오를 느꼈다.
칼린은 그것도 모르고 책을 보며 건성으로 말했다.
“미샤, 방학 때 우리 집에 와야 해요. 티 파티가 있어요. 우리 가문과 친분 있는 영식들도 참석할 거니까 예쁘게 하고 와요. 손님들을 즐겁게 해 드려야 하니까.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죠? 밀레나 양도 올 거예요.”
미샤는 그 말을 듣자 누가 정수리에 얼음물을 붓는 것 같았다.
여태 하녀 취급한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접대부 취급을 하는 것인가.
그녀는 딱딱하게 말했다.
“로아르. 로아르 양이라고 불러 주세요. 앙카르트 양.”
무엇을 찾는 듯 책장을 빠르게 짚어 가던 칼린의 손가락이 멈추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미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지금, 뭐라고 했어요?”
“우리는……, 같은 생도잖아요. 나만 이름으로 불리는 건 이상해요.”
칼린은 우아하게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야 도둑년이 너뿐이니까 그렇지. 미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