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황후의 자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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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황후의 자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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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황후의 자녀들
2023.03.30.
나이 지긋한 시녀, 미리암 호르테 자작 부인은 황후의 지시라면 몸을 사리지 않았다. 하녀를 매질하는 동안 그녀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았다.
황후는 싸늘하게 말했다.
“네 입으로 2황자가 운신이 불가하다 하지 않았느냐. 말도 타지 못할 것이라고. 그런데 사냥터에서 펄펄 날아다니더구나.”
미리암은 매질하는 틈틈이 박자를 잘라 말했다.
“감히 네년이, 어디서 거짓을, 고해!”
하녀는 바닥을 기며 애원했다.
“크흑. 아닙니다! 약제실장이 다녀간 후로 2황자 전하께서 종일 구역질하며 먹지도 못하시고……! 소인은 거짓을 고한 적이 없습니다. 살려 주세요!”
하녀의 호소는 처절하여 거짓일 수 없어 보였다. 그녀를 지켜보던 황후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러면 네가 속은 것이겠지. 나를 기만하려 한 연극에 속은 것이겠지.”
“2황자 전하의 병증은 진짜였습니다. 카이델, 카이델 공자님이 약을 찾아오신 게 틀림없어요.”
하녀는 이제 비명을 지를 기운도 없어 웅크려 제 머리만 감쌌다. 더 하다간 사람이 아예 망가질지도 몰랐다.
황후의 손짓에 시녀가 매질을 멈추었다. 미리암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한 것이 그녀도 최선을 다한 것이 티가 났다.
그녀는 하녀들에게 2황자의 하녀를 끌어내게 하고는 황후를 향해 돌아섰다.
“그게 모두 2황자 전하의 연극이셨단 걸까요?”
“전쟁터에 다녀오더니 한껏 약아졌나 봐. 덕분에 폐하 앞에서 그 애가 강건하게 회복한 꼴만 보이고 말았어.”
1황자는 이십 대 중반에 들어 정체불명의 지병을 얻었는데 2황자는 군신인 양 날아 다닌다.
한 이 년 전장을 구르고 나더니 이제는 몇 살 터울 제 형보다 더 진한 사내 냄새를 풍기지 않는가.
들은 말로는 야숙하는 불가에서 2황자의 무용담이 끝이 없었다고 했다. 1황자는 거기서 할 말이 없었다.
그것이 제 주인을 참을 수 없이 불안하게 만든다는 것을 아는 미리암은, 황후 앞으로 나아가 차분하게 말했다.
그녀의 이마는 여전히 땀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걱정 마십시오, 황후 폐하. 기회는 또 옵니다. 언제나 옵니다.”
“2황자의 건재가 알려지니 후계 이야기가 나오고 있어. 시간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네.”
“…….”
* * *
황녀 밀리오라는 황궁 복도를 지나다 여자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를 따라 어느 방으로 들어가니 하녀들이 모여 있었다.
바닥에는 매질을 당한 하녀가 죽어 가는 개처럼 신음을 흘렸고, 주변 하녀들은 울먹이며 남자 하인이 와서 그녀를 처소로 업어 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밀리오라는 그녀가 2황자궁 사람임을 알아보고 놀라 다가갔다.
“네가 왜 여기 있어? 누구에게 이렇게…….”
“흐흐흑, 황녀 전하아…….”
밀리오라는 더 질문하지 않았다. 2황자궁의 하녀를 불러내 이 정도까지 매질할 수 있는 사람이 황궁에 또 누가 있는가.
밀리오라는 황후가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나 싶었다. 윗전의 손이 이렇게 매우니 아랫것들 보기 두려울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는 드세게 말했다.
“뚝 그치지 못해? 궁이 시끄럽구나. 하인들은 무얼 해? 얼른 달려와 이 아이를 빨리 옮기지 않고. 너는 먼저 가서 2황자궁으로 의사를 들라 해!”
곁에 있던 하녀는 의사라는 말에 반색을 하고 일어났다. 하녀가 감히 의료원의 치료를 청할 수는 없다. 윗전이 허락해 주니 그나마 감사한 일이었다.
하지만 부축을 받아 일어난 하녀는 그대로 멈추어 머리를 낮추었다.
순간 싸늘해지는 공기.
밀리오라는 돌아보기도 전에 지금 문밖에 누가 서 있는지 알았다. 그것은 그녀 또한 익숙한 시선이었으므로.
황후 앞에서는 황가의 적녀인 그녀도 이 하녀와 다를 것이 없었다.
“뭐 하는 짓이지?”
황후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녀의 가녀린 등에 먼저 날아와 꽂혔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밀리오라가 돌아서 예를 갖추자 하녀들이 매 맞은 하녀를 근근이 끌고 나가 방을 비웠다.
황후는 그들이 멀어지기를 기다렸다 입을 열었다.
“아예 처소를 2황자궁으로 옮겨 주랴?”
밀리오라는 지금 자신이 2황자궁 하녀들을 돌본 듯 보이는 상황임을 깨닫고 머리가 하얘졌다. 하녀의 과실이 그녀의 책임인 듯 보일 상황이었다.
제국에서 가장 귀한 딸로 나고 자란 그녀였지만, 모후 앞에 서기만 하면 순간 손바닥이 축축해지고 머릿속이 텅 비었다.
“그게 아니라, 지나가다가…….”
“정말 쓸모가 없구나.”
소리로 된 비수. 모후의 건조한 비난은 감정이 담기지 않아 고정불변의 사실처럼 들렸다. 평생 들어온 말임에도 바늘 끝만큼도 익숙해지는 법이 없었다.
“작은 몸뚱이로 생쥐처럼 돌아다니며 형제간을 이간질하니 좋더냐? 그런다고 누가 너를 쓸모 있다 여겨 줄 줄 알아?”
“황후 폐하! 이간질이라니, 저는…….”
“가만히 엎드려 있다가 네 큰 오라비의 자비를 구할 생각이나 하거라.”
그런 무서운 말씀은 하지 마시라고, 지나가다 울음소리를 들어 들여다보았을 뿐이라고 말하려 생각을 가다듬었을 땐, 이미 황후는 자리를 떠나고 없었다.
그녀는 빈방에 덩그러니 버려진 자신을 발견하고는 하아, 하고 의식적으로 숨을 토했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가 문을 잠근 다음 소리 죽여 울기 시작했다.
* * *
황후는 곧장 1황자 오를의 방으로 향했다.
오를은 발코니 앞 편안한 의자에 앉아 있다가 황후를 보자 환영의 뜻으로 부드럽게 웃었다. 목 언저리까지 가지런하게 다듬어진 그의 은발은 병약함마저 고귀하게 보이게 했다.
“제 소중한 모후께서 어찌 심기가 불편하십니까?”
아들의 질문에 황후는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방금까지 겹쳐 쌓인 분노가 그의 말 한마디로 봄눈처럼 녹아 버린 얼굴이었다.
“내 심기가 어지러울 일이 무엇이 있겠니. 너에 대한 걱정이지. 내 기쁨과 근심은 모두 너에게서 나오는구나, 오를.”
“부디 저를 위해서는 기뻐만 하십시오, 황후 폐하.”
황후는 아들의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은 다음 소파로 돌아갔다.
“폐하께서 그레이언이 사냥회에서 잡은 여우를 박제하라고 하셨단다. 제국에 철광석 광산을 물어 온 길한 여우라며.”
오를은 모후를 달래듯 대답했다.
“제국이 발전하며 부족했던 철광석의 수요를 이제 자급하게 되었습니다. 저 또한 폐하만큼이나 기쁩니다.”
“제국을 생각하는 네 마음이 크고 깊구나, 오를. 하지만 여우는 길들여 키우는 짐승이 아니란다.”
“…….”
“그레이언이 건강을 완전히 회복한 걸 과시하자 귀족과 장교들도 그에게 줄을 대기 시작했어. 사람들이 이제 그를 실세로 여긴다는 뜻이야. 더 이상 그레이언에게 시선이 쏠리게 해서는 안 돼.”
오를의 건강을 생각해 1황자궁은 몹시 조용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그래서 밖에서는 정원에 머무는 새의 아름다운 지저귐뿐이었다.
혹여나 잡스러운 소리를 내는 새가 날아들면 황궁 하인들이 사냥해 없앴다.
“그 시선, 그냥 주면 어떻습니까.”
“…….”
아들이 무슨 말을 하는가, 황후는 화려한 의자 등받이에 얹어 둔 그의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제 제국에는 안정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대로는 제가 황태자가 된다 해도 군 세력은 함께 살을 맞대고 싸운 그레이언을 잊지 못할 겁니다. 아마 저는 계속 그레이언의 그림자와 싸워야 하겠지요.”
“그러니 하는 말 아니니.”
오를은 가만히 등을 일으켜 황후를 돌아보았다. 몸이 말라 키가 더 커 보이는 아름다운 은발의 사내는 모후를 향해 슬쩍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폐하께 경연을 청하세요. 폐하께 황자녀들이 서로 힘을 겨루어 능력을 드러내는 것을 지켜본 다음 후계를 선택하시라 하세요.”
황후의 눈이 오랫동안 가늘게 가라앉았다.
“네 몸 상태로는 무리인 일들이 있을 게다. 그레이언은 반드시 그 약점을 노릴 게야.”
“저 또한 그 애의 건강상 약점을 노렸습니다. 우리는 각자 최선을 다할 거예요, 황후 폐하.”
황후의 시선이 흔들렸다.
오를은 말을 타고 검을 휘두를 수 없다. 그런 면으로는 그레이언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에게 유리한 장소로 전장을 옮기면 그만이다. 은밀한 음모, 이전투구의 전장으로. 그는 거기에서만큼은 그레이언에게 밀리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자신이 뒤를 지키고 있지 않은가.
오를의 승부사적 제안은 그가 과연 황제의 재목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듯해 그녀를 기쁘게 했다.
그러나 그녀는 오를이 그 과정에서 다치고 상처 입는 것을 볼 자신이 없었다. 그의 건강 상태는 늘 그녀를 예민하게 했다.
그것이 어미의 마음이었다.
“황가의 싸움에서 피를 보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한 일이 아닙니까. 폐하께서도 그 제안을 싫어하지는 않으실 거예요. 당신의 형제들을 직접 죽인 기억을 혐오하시잖아요.”
“……자신은 있는 것이냐?”
오를은 자리에서 일어나 모후에게 다가왔다.
“황후 폐하. 이건 여행 같은 거예요. 결국 가야 할 목적지로 걸어가는 거죠. 굳이 힘을 내어 다독이지 않아도 길은 제가 원하는 곳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황후는 웃었다. 저러니 반하지 않을 수 있는가.
이제 사랑 같은 것은 모르는 그녀를 위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저 오를이었다. 뒤이은 아이들은 그녀에게 상처만 줄 뿐이었다.
아비의 축복을 입지 못한 자식이란 어미의 상처 외의 무엇도 될 수 없었다. 차마 입 밖에 낼 일 없는 사실이라고 하나, 또한 입 밖에 낼 수 없기에 고정불변의 사실이 되고 마는 것이다.
“로아르 백작을 들라 할 생각입니다.”
“세 번째 사자는 왜? 그는 폐하의 사람이다.”
“딸을 달라고 하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