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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미샤의 침몰 (25/155)


25화. 미샤의 침몰
2023.03.29.


“악!”

미샤가 문을 닫자 매서운 따귀가 날아왔다. 몸이 마차 좌석에 엎어질 정도였다.

백작 부인은 싸늘한 목소리로 말하면서도 몸은 바르르 떨고 있었다.

“너 때문에……. 너 때문에 내가 이런 수모를 겪다니. 꺼져 버려, 이 멍청한 것!”

백작 부인은 손을 뻗어 문을 가리켰다. 미샤는 놀라 눈물을 흘리는 것도 잊은 채로 멍하니 마차 밖에 남겨졌다.

마차가 아카데미 마당을 떠난 후에야, 미샤는 울음을 터트렸다.

* * *

미샤는 기숙사 제 방에 처박혀 울고 또 울었다.

‘멍청한 것.’

백작 부인은 지금까지 그녀를 그렇게 부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미샤 로아르는 늘 예쁘고, 우아하고, 사교적이며, 음악 천재로만 불렸다.

너는 모든 축복을 타고났으니 마땅히 누려야 하는 아이라고.

미샤는 어머니의 달라진 태도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만, 자신의 성적을 알았다면 누구라도 그러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실도 알았다.

이 끔찍한 상황에서 한 가지 희망은,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비밀을 지키리라는 정도였다. 그녀는 제발 아버지만은 이 상황을 모르기를 빌고 또 빌었다.

지금까지 미샤는 자신이 계속 열심히 공부했으니 기말시험에서는 성적이 원하는 만큼 오르리라고 확신했다. 기말시험만 잘 보면 다 해결될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성적을 어머니에게 들키면서, 그녀의 허상 같은 희망도 함께 무너져 내렸다.

그녀는 여전히 공부 시간의 삼분의 일 정도는 사전을 찾아보는 데 사용했다. 수업 시간에 철자를 잘못 적어 사전에서 찾지 못하는 단어도 종종 있었다. 그러면 뜻을 짐작하여 공부하는 수밖에 없었다.

가정 교사들의 도움을 받은 후부터 약간은 수월해졌지만, 꼴찌가 갑자기 중위권까지 올라가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황제의 왼편에서 문을 담당한다는 세 번째 사자의 딸이 아카데미 첫 학기에 낙제라니.

게다가 그렇게 되면 앞으로 카이델 공자를 볼 면목이 없었다. 미샤를 가장 괴롭게 하는 것은 그 부분이었다.

‘악바리 로리샤라면 여기서도 독하게 버텼을 텐데.’

스치듯 떠오른 생각에 몹쓸 생각이 연이어 따라왔다.

로리샤의 공책. 가정 교사들은 그걸 보고 다른 선생님이 왔느냐고 물었다. 아카데미에 들어와서 보니 그 공책은 교본이나 다름없었다.

미샤는 그런 공책을 가진 사람이 로리샤 하나뿐이 아닐 것임을 깨달았다. 아카데미는 로리샤 같은 책벌레 악바리들이 가득한 곳이니까.

미샤는 그때, 꾸밀 생각은 없지만 공부에 방해되는 것이 싫어서라는 듯 갈색 머리를 틀어 올린 칼린 앙카르트를 떠올렸다.

그녀라면 미샤를 위해 완벽하게 정리된 공책을 가지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공책을 빌려 달라고 해 볼까?’

미샤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 칼린이 그런 호의를 베풀 이유가 뭐란 말인가.

병으로 결석이라도 하지 않은 한 생도들은 공책을 빌리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다. 스스로 학습할 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을 자인하는 행동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세 번째 사자의 딸인 자신이 그런 식으로 처신할 수는 없었다.

미샤는 가장 익숙한 방법을 떠올렸다.

‘잠시만 빌려오는 거야. 바로 돌려주면 앙카르트 양의 공부에도 방해가 되지 않을 거야.’

그녀는 결심을 굳힌 다음 잠을 청했다.

그리고 다음 날 일찍 방으로 돌아와 때를 기다렸다. 생도들이 각자 공부나 휴식을 위해 흩어졌을 때, 그녀는 칼린 앙카르트의 방으로 향했다.

미샤는 몰래 문을 열고 들어가 칼린의 책상 서랍을 뒤졌다. 그리고 서랍에서 ‘기말고사 준비용’이라고 적힌 공책을 찾아냈다.

그것을 꼭 안고 나가려 돌아섰을 때, 문 앞에는 싸늘한 웃음을 띤 칼린 앙카르트가 서 있었다.

“헉……!”

칼린은 차분하게 웃었다. 미샤는 잔인한 눈을 하고 입가를 부드럽게 휘는 그 웃음에 익숙했다. 백작 부인의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겁에 질렸다.

칼린은 자신의 뒤로 문을 닫으며 말했다.

“로아르 양,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광경이 믿기지 않네요.”

“오해……. 아니에요! 앙카르트 양.”

“뭐가 오해죠? 당신이 내 방에 몰래 들어와 내 책상을 뒤진 것? 아니면 내 공책을 훔치려 한 것? 음……. 그걸로 커닝이라도 하려고 했어요?”

“커닝이라니! 절대! 전 그런 짓은 안 해요!”

커닝은 발견 즉시 퇴학당하며 재입학을 불허한다. 심지어 사유까지 외부에 공개한다. 그것은 아카데미 최고의 범죄였다.

칼린의 말에는 미샤가 공책을 보아도 외우지 못할 테니 커닝 페이퍼로 쓸 것이 아니냐는 비아냥이 들어 있었지만, 겁에 질린 미샤는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아아. 그러면 도둑질만 하는 거군요? 훗…….”

칼린은 마치 자신도 누군가 이 대화를 듣기 원치 않는다는 듯,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미샤를 짓밟았다.

“세 번째 사자님의 따님과 동기생이 될 수 있다고 해서 꿈에 부풀었었는데, 당신이 퇴학당하다니, 몹시 아쉽네요. 어떻게 생각해요?”

어떻게 생각하기는, 아무 생각도 없었다.

미샤는 이를 악물고 머리를 마구 저었다. 눈물이 흩뿌려졌다.

칼린은 부드럽게 웃으며 다가가 미샤가 꼭 안고 있는 공책을 빼앗아 왔다. 미샤는 그것이 생명줄인 양 껴안고 버텼으나 결국 힘없이 놓았다.

미샤는 입술을 달싹거리며 울다가 겨우 소리 냈다.

“앙카르트 양, 저는……. 그게 아니라…….”

미샤는 칼린 앞에 털썩 무너지듯 무릎을 꿇었다.

“잠깐만 보고 돌려놓을 생각이었어요! 뭐를 외우면 되는지 몰라서, 참고만 하려고요! 오해예요. 전부 오해예요!”

“그러면 지금 바로 학사 실장님께 가도 될까요? 로아르 양이 오해를 풀 수 있도록이요.”

“안 돼요!”

미샤는 칼린 앞에 무릎으로 기어가 그녀의 다리를 안고 울었다.

제발, 그러지 마세요. 한 번만 봐주세요, 잘못했어요. 유아가 무서운 엄마에게 비는 듯한 소리가 연신 나왔다.

칼린은 그녀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기다렸다. 그동안 한순간도 평온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마침내 미샤가 젖은 눈을 들자, 칼린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나 궁금한 게 있었는데, 당신 파티 말이에요. 왜 열었어요?”

“그…….”

“당신, 카이델 공자님 때문에 아카데미를 떠나고 싶지 않은 거죠?”

미샤는 숨이 막혔다.

“앙카, 앙카르트 양…….”

“내가 아카데미에 계속 머무르게 해 주면, 카이델 공자님을 곁에서 볼 수 있게 해 준다면, 미샤 양은 내게 뭘 해 줄 거예요? 내 공책을 그냥 빌려준다면요.”

“…….”

미샤는 혼란스러운 가운데 자기 앞에 거대하고 잔인한 희망이 흔들어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것을 붙잡는 것 말고 다른 선택은 없었다.

“뭘 원하세요? 뭐든지요!”

칼린은 그때 미샤에게 경멸의 감정을 느꼈다.

그녀는 미샤가 자신을 찾아와 공책을 빌려 달라고 했으면 빌려주었을 것이다. 미샤 로아르가 공책을 빌릴 정도로 다급한 상황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세 번째 사자 가문의 호의를 얻을 수 있다면, 칼린에게 그 정도 친절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미샤 로아르는 그것조차 모를 정도로 아둔했다. 자신이 가진 것조차 이용할 줄 몰랐다.

그러니…….

칼린은 지그시 치마를 당겨 미샤에게서 벗어난 다음, 그녀를 강아지를 보듯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카데미에 와서는 하녀가 없으니 불편하더군요.”

“……?”

미샤는 설마라고 생각했다. 칼린의 암시를 알아채기는 했지만, 믿기가 어려웠다.

태생부터 고귀하고 축복받은 그녀에게 그런 걸 원하는 사람이 있으리라는 상상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칼린의 웃음은 자신의 요구를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내 강아지가 될래, 퇴학당할래?’

미샤는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제, 제가 앙카르트 양을 열심히 도와드리면…….”

“물론 동기 생도끼리는 도와야죠. 제가 당신의 공부를 특별히 도와줄게요. 당신에게는 성적이 필요하니까. 안 그래요?”

내게는 몸종이 필요하고.

하지만 미샤는 자신이 원하는 것은 저절로 저를 찾아온다고 믿는 낙관적인 인간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이 상황도 결국 순조로운 결말을 맺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녀는 대답했다.

“고마워요, 앙카르트 양.”

* * *

황후 레오라 M. 타가르는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여자였다. 웃을 때 입가에 지어지는 주름 말고는 세월의 흔적이 없어서, 황가가 나란히 서면 그녀가 세 황자녀의 모후가 아니라 계모인 줄 안다는 농담이 오갈 정도였다.

옅은 핑크색 머리를 보기 좋게 말아 올린 채 곧지도 나른하지도 않은 자세로 의자에 앉아 있으면, 저 모습이 그림인가 싶은 아름다운 여자였다.

하지만 그녀의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미소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황제와 황후의 사이는 퍼석할 정도로 건조했고, 그녀의 관심과 열정은 오직 1황자 오를에게 향해 있었다.

그녀는 원래부터 자신의 장자만을 지극히 사랑하였으나, 그가 몇 년 전 희귀병을 얻은 후부터 그 편애는 보다 맹렬해졌다.

하지만 그녀의 처신을 마냥 비난하기만은 힘들었다.

황가에서 후계 싸움은 흔히 피를 동반했으며, 그 결과는 언제나 제국의 내부 분열과 황권 약화를 불러왔다.

그녀는 황태자비 시절 당시 황태자였던 황제가 행한 형제 상잔의 피바람을 몸소 겪었다. 그러니 그녀에게 황자녀 간의 서열 정리는 강력한 당위를 너머 의무에 가까우리란 것이 세간의 해석이었다.

이 하녀의 죄는 그 중요성을 모르는 것을 넘어, 시킨 일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둔함이었다.

2황자궁의 하녀는 황후 앞에 끌려와 황후의 시녀에게 매를 맞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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