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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납치범과 인질 사이 (23/155)


23화. 납치범과 인질 사이
2023.03.27.


나는 카이델 공자가 나를 약제실장님 앞에서 ‘로아르 양’이라고 부를까 봐 식은땀이 났다.

하지만 카이델 공자는 우리를 추월하며 내 이름을 불렀다.

“뭐 해요, 로리샤 양.”

어우, 똑똑한 새끼.

나는 그의 뒤통수를 새초롬하게 쏘아보며 뒤를 따랐다.

로이만 실장님이 내 곁으로 다가와 속삭였다.

“카이델 공자님과는 어떻게 아는 사이예요?”

“음, 납치범과 인질 사이요?”

“…….”

실장님은 더 묻기를 포기하고 걸었다.

곧 우리 앞에는 커다란 문이 나타났다. 그 옆에는 작은 책상이 있었는데, 카이델 공자가 가서 뭐라고 말하자 거기 있던 황궁 하인이 일어나 사라졌다.

우리는 카이델 공자를 따라 그 문 안으로 들어갔다.

“끕…….”

카이델 공자가 등잔을 켜는 동안, 나는 내 입을 틀어막았다.

턱을 끝까지 쳐들어도 끝이 잘 보이지 않는 높다랗고 드넓은 서가. 눈에 보이는 대부분의 책등에는 사자 문장이 찍혀 있었다.

이곳은 황가의 서고였다.

저 인간이 내가 여기 들어와 보는 게 소원이었다는 걸 어떻게 알고!

그때 카이델 공자가 나를 신경질적으로 불렀다. 그는 내가 긴장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로리샤 양.”

“네! 네. 공자님.”

실장님의 상태도 좋지 못했다. 그는 로브를 입은 두 팔을 쫙 편 채 책장에 달라붙어 있었다.

마치 온몸으로 책을 느끼는 듯이…….

카이델 공자는 그를 쏘아보며 화를 내고 싶은 걸 잔뜩 억누른 얼굴이었다. 그걸 보니 그에게도 인내심이라는 게 있는 모양인데, 내게만 쓰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괜히 헛기침을 하고서 말했다.

“실장님, 어떤 책을 찾으면 됩니까?”

그러자 로이만 실장님은 실연당한 것 같은 얼굴로 책장에서 물러나 대답했다.

“저는 병과 관련된 정보를 찾아보겠어요. 하지만 양은 극히 적을 겁니다. 두 분은 아마타에 관한 건 뭐든 다 뒤져 주세요.”

나는 상황을 몰라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고, 카이델 공자가 이마를 찌푸리며 설명해 주었다.

“아마타족의 땅에서 얻은 기생충을 치료할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내가 설명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예요.”

실장님이 뒤이어 설명했다.

“전쟁사에는 의외로 다양한 일화가 많이 삽입됩니다. 전쟁사란 결국 죽음의 이야기니까, 분명히 단서가 있을 거예요.”

“가능하겠어요?”

카이델 공자가 내게 묻기에 끄덕였다. 그리고 우리는 서가의 세 방향으로 각자 흩어졌다.

카이델 공자는 말하지 않았지만 지금 기생충 감염증에 시달리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뻔했다.

2황자 그레이언 전하.

나는 지금 위험한 일에 연루되어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 내가 황가의 서고에 들어온 것, 그레이언 전하의 건강상 비밀을 안 것 모두 말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황가의 서고 안에 있다는 사실은 내게 두려움만큼의 기쁨을 주었다. 잘만 하면 황실의 비밀스러운 일화를 읽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나는 재빠르게 색인을 찾아보고 아마타족과 관련된 책들을 뽑아냈다.

뒤쪽에서 나직한 대화가 들렸다. 최대한 목소리를 죽인 것이었지만, 고요한 공간에서 나누는 대화가 귀에 쏙쏙 들어와 박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약재상 점원인데 서가 이용이 능숙하군요.”

그거야 백작님의 개인 도서관에 노상 드나들었으니까 그렇지. 백작님의 도서관은 작은 도시의 도서관급이었는걸.

하지만 로이만 실장님에게 나는 약재상 점원이었으니 수상해 보이는 건 당연했다. 아마도 약재상 점원 연기를 계속하기는 힘들어 보였다.

어라.

그러고 보니 카이델 공자는 내가 도서관을 이용할 줄 안다는 걸 어떻게 안 거지……?

저건 생각보다 더 무서운 새끼일지도 모르겠다, 경계감이 확 일어났다.

언제 한번 앉혀 놓고 진지하게 캐물어 봐야지.

카이델 공자는 로이만 실장님에게 태연하게 속삭였다.

“그러게요?”

하. 어이없어서 정말.

심지어 실장님도 그의 대답이 황당한 듯 침묵했다.

자기도 어색한지, 그는 잠시 후 덧붙였다.

“로리샤 양은 닥치면 하더라고요.”

‘……뭐라고?’

상황이 상황만 아니었다면 당장 멱살을 끌고 와 너 여기 좀 앉아 보라고 할 텐데.

하지만 그와 달리 나는 이성이 멀쩡한 인간이었다. 지금은 더 긴급한 일에 매달려야 했다.

곧 실내에는 책장 넘기는 소리뿐이었다. 아마타족과 관련한 기록은 많았지만 기생충이라는 구체적인 색인은 없었다.

나는 슬슬 목이 아파졌다. 이미 새벽이 아닐까 싶었지만, 여전히 팽팽한 두 사람의 긴장감이 느껴져 쉬자는 소리가 안 나왔다.

한참이 더 지났을 때, 카이델 공자가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아마타의 족장이 말하길, ‘그들은 우리의 땅을 거부하니 배 속에서부터의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는 그 어리석음을 매일 조롱한다’고 했다.’”

실장님이 다가가 카이델 공자의 책을 들여다보자 그가 부연했다.

“오십 년 전 아가엘 전쟁 때, 툰바르 전선에서 병사들이 괴질에 걸려 패전을 거듭할 때의 기록입니다. 이 괴질이 그것 아닐까요?”

“가능성이 충분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땅을 거부한다는 건…….”

“영토에 관한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흙!”

“흙이요?”

“어떤 짐승들은 흙을 먹어 기생충 감염증을 억누릅니다. 족장의 말은 분명 그걸 뜻하는 거예요!”

“……이건 우리끼리 알고 있어야겠군요.”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제국의 작은 태양 중 하나인 2황자 전하께 흙을 퍼먹으라니. 기생충 감염만으로도 충분히 쪽팔리는데 말이다.

하지만 지금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그때 우리 세 사람은 동시에 같은 걱정을 하고 있었다.

로이만 실장님이 무겁게 말했다.

“하지만 툰바르산맥의 흙을 구해 오기에는 며칠은 턱도 없는 기간입니다. 공자님.”

나는 거리만 걱정했는데, 시간제한까지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카이델 공자는 투지를 불태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둘기를 띄워 그쪽 주둔군에서 먼저 출발하게 하면 됩니다. ……비둘기에 실을 정도의 양으로는 부족할까요? 여러 마리를 동원하면……!”

“그거 좋은 생각입니다! 많은 양은 필요치 않을 겁니다. 일단 급한 양만 그렇게 수급하고 나머지는 인편에 받으면…….”

“저기…….”

내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지만, 두 사람은 흥분하여 비둘기 한 마리가 옮길 수 있는 흙의 양에 대해 이야기하느라 나를 무시했다.

나는 결국 그들 사이로 가서 말해야 했다.

“아마타족의 흙이라면 구하기 어렵지 않잖아요.”

두 사람은 나를 바보 멍청이 바라보듯이 바라보았다.

“저는 툰바르 산촌 출신이거든요? 그곳 시장에서는 아마타족의 항아리를 팔았어요.”

“로바 양.”

실장님이 나를 말리듯 부르기에 나는 빠르게 말했다.

“사람들은 그 항아리를 ‘벌레 항아리’라고 불렀어요. 거기 곡식을 담아 놓으면 그 안의 벌레가 다 죽어 버렸거든요. 항아리란 흙으로 빚는 거잖아요?”

“…….”

“…….”

“가져오신 전리품 중에 항아리는 없나요?”

두 사람은 눈을 크게 떴다가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카이델 공자가 대답했다.

“많죠. 학자들을 위해 생활 물품까지 수집해 왔으니 토기는 충분해요.”

그는 한결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같이 가겠습니까?”

마음 같아서는 됐다고 하고 싶은데, 황실의 전리품 창고를 구경할 수 있다는 유혹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나는 일부러 새초롬하게 대답했다.

“제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신다면요.”

“물론입니다.”

그는 실장님에게 말했다.

“곧 연구실로 가져가겠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우리는 재빨리 책을 제자리로 돌려놓았고, 그사이 공자는 문을 열고 망을 보았다. 우리는 그의 리드에 따라 서고를 빠져나갔다.

실장님이 돌아간 후, 나는 공자의 뒤를 따라 황궁의 어느 계단을 한참 내려갔다.

“우으아아…….”

무슨 감탄사가 그러냐는 카이델 공자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나는 거기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나는 정말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세대를 걸친 전리품이 쌓여 있는 이 엄청난 지하 창고를 보고 감탄해야 하는 건지, 무서워해야 하는 건지.

이 어두침침한 공간은 제국의 힘의 규모를 웅변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막 전쟁에서 돌아온 당사자 앞에서 그런 말을 하기는 곤란해서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애써 보았다.

그는 내 표정을 다 읽은 듯했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골라 보겠습니까?”

“제가요?”

“제가 툰바르로 밤새워 달리지 않도록 해 줬으니,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죠.”

하여튼 말은 잘해.

나는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아마타족의 물건이 모여 있는 구역으로 갔다. 항아리 몇 개가 선반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

나는 그중에 제일 예뻐 보이는 것을 골랐다.

“기왕이면 귀한 걸로 드리세요.”

내가 오늘의 주인공이 2황자임을 알고 있다는 걸 은연중에 드러내자 공자의 표정이 굳었다.

나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공자님을 밤새워 달리게 만들 분이 제국에서 또 누가 있다고요. 실장님한테 안 가요?”

그러자 카이델 공자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더니 항아리를 옆구리에 끼고 앞장섰다.

로이만 실장님의 방은 지난번에 보았던 약초 정원 너머에 있었다. 실험 사고의 위험 때문인지 황궁에서 드문 별채였다.

우리가 들어가자 그는 소음을 줄이기 위해 항아리를 천으로 감싼 망치질해 깨뜨렸다.

나는 연구실 가득 놓인 연금술 및 약제 도구들을 보고 입을 쩍 벌렸다. 엄청 신기한데 용도는 전혀 알 수 없어서 놀라기만 했다. 그래도 즐거웠다.

실장님은 항아리 조각 하나를 고운 가루가 될 때까지 갈더니 물에 묽게 탔다.

그리고 그것을 유리 단지에 타서 집게로 휘휘 저었는데, 거기서는 꼭 토사물 같은 냄새가 났다.

잠시 후에 집게에는 하얀 실 같은 게 딸려 나와 꾸물럭거렸다. 그것은 몹시 괴로운 듯 몸을 마구 꼬고 있었다.

저게 그 기생충이라면, 저건 진짜 토사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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