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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나를 이틀만 일으켜 봐 로카르드 (22/155)


22화. 나를 이틀만 일으켜 봐 로카르드
2023.03.26.


“내가 왜 이러는 건가? 로이만 실장.”

“송구합니다, 전하. 송구합니다!”

“아니, 그대를 탓하는 것이 아니야. 내 몸이 이러는 것이 미칠 것 같아 하는 말이야.”

“의료원에서 처방한 약은 들으십니까?”

“구토는 멎었어. 하지만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 같아. 적어도 실장이 약초를 태워 줄 땐 이렇지 않았는데.”

“앞으로 그 시술은 불가합니다. 전하.”

그레이언은 힘겹게 몸을 늘어뜨렸다. 로카르드가 찾아온 것은 그때였다.

휘니드가 나가고 로카르드는 축 늘어진 그레이언 앞으로 다가와 앉았다. 그레이언의 상태는 농담을 걸기도 힘들 정도였다.

“많이 힘드십니까?”

“로카르드.”

“말씀하십시오.”

“내가 사고를 쳤어.”

로카르드의 목소리는 나직하고 다정했다.

“이 몸으로요?”

“폐하께 사냥회에 참석한다고 했어.”

로카르드는 침음을 흘리며 등을 뒤로 기댔다. 경직된 얼굴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폐하께서 식사 자리에 불러 갔더니 사냥회를 열 거라고 하셨어. 형님 전하께서는 나를 당연하다는 듯 빼놓으려 하셨고. ‘아직은 더 쉬어야 하지 않겠니, 그레이언.’ 하시더군.”

그레이언은 무시를 견디지 못했고, 1황자는 정확히 그걸 건드렸다.

그러나 사냥회에서 그가 승전 지휘관으로서의 패기를 보이지 못하면 말이 퍼지기 시작하리라.

2황자의 부상이 심상치 않다고. 전쟁이 그를 망가뜨렸는지도 모르겠다고.

로카르드는 애써 농담을 하듯 물었다.

“그래서 ‘아닙니다, 형님 전하.’ 하셨습니까?”

“사냥 나간 적이 오래라 몸이 근질거려 미치겠으니, 일단 여우 한 마리 잡고 마저 쉬겠다고 말씀드렸지.”

“후유증이 심하기는 하지만, 그날 아침에 로이만 실장의 시술을 받으시면…….”

“황실 숲에서 하룻밤 야숙할 거야. 나는 야숙이라면 이가 갈리는데 황궁에서는 여전히 놀이 삼아 하는군.”

1황자가 잡으려는 것이 여우인지 동생인지, 이것은 함정이었다.

“…….”

“그러니까 단 이틀만이라도 나를 멀쩡하게 일으켜 봐. 로카르드.”

로카르드는 상체를 숙이며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가, 그대로 손가락으로 빗어서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일어섰다.

그들은 운명 공동체. 하나가 약해졌을 땐 다른 하나가 강해져야 했다.

“정 안되면 제가 다리라도 부러뜨려 드리겠습니다.”

“……네 충심에 눈물이 나는구나. 하지만 그보다는 영리한 방법을 찾아내길 바라지.”

황실 의료원도 해결하지 못한 정체불명의 병증을 며칠 안에 해결하라니.

침소를 나오며, 로카르드는 내 아버님도 이런 시련을 이겨 내며 첫 번째 사자의 자리를 지키셨는가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이런 일까지 있었으려나 싶은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답이 무엇이건 이것은 그의 몫의 시련이었고, 고작 시작일 뿐이었다.

그는 곧장 휘니드의 연구실로 찾아가 눈을 휘어 접으며 말했다.

“실장님. 2황자 전하께서 며칠 안에 완쾌되셔야 하는데, 어쩌죠?”

황궁 생활이 오래인 휘니드는 카이델 공자의 협박 내지는 압박을 바로 알아들었다.

휘니드는 조용히 일어나 천으로 덮은 유리 단지를 들고 돌아왔다.

그는 로카르드의 의구심 어린 시선에 담백하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전하의 토사물입니다. 보시겠습니까?”

로카르드는 천을 걷으려는 휘니드의 손목을 얼른 붙잡았다.

“아니, 굳이……. 괜찮습니다. 실장님.”

“음. 직접 보시는 것이 도움이 되실 듯한데요.”

로카르드는 휘니드가 진담인지, 불가능한 억지를 부리는 자신을 엿 먹이려는 건지 가늠해 보았다. 하지만 휘니드는 그런 식으로 약은 자가 아니었다.

로카르드는 손을 놓았고, 휘니드는 천을 걷었다. 유리 단지를 조금 흔들자 소화가 덜 된 음식물 덩어리 사이에서 떠다니는 하얀 실 같은 것이 보였다. 그것은 살아서 헤엄치고 있었다.

“기생충입니다.”

“하……!”

“제국인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종류입니다. 아마타족의 것이겠지요. 아마 제 시술이 이놈들을 화가 나게 한 것 같습니다. 시술을 할 땐 억눌려 있다가, 약효가 옅어지면 더 발광하는 거죠.”

“세상에.”

“아마 외부 자극에 위협을 느끼고 번식 속도가 빨라졌을 겁니다. 그래서 지금 전하의 상태가 급격히 악화된 거고요.”

몹시 역겨운 이야기였지만, 로카르드는 그래도 희망적인 소식이라고 생각했다.

“원인을 알았으니, 해결책도 금방 찾을 수 있겠지요?”

“기생충 감염증은 해결책이 분명한 편입니다만, 고작 며칠 가지고선……. 지금 제국의 약제를 차례로 시험해 보고 있으나 듣지 않습니다. 역시 의료원에 넘기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여럿이 모여 의논하게 하면…….”

로카르드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황실 의사들은 황후가 데려온 자들이었다. 그는 내내 황실 의료원에서 2황자를 치료하지 못하는 것인지 치료하지 않는 것인지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참전 영웅인 2황자에게 기생충 감염증이라니, 죽을 때까지 희화화될 말거리였다.

하지만 작은 태양은 절대 희화화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벌레 따위에 괴롭힘당하는 자를 누가 장래의 황제로서 두려워하겠는가.

잠시 침묵했던 휘니드는 확신 없이 말했다.

“저를 황가의 서고에 출입하게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기록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제 무엇을 찾아야 하는지 아니까요.”

“잠시 기다리시죠.”

로카르드는 즉시 일어났다.

황가의 서고는 황족 전용이었다. 휘니드는 로카르드가 그곳의 출입 허가를 얻으러 갔으려니,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가 향한 곳은 2황자궁이 아니라 궁 밖이었다. 그는 곧장 발로아 거리로 말을 달렸다.

* * *

가게 앞에 말이 서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이만 퇴근할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손님은 다른 점원에게 넘기려고 했다.

내 퇴근은 소중하니까.

그런데 입구로 나갔던 점원이 돌아와 나를 불렀다.

“손님이 금발 여점원을 찾는데요?”

지명당할 정도로 내 손님이 생겼나 싶어 싱글벙글하여 나가니, 클록을 뒤집어쓴 남자가 말을 탄 채로 다가왔다.

“로아르 양.”

“……고, 공자님?”

그가 후드를 조금 들어 보였을 때 나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카이델 공자? 이 자식이 여기가 어디라고 진짜!

나는 재빨리 거리로 나와 그를 가게 앞에서 치웠다.

“대체 지금 여기서 뭐 하시는 거…….”

“가면서 얘기하죠.”

나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손목이 이끌려 그의 뒤에 타고 있었다.

뭐? 지금 뭐 하는……? 납치, 납치 맞지? 아닌가? 내가 황궁에 들어갈 때 가명을 써서 체포당하는 건가?

나는 다급히 소리쳤다.

“공자님? 그건 어릴 때 이름이라고 했잖아요! 넘어가 주기로 한 거 아니셨어요? 저 소리 지를 거예요? 악! 아악! 보셨죠?”

하지만 그는 대답이 없었다. 내가 불길함 속에서 눈치를 보자, 그는 그제야 말했다.

“그 편지, 지금 고백하면 봐줄 수도 있어요.”

아마 내 짧은 인생에 머리를 그렇게 빨리 굴린 적은 또 없었을 것이다. 나는 이 긴박한 상황에서도 잡아떼야 한다고 판단했다.

“지난번부터 자꾸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다니까요!”

“쳇!”

카이델 공자는 ‘아깝다!’ 하듯이 혀를 차고는 말했다.

“일 없으면 와서 좀 도와요. 중요한 일이니까.”

“하, 진짜! 방금 공자님이 일하는 사람 납치한 것 몰라서 그러세요? 주인 할아버지가 근태에 얼마나 예민한데!”

“보상하죠.”

그의 등을 안고 있는 탓에, 그의 더운 체온과 긴장감이 함께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지금 그에게는 도움이 필요한 것이 분명했다.

그나저나, 이렇게 미친놈처럼 말을 몰아도 등이 넓으니까 퍽 안정감이 있었다.

“……무슨 보상이요?”

“가 보면 알아요.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

나는 잠자코 납치당하기로 했다. 어차피 끌려가는 중이고, 얌전히 있다가 나중에 그가 말한 포상을 달라고 주장하는 편이 나았다. 카이델 공자 정도 되는 사람이 주는 보상이면 섭섭하지는 않을 테니까.

나는 그제야 내가 얼마나 물욕이 강한 사람인지 깨달았다. 내 심장이 아까부터 빠르게 콩닥거리는 걸 보면 그랬다.

하지만 카이델 공자가 황궁 후문 앞에서 말을 세웠을 땐 심장 마비를 일으킬 뻔했다.

왜 하필 황궁에 데려오는 건데!

말에서 먼저 내린 카이델 공자가 내 허리를 붙잡아 내려 주려 팔을 내밀었지만 나는 머리를 휘휘 저으며 거부했다.

“왜요? 여기서 뭐 하게요?”

내가 말 고삐를 붙잡고 달아날 준비를 하자 카이델 공자는 아차 싶은지 그걸 재빨리 빼앗았다. 마차도 모는데 말을 못 타겠냐고.

“출입 명부 일은 모르는 걸로 하겠습니다. 그날 밤 당신의 숙녀답지 못한 행동도요. 됐습니까?”

음. 나쁘지 않다.

“그 악의적인 편지도요.”

함정이다!

여기서 수긍하면 그걸 내가 썼다는 걸 인정하는 게 된다.

“자꾸 이상한 얘기 하시면 저 진짜 갈 거예요!”

그러자 카이델 공자가 입을 꾹 다물었다. 나는 그제야 잠자코 말에서 내렸다.

카이델 공자는 내게 자신의 클록을 벗어 입혀 준 다음 나를 제3황궁 측문으로 데려갔다. 후드 안에서 은은한 향이 스쳤다.

남의 옷을 입고 남의 체취를 느끼고 있자니 괜히 긴장되었다.

참 여러 가지로 사람 불편하게 만드는 인간.

그는 명부를 남기지 않았다. 얼굴만으로 동반인의 신분을 밝히지 않고 황궁 문을 통과하는 특권층. 카이델 공자는 그런 사람이었다.

나는 그의 뒤를 따르며 정신을 다시 한번 가다듬었다. 황궁에 들어왔다고 정신을 놓았다가 그가 훅 치고 들어오면 큰일이었다. 그는 아무래도 편지 일을 쉽게 포기하지 않을 모양이니 말이다.

우리는 캄캄한 복도를 한참 걸었다. 한 모퉁이를 돌자 어떤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를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보고 동시에 놀랐다.

“로이만 실장님?”

“로바 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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