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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엄마, 나 어른 잘됐지? (21/155)


21화. 엄마, 나 어른 잘됐지?
2023.03.25.


카이델 공자는 딱딱하게 말했다.

“당신이 로아르와 로바 사이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으니 고정된 호칭을 사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딴소리 말고 그런 이유를 해명해요. 내 조치는 그다음에 결정하겠습니다.”

그의 정색한 얼굴을 보니 내 안에서는 공포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제국의 첫 번째 사자의 후계자이자 젊은 전쟁 영웅을 모욕한 사생아.

목이 뎅강 날아가도 할 말이 없지 않은가.

하지만 나는 최선을 다해 담담하게 말했다.

“앞으로 로아르라고 불러 주세요. 로바는 제 밥줄이 달린 거니까 건드리지 마시고요. 이 사생아를 좀 가련하게 여기시죠?”

그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당신은 ‘가련’의 뜻을 잘못 알고 있는 것 아닙니까?”

“아니요, 저는 가련해요. 오늘 엄마한테 제가 어른이 된 모습을 보여 주지 않으면 더 가련해질 테니까 좀 비켜 주세요. 이상한 소리 하지 마시고요.”

그러자 그가 주춤했다.

“모친이 살아 있습니까?”

“우리 엄마는 약초꾼 하다가 제가 열 살 때 툰바르산에 잡아먹혔어요. 공자님이라면 대충 알아들으시겠죠?”

툰바르산맥 끝에서 전쟁을 치른 그다. 그 척박함과 위험을 모를 리 없었다.

“엄마 무덤에 가는 거예요.”

“유감입니다.”

“전혀요. 아무튼……, 꽃 감사해요. 진짜 생일인가 싶지 뭐예요.”

“이 밤에 혼자 어떡하겠다는 겁니까?”

“지금 하인들이 모두 아카데미 손님들 때문에 바쁠 테니까 마차를 몰래 꺼내 보려고요.”

나는 이것도 카이델 공자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이라는 걸 뒤늦게 깨닫고 내 입을 때렸다. 그는 역시 도저히 못 들어 주겠다는 얼굴을 했다.

하지만 별로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가 나를 이해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내가 가방을 들고 마구간으로 향하자 그가 내 가방을 채어 가 앞장섰다. 약초 바구니에 이어 두 번째였다.

“따라와요.”

나는 성큼성큼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 인간, 이상한 습관 있네.’

그는 백작저 마구간을 소리 없이 드나들며 사용인 문 앞에 마차를 준비해 주었다.

“공자님, 도둑질 많이 해 보셨나 봐요?”

순간 카이델 공자의 이마에는 힘줄이 섰다. 그는 내 말을 나쁜 뜻으로 받아들인 것 같았지만, 나는 사실 그의 군더더기 없이 빠르며 조용한 움직임에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그가 마부석에 타려 해서, 나는 얼른 막아섰다.

“지금 뭐 하세요?”

“마차는 누가 몹니까?”

그는 나를 태워 주기까지 해야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웃겨서 진짜.

“사생아 무시하지 마세요.”

나는 그에게서 고삐를 빼앗아 마차에 올랐다. 그리고 멋지게 마차를 출발시켜 별장으로 향했다.

내 뒤편에서, 그가 웃는 소리가 밤공기로 퍼지고 있었다.

* * *

햇살에 눈부셔 몸을 꼼지락댔으나, 아무리 움직여도 눈이 따가웠다. 부스스한 꼴로 몸을 일으켜 보니 커튼이 활짝 열려 침대로 햇빛을 쏟아 놓고 있었다.

벽이며 가구며, 죄다 하얗고 핑크색인 내 첫 번째 방.

새벽에 도착하는 바람에 커튼을 칠 생각을 못 하고 잠든 것이 뒤늦게 생각났다.

창가 작은 책상 위에는 카이델 공자가 준 장미가 꽃병에 꽂혀 있었다.

저걸 가져왔는지도 몰랐는데, 하녀 리사가 꽃병에 둔 모양이었다.

다시 보니 청초한 붉은 꽃잎이 예쁘게 벌어져 있었다. 저절로 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밤이라 꽃잎을 닫았을 뿐, 내일은 아름답게 피어날 거예요. 꽃이란 그러니까.’

나는 내게 붙은 모든 것을 털어 내듯 머리를 휘저었다.

그리고 산발이 된 머리를 단정하게 빗고, 깨끗하게 갈아입은 다음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거기서는 모리아와 리사가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향해 팔을 벌리고 뛰어갔다.

“모리아! 리사! 보고 싶어써어!”

나는 모리아의 풍만한 가슴에 얼굴을 박았고, 리사는 웃었다.

“아가씨 푹 주무셨어요?”

“응응. 푹 잤어. 너무 잘 잤어. 오랜만이야.”

“오신다기에 좋아하시는 걸 준비했는데, 한번 데워서 맛이 어떠려나 모르겠네요.”

이건 내가 이 별장에 처음 왔을 때 맛보았던 소갈비였다.

나는 모리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갈빗대 하나를 뜯고 있었다. 그들은 빙긋 웃으며 각자의 자리에 앉았다.

조금 있다 들어온 남자아이가 웬 걸신들린 여자를 보고 놀라 멈추었다.

“어?”

“어?”

나도 뼈를 문 채 놀랐다. 몇 년 만에 왔더니 리사의 꼬맹이 아들이 거의 나만 한 소년이 되어 있었다.

“얘가 토마야? 네가 토마야?”

“많이 컸죠? 인사드려.”

“안녕하세요, 로아르 양.”

“로리샤라고 해. 너 많이 컸다?”

“네.”

말까지 짧아진 게 저도 이제 남자라는 모양이었다. 같잖아서.

나는 내가 뜯으려고 들었던 새 갈비를 토마의 접시에 놓았다. 토마는 고맙다 소리도 없이 씩 웃으며 고기를 발라냈다.

아침부터 이렇게 고기를 푸짐하게 먹는 일이 흔치는 않았을 테니까.

나는 식사를 끝내고 손까지 깨끗이 닦은 다음에 참나무 아래로 갔다.

나무를 가만히 바라보니 껍질 위로 개미가 줄지어 기어가는 것이 점점 뚜렷하게 보였다. 나는 괜히 민망한 기분에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엄마, 잘 있었어?”

바람에 일제히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가 사라락, 쏟아지듯 들려왔다. 이러다간 개미들의 행진 발소리와 잡담까지 들릴까 봐 겁이 났다.

하지만 아무리 민망해도, 오늘은 용기를 내서 엄마에게 말을 걸어 보고 싶었다.

“엄마, 나 이제 어른이야. 성년식도 정식으로 했어. 남자한테 꽃도 받고, 왜 있잖아.”

엄마에게 거짓말을 한 걸까, 잠시 가슴이 뻐근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의식이란 생각하기 나름인 거라고.

제국을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구한 장군의 출정 연설을 읊었어도, 미샤에게 그 자리는 동기생들이 모인 파티였다.

어젯밤 카이델 공자는 몸에 밴 사회적 관습대로 행동했을 뿐이지만, 그가 준 장미를 받았을 때 나는 무언가가 완성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그 느낌이 거짓이 아닌 한, 내 말도 꼭 거짓이라고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나는 편안한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들어 참나무 잎을 바라보았다.

“나 요즘 약재상에서 일하는데, 주인 할아버지가 나를 좋아해. 언젠간 톨만 약재상은 내가 먹을 거야, 엄마.”

엄마는 대답 대신 산들바람을 보냈다.

“……나 잘했지? 어른 잘됐지?”

뺨이 젖어 드는 게 느껴졌다. 얼른 닦아 냈지만 소용이 없었다.

눈물을 조금만 빼고 이야기를 계속하려고 무릎에 얼굴을 묻었는데 무거운 팔이 내 어깨를 감쌌다. 고개를 들지 않아도 백작님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백작님 품에서 울다가 잠이 든 것 같았다. 깨어나 보니 나는 응접실 소파에서 모리아가 직접 짠 얇은 레이스 담요를 덮고 있었다.

“일어났니? ……저런.”

정원을 손보고 돌아온 듯한 백작님이 내 얼굴을 보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나대로 백작님이 반만 보였다. 눈이 퉁퉁 부어서였다.

나를 본 모리아가 혀를 차며 차가운 물수건을 가져와 내 얼굴에 덮어 주었다. 나는 눈앞이 가려지자 그것을 반 접어 눈을 걷었다.

“백작님, 언제 오셨어요?”

“해 뜨기 전에.”

“아아. ……파티는 잘 끝났고요?”

“그건 관점에 따라 다르겠구나.”

백작님의 대답은 태연했지만, 나는 즉시 눈을 내리깔았다. 나는 그가 내 장난질을 알고 있다고 확신했다.

“관점…… 이요?”

“나라면 9대 황제의 「바다를 향하여」를 골랐을 거다.”

역시.

나는 정원 개미들과 소통하듯 조그맣게 대답했다.

“아……. 그게, 저도 바다 건너 스마일란을 정복하자는 미래지향적인 패기가 마음에 들긴 했는데……, 아무래도 황제 폐하를 건드리는 건 좀 겁이 나서요.”

백작님은 웃음을 억누르느라 호흡이 흔들리면서도 내게 엄한 표정을 지으려 애썼다.

“카이델 공자는 꽤 힘들어하더구나.”

그가 캄캄한 정원에서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던 모습이 떠올랐다.

“…….”

“욕심나는 영식이야.”

그 새끼가 백작님까지 홀렸다니.

하기는 이제쯤에는 나도 그의 인간적 매력에 대해 부정하기 힘들었다.

내가 편지로 자기를 모욕한 걸 알면서도 장미를 꺾어 주고, 마차를 내주고……. 그러면서 동시에 재수 없고.

한마디로 성격이 일관되지 못하다는 거다. 그러고 보니 그것은 단점이다. 나는 그의 단점을 찾아내고서 안도했다.

“미샤는 파티에 만족하고 있다. 그렇다면 나도 슬퍼해서는 안 되겠지.”

그렇게 말하는 백작님은 슬퍼 보였다. 나는 순식간에 죽일 년이 된 기분이었다.

“죄송해요, 백작님……. 그때는 제가 마음이 꼬여서…….”

“밤에 집을 나가지는 마라. 나와 함께 새벽에 나왔어도 도착 시간은 비슷했을 거다.”

“네…….”

나는 기어들어 가는 대답을 하고 수건을 내려 얼굴을 덮었다. 수건은 이미 미지근했지만, 내 표정을 숨길 것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 안에서 나는 조금 웃고 있었다. 마치 미친년처럼.

나는 슬그머니 일어나 방으로 올라왔다. 방에 왔을 땐 엄마도 오랜만에 백작님을 만나 대화를 나누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른이 된 첫날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 * *

휘니드의 시술은 역효과를 불러왔다. 2황자 그레이언은 시술 후에 전신이 훨씬 편안해지고 회복된 느낌이라고 했으나, 밤이 되자 격한 구역질을 시작했다. 전에는 없던 증상이었다.

휘니드는 시술을 중단하고 다른 방법을 찾겠다고 했으나, 그레이언은 그 시술을 받을 때 회복된 것이 분명했다며 한 번 더 하기를 원했다.

구역질이 명현 반응일 가능성도 있었으므로, 휘니드는 한 번만 더 시술을 하기로 했다. 하지만 결과는 더 나빴다.

그레이언은 구토에 이어 속이 뒤집히는 듯하다고 종일 식사를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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