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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나무에서 떨어진 원수 (20/155)


20화. 나무에서 떨어진 원수
2023.03.24.


아니, 떨어진 줄 알았다. 밤하늘을 가린 로카르드 카이델의 얼굴을 볼 때까지는.

‘아니, 금방 나무 위에 있던 사람이 언제…….’

언젠가 미샤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파밧’.

나무 위에서 뛰어내려 나를 받아 안은 카이델 공자는 오만상을 쓰고 있었다.

“이건 대체……. 무슨 영애가 난간으로……. 어이가 없군. 점입가경이야.”

“이, 이거, 놓고…….”

카이델 공자는 자신이 나를 안아 들고 있다는 걸 그제야 깨달은 사람처럼, 나를 던지듯 놓았다.

캄캄한 정원에서, 그는 팔짱을 낀 채 나를 쏘아보았다. 본관에서 은은히 흘러나오는 우아한 음악과 그의 시커먼 기운은 극명하게 대비되었다.

아주 뱅뱅 돌아 버리겠네!

나는 맥없이 입을 열었다.

“여, 여기서…….”

“여기서 뭐 하느냔 말입니까? 정식으로 초대받아 왔습니다.”

“여긴 동관이 아닌데…….”

동관 연회홀에 있어야 할 손님이 내가 지내는 서관 끝에 있을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그는 내 발코니 맞은편 나무 위에서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건 동관으로 가다 길을 잃었다는 식으로 변명할 수 있는 일이 아닐 텐데?

그런데 그가 선수를 쳤다.

“내가 여기 없었으면 당신은 큰일이 났을 텐데요?”

“공자님이 여기 안 계셨으면 제가 떨어지지도 않았을 텐…… 데요.”

내 말은 명백하게 사실이었는데, 지금 상황에서는 상당히 양심 없게 들렸다.

카이델 공자도 내 대답이 마음에 안 드는 듯, 흥분으로 호흡이 약간 거칠어져 있었다.

그는 잔디밭에 처박힌 내 가방을 오만하게 턱짓하며, 마치 나쁜 아이를 나무라듯이 말했다.

“지금, 가출 중입니까?”

“여행……. 하아. 설명한들 믿으시겠어요?”

나는 진이 빠져 내 가방 위에 털썩 앉았다. 그러자 카이델 공자가 더 어이없어했다.

오늘 꼭 이 인간까지 나타나야 했나.

이렇게 또 약점이 잡혔나.

미샤부터 카이델 공자까지, 나는 이 모든 게 어처구니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주절거렸다.

“오늘은 정말 힘드네요. 생일은 매번 힘들지만, 오늘은 특히 더하네요.”

“생일…… 이라고 했습니까?”

나는 헛헛하게 대답했다.

“네. 오늘부터 저는 성년이랍니다.”

그러자 카이델 공자가 짜증스러운 신음을 뱉더니 컴컴한 정원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지만 참 현실감 없는 광경이었다.

잠시 사라졌던 그가 어둠 속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그는 내게 봉오리를 닫은 장미 한 송이를 내밀었다.

“오늘 여성은 꽃을 받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받아요.”

“…….”

이 새끼가 뭐래.

내가 물끄러미 올려다보니 그가 다시 말했다.

“밤이라 꽃잎을 닫았을 뿐, 내일은 아름답게 피어날 거예요. 꽃이란 그러니까. 뭐 합니까.”

나는 그가 내 앞에서 흔드는 장미를 받아 들었다. 그새 줄기의 가시까지 다 떼어져 있었다.

나는 장미를 든 채 잠시 멍해졌다. 이 꽃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인사.”

“가,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로아르 양.”

그러더니 그는 다시 발끈했다.

“그러면 지금 가출이 아니라 독립입니까? 성년이라서?”

“아니, 여행…….”

“여행을 누가 이렇게…….”

“근데 왜 아까부터 자꾸 화를 내세요?”

내가 벌컥 하자, 카이델 공자는 입을 꾹 다물었다가 분한 듯 말했다.

“당신을 찾아왔는데 달아나고 있으니 화가 나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저를 왜요? 그것보다, 방금 나무를 타고 제 방을 들여다보고 계셨어요? 어, 엄청 무례하시네요?”

내 양심은 이렇게 쓸데없는 데서 삑사리를 내고 만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고, 그를 공격해야 하는데 말이 꼬이며 의문형으로 나오고 말았다.

카이델 공자는 내 앞에 서더니 팔짱을 꼈다. 어둠 속에서 올려다본 그의 어깨는 쩍 벌어져 있었다.

전에 봤을 땐 마른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몸의 비율 때문에 생기는 착시였던 모양이었다.

“나한테 용서를 빌어야 할 텐데요, 로리샤 로아르 양. 아니면 로리샤 로바 양입니까?”

“……!”

“가명으로 황궁을 출입하는 게 중범죄인 걸 모릅니까?”

“네……?”

앞으로 로이만 씨에게 갈 수 없다면 내 미래 설계까지 망가진다. 나는 정신이 번쩍 들어 벌떡 일어났다.

나는 그에게 얼굴을 디밀고 단호하게 말했다.

“가명 아니라고요!”

“거짓말까지? 저는 지금까지 당신의 당당함을 장점으로 여겼습니다만, 성년이 된 당신에게는 제 의견을 수정해야 합니까?”

“거짓말 아니거든요? 저는 백작저에 들어올 때까지 엄마 성을 썼어요. 저는 로리샤 로바이기도 해요!”

“…….”

“잡일하며 궁에 드나든다고 소문나서 백작님 이름에 먹칠을 할 수는 없잖아요. 그러잖아도 사생아 때문에 불필요한 말을 듣는 분인데!”

“굳이 따진다면 그 책임은 백작님께 있습니다만.”

“알아요, 아는데…….”

나는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뭐 이런 새끼가 있나 싶었다. 귀족이 맞기는 하는지.

귀족들은 실컷 즐기다가도 정부나 사생아로 인해 추문이 일어나면 상대를 악마 취급했다. 가문의 명예가 더럽혀진 피해를 입은 건 자기들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반대로, 내 출생의 책임이 백작님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을 만난 건 처음이었다. 그것도 백작님을 조금도 비난하지 않는 말투로.

괜히 기운이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가 준 장미를 꼭 쥔 채 다시 가방에 주저앉았다.

“비켜요, 별빛 가려요.”

카이델 공자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내 앞에서 비켜섰다. 어느덧 깊어 가는 밤에 별이 총총했다.

그와 컴컴한 정원에 함께 선 이 시각은 퍽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밤바람에 우리의 흥분도 식었다.

나는 한결 차분하게 말했다.

“여행 가는 중이었어요.”

“이 밤에 말입니까?”

“아침에 출발하려고 했는데……. 그게 마음대로 안 되더라고요. 제가 좀 그래요.”

나는 나름대로 슬픈 이야기를 에둘러 말하고 있었는데, 그가 몸을 들썩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내가 째려보았음에도, 그는 저 웃고 싶은 만큼 웃은 다음 대답했다.

“그것도 당신 소행입니까? 미샤 로아르 양에게 욜린 장군의 ‘위대한 제국 선언’을 시킨 것이요.”

“아이…… 씨.”

나는 딱 걸렸구나 싶어 뱉은 소리가 자백이라는 걸 깨닫고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카이델 공자는 삐뚠 미소를 띤 채로 나를 게슴츠레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계속 부정한다고 통할 상대도 아니고, 나는 그냥 발끈했다.

“아니 왜 그쪽은 그런 것까지 알고 그러세요? 그거 백 년도 더 된 거잖아요!”

“역시 미샤 양을 뒤에서 조종한 건 당신이었어요.”

“무, 무슨 그런 말씀을! 내가 무슨 소리를 들어도 참겠는데……. 미치겠네.”

조종? 그건 치졸한 복수였다. 내 인생에 미샤를 조종할 사치라도 있었으면 내가 좀 더 착한 애로 자랐겠지!

나는 억울해 나도 모르게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카이델 공자는 내가 우는 꼴까지는 보고 싶지 않은지 조금 물러섰다.

나는 자포자기한 기분으로 중얼거렸다.

“저는 매일 아침 일어나면서 오늘은 그 애와 마주치지 않기를 기도한다고요. 조종은 무슨.”

“흠.”

나는 뒤늦게 찾아온 죄책감으로 눈치를 보며 되물었다.

“설마 다들…… 아는 거예요?”

“동기 생도의 소소한 친교 파티 축사에 어째서 옛적 위대한 장군의 출정 선언문을 외는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 생도가 저 말고도 한둘 더 있었습니다.”

“휴우. 뒤는 적당히 바꿨어요.”

“큽……. 크큽.”

그가 소리 죽여 웃자 어두운 정원에서 밤처럼 검은 머리카락이 출렁거렸다. 머릿결에서는 언젠가 미샤가 말한 윤기가 별처럼 발해지고 있었다.

그는 참 상쾌하게, 티 없이 웃었다.

이 순간의 평온함과 온기가 조금 어처구니없이 여겨져서, 나도 웃고 말았다. 잔뜩 소리 죽여, 그러나 몸으로는 폭소를 하듯.

하지만 계속 웃고 있을 수는 없었다. 밤은 짧으니까.

우리가 어쩌다 이 순간 함께 웃는다 한들 그것은 우연일 뿐, 우리 사이의 거리는 멀고 머니까.

나는 가방을 들고 그에게서 슬금슬금 멀어졌고, 그걸 눈치챈 카이델 공자가 크게 혀를 찼다. 나는 그 소리에 놀라 가방을 떨어트렸다.

“왜 그랬습니까?”

왜 그랬을까, 나도 생각해 보았다.

낯선 남자에게 간략한 말로 오늘 내 행동, 그 배경이 된 내 지난 삶을 이해시키는 것이 가능할까?

그런 건 내 능력 밖인 듯했다. 그래서 고작 내가 뱉은 말은 그랬다.

“미워서요. 미샤가.”

미움. 그 단어가 어찌나 초라하게 들리는지.

그런데 카이델 공자가 인상을 썼다.

“미샤 양이요?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 겁니까?”

“……?”

“당신은 나를 편지로 모욕했습니다. 로리샤 양. 나는 이 상황을 좌시할 수 없습니다.”

“……!”

그는 내가 미샤의 연애편지에 끼워 넣은 이합체시 욕을 알아낸 것이다.

그 편지에 암호처럼 욕을 숨겨 놓은 건 물론 나쁜 짓이었다. 하지만 그걸 설마 누가 찾아낼 줄은 몰랐단 말이다!

하지만 찾아내도 미샤를 의심해야지, 어째서 나를 찾아오냐고!

카이델 공자는 내가 짐작할 수 없는 과정을 통해 범인이 나라고 확신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파티를 구실로 백작저에 와서 내 방을 찾아다녔구나.

나는 저절로 침을 꼴깍 삼켰다.

와, 소름 끼치는 새끼. 잘난 데다 똑똑하기까지 해서는. 좋겠다, 너는!

내게는 퇴로가 없었다. 나는 딱 잡아뗐다.

“모욕? 무슨 모욕이요?”

내가 별빛처럼 눈을 반짝이며 그를 빤히 바라보자, 그는 어이없어 숨 막혀 했다.

“하! 로리샤 양, 당신은…….”

“그런데 저는 공자님께 이름을 허락한 적이 없는 걸로 기억하는데요. 영문 모를 말씀을 하시면서 로리샤 양이라니, 무, 무례하신 것 같아요. 좀.”

잘 나가다가 혀를 절어 버렸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뻔뻔한 얼굴을 하려고 애썼다. 증거가 없잖아, 증거가.

유일한 증거라곤 가슴 한쪽을 막대기로 푹푹 쑤시는 듯한 이 양심의 통증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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