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그녀의 초라하고도 찬란한 생일
(19/155)
19화. 그녀의 초라하고도 찬란한 생일
(19/155)
19화. 그녀의 초라하고도 찬란한 생일
2023.03.23.
“미샤. 그날은 로리샤가 성년이 되는 생일이다. 너에게도 선물을 준비하라고 미리 이르지 않았느냐.”
“백작님!”
좀처럼 들을 수 없는 부친의 노성에 미샤가 깜짝 놀라자 백작 부인이 발끈했다.
나는 저절로 쓴웃음을 지었다.
미샤가 나한테 안 입는 드레스를 떠넘긴 건 백작님의 언질 때문이었구나.
미샤는 백작님 앞으로 달려가 간절한 듯이 그의 두 손을 붙잡았다.
“하지만 아버지. 카이델 공자님을 따라오는 생도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폐하의 세 번째 사자님을 만나러 오는 거예요. 다들 파티에 오면 아버지를 만날 수 있는지 몇 번이나 물었다고요! 그들을 한꺼번에 실망하게 할 수는 없잖아요?”
그렇지. 귀족들. 연줄을 해바라기처럼 바라보는.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없는 백작님이 드물게 화를 낸 건 아마 나를 위해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내가 성년이라는 건 몇 개월만 있으면 미샤도 성년이라는 걸 뜻했다.
그런데 미샤의 어떤 부분은 조금도 자라지 않는 것 같았다. 온 세상이 자기로 꽉 차서 눈도 귀도 먼 아이 같았다.
나는 백작님이 제국의 차기 지도자들을 한꺼번에 바람맞히게 할 수는 없었다. 하필 그날 폐하의 호출이라도 있지 않은 한, 그것을 개인적인 모욕으로 받아들이는 가문도 꽤 될 터였다.
“백작님, 저는 괜찮아요.”
나는 최대한 평온하게 말한 다음 내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침대에 벌렁 드러누워 중얼거렸다.
“이 볕에 꺼내 놔도 썩어 나자빠질…….”
미샤를 욕한 것은 아니다. 나 자신의 운에 대한 것이었다.
내 평생 생일 같은 것이 의미 있었던 적은 없었다. 툰바르에서는 가난해서, 백작저에서는 구박받느라.
평소라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텐데, 역시 엄마가 끼니까 가슴이 좀 에는 것 같았다.
나는 몸을 굴려 엎드리며 애써 말했다.
“까짓거 혼자 가면 그만이지, 뭐.”
* * *
로카르드는 자신이 아카데미의 빈 복도에서 미샤 로아르와 맞닥뜨렸음을 깨달았을 때, 달아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그가 카이델로 태어나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생각이었다. 아니, 한 서너 번쯤 특별한 경우는 빼고…….
답장하고 싶지 않은 연서를 보내는 여자란 그토록 불편한 상대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퇴로가 없었고, 전진할 길뿐이었다. 그는 미소를 띤 채 똑같은 속도로 걸었다.
“로아르 양.”
“카이델 공자님.”
미샤는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품에서 하얀 봉투를 꺼냈다.
로카르드의 눈에는 공포와 분노가 동시에 맴돌았으나, 미샤는 눈을 내리깔아서 그것을 보지 못했다.
“저기……. 저희 집에서 파티를 열려고 해요. 기말고사를 치르기 전에 긴장을 푸는 의미에서요. 부디 참석해 주시겠어요?”
미샤 로아르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 아니더라도, 그는 정말로 바빴다.
2황자궁을 드나들며 이중생활을 하는 그는 작은 틈이라도 쪼개 공부해야 했다. 그는 할 일을 두고 시간을 낭비하는 걸 혐오했다.
그는 미샤의 얼굴을 바라보며 거절의 말을 찾다가, 이것이 자신이 원하던 기회임을 퍼뜩 깨달았다.
미샤 로아르의 집에는 로리샤 로아르가 산다.
그 순간 그에게 그것보다 중요한 사실은 없었다.
“초대 감사합니다. 로아르 양.”
미샤는 순식간에 잘 익은 사과처럼 얼굴이 붉어진 채 ‘네!’ 하고 달아났다.
미샤가 만든 파티 초대장은 그것뿐이었다. 로카르드를 위해 손수 쓴 것 한 장.
그녀는 카이델 공자가 움직인다면 아카데미 전체가 움직일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승낙을 제일 먼저 받으러 간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뜻밖에 지체 없이 승낙했고, 그 후로는 일사천리였다.
“다음 주, 저희 집에서 여는 파티에 참석이 가능하실까요? 카이델 공자께서는 가능하시다던데…….”
그러면 대답은 둘 중 하나였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로아르 양.’ 혹은 ‘그러면 폐하의 세 번째 사자님께도 인사드릴 수 있는 건가요? 너무 기뻐요!’
칼린 앙카르트의 답변도 그랬다. 그녀는 단아하게 대답했다.
“세 번째 사자님께 인사드릴 수 있는 기회라면, 기꺼이요.”
미샤는 평소에도 그녀가 좀 어려웠다. 우수한 성적에 인맥 관리에 능한 것 외에도, 또래답지 않은 위엄 같은 것이 엿보이는 탓이었다.
자신의 배경이 그런 칼린에게도 통한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때, 미샤는 뿌듯한 보람을 느꼈다.
하지만 미샤는 자신과의 친분으로 파티 참석을 승낙한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그녀는 단지 백작이 자신이 로리샤의 생일을 잊은 것처럼 취급해서 몹시 속상했다. 파티 일정을 통보했을 때는 백작이 화를 내니 미처 말을 못 했을 뿐이다.
그날 파티가 열리면 로리샤에게도 최고의 요리사가 만든 파티 음식을 나눠 줄 것이다. 그것은 그녀도 기뻐해야 마땅한 일이 아닌가. 아버지의 명령대로 비싼 선물도 이미 주었다.
그래서 미샤 로아르는 자신이 로리샤에게 진짜 호의를 갖고 있다고 믿었다.
* * *
나는 아침부터 밤까지 약재상에서 시간을 보냈다. 파티 준비로 들썩이는 저택의 공기가 싫었기 때문이다.
로아르 백작저 생활 팔 년 차로 접어드는데 파티를 준비하는 소음이 이렇게 거슬리는 것은 처음이었다.
성년이라는 말이 덧붙어서 그런지, 사람이 괜히 예민해졌다.
마침내 내 생일날 오전, 나는 별장으로 출발하기 위해 백작님에게 갔다.
그러자 파티 준비를 위해 조퇴를 하고 돌아와 있던 미샤 년이 나를 보자마자 말하는 게 아닌가.
“마침 잘 왔어, 로리샤! 내가 파티에서 말할 축사를 써 줘. 이번 파티는 내가 주최자잖아.”
“미샤가 이렇게 성장했다니.”
백작 부인은 감격한 듯 손을 맞부딪혔다.
“…….”
나는 너무 기가 차서 입술을 움직이고 싶지도 않았다.
그 물건은 쪼르르 달려와 내 팔짱을 끼며 애교를 떨었다.
“네가 이런 걸 잘한다는 사실을 나보다 잘 아는 사람이 어딨다고. 그렇지?”
그녀의 말은 그 연애편지 이야기를 암시하고 있었다. 어이가 없어 그녀를 쳐다보는데 백작님의 노성이 들렸다.
“미샤!”
우리는 모두 놀라 백작님을 바라보았다.
미샤는 영문도 모르고, 아버지가 자신에게 화를 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 눈시울이 그렁그렁해졌다. 백작 부인은 나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나는 백작님이 말을 잇기 전에 얼른 말했다.
“기다려 볼래? 고민을 좀 해야 할 것 같아.”
“그래! 얼마든지 기다릴게!”
금방 울려고 하던 눈으로, 미샤는 좋아라 대답했다.
나는 미샤의 팔을 떼어 놓고 나왔다. 적당한 때에 말을 잘라 백작님이 화를 더 내지 못한 게 다행이었다.
솔직히 그때는 화가 나지도 않았다.
미샤는 미샤다웠고, 나는 나다웠다.
원하는 것에 거리낌 없는 응석받이와 원하는 걸 입 밖으로 꺼내려면 몇 년쯤 그걸 입속에서 씹고 굴려야 하는 사생아.
그렇게 별것 아닌 태생적 차이.
지금까지 내 일상은 그런 차이 속에서 굴러갔고, 오늘도 그런 하루일 뿐이었다.
이런저런 일에 의미를 부여해 감정을 일으키는 건 나 스스로를 갉아먹는 일이다.
나는 방으로 가는 대신 백작님의 도서관으로 향했다.
서가를 죽 둘러보니 책 한 권이 눈에 띄었다.
『제국의 위대한 연설들』
나는 그 책을 뽑아 내 방으로 돌아왔다.
나는 연설문을 작성하려고 고민한다고 한 적 없다. 내가 한 고민은 연설문을 어느 책에서 베낄까 하는 것이었다.
책장을 뒤적거리니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지금 위대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조금 뒤, 내가 축사를 적은 종이를 건네주자, 미샤는 한술 더 떠 자신이 연습하는 걸 봐 달라고 했다.
이걸 읽을 때 어느 샴페인을 드는 게 더 어울릴지 아직 결정을 못 했다고 찡그리면서.
“벵가뤼에는 색상이 곱고 쿠리앙은 거품이 예쁜데…….”
나는 몹시 차분하게 물었다.
“미샤, 오늘 내 생일인 것 아니?”
“응. 알지. 벌써 선물도 줬잖아. ‘우리는 지금 위이대한 시대에’…….”
미샤는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과장된 목소리로 연설문을 읽기 시작했다.
나는 그 알량한 벨벳 드레스를 미샤가 보는 데서 태워 버리는 상상을 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런 애에게 화를 내서 뭐 하나.
그때 하인이 찾아와 마부의 말을 전했다. 말을 마차에 매어 놓은 지 오래되어 더 기다릴 수가 없다고, 지금 출발할 것이 아니면 말을 다시 마구간으로 보내 쉬게 해야 한다고 했다.
미샤는 축사를 읽느라 하인은 신경도 안 쓰는 듯하더니 말했다.
“너 어디 가려고 했었어? 아무튼 잘됐다. ……로리샤. 로리샤? 어딜 가는 거야!”
나는 그대로 일어나 미샤가 절대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몸을 피했다. 백작님의 도서관으로.
나는 거기서 새 약초학책을 읽다가 잠이 들었다.
* * *
책상에 잠깐 엎드렸다 일어났다고 생각했는데 밖이 캄캄했다. 멀리서 아름다운 선율이 들려왔다.
파티가 이미 시작된 것이다.
“이런 썩을…….”
나는 조용히 읊조리며 밖을 바라보았다.
지금 모든 하인은 손님의 마차를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을 테니 내 마차를 내어줄 여유가 없을 것이다.
나는 천천히 걸어 내 방으로 돌아갔다.
아침부터 침대 위에 놓여 있던 짐 가방을 바라보다가, 내가 엄마를 만나러 혼자 가지 못할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짐 가방을 들고 발코니로 나가 난간에 얹었다. 가방을 아래로 던진 다음 나도 뛰어내리려고 난간에 걸터앉았는데, ‘하!’ 하고 세상 어이없다는 코웃음이 들렸다.
그리고 나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어둠 속, 내 발코니 건너편 나무 위에 앉아서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어? 어어……!”
나는 너무 놀라 동작이 꼬이면서 균형을 잃고 난간에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