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그레이언의 병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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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그레이언의 병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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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그레이언의 병증은
2023.03.22.
“시간을 두고 지켜보겠습니다.”
“로카르드, 너야말로 내게 맹목적인 믿음을 요구하는구나.”
“전하도 아슬아슬한 것 즐기시잖아요. 저놈을 믿을 수 있나, 똑바로 하고 있나, 애타는 기분이요. 그리고 저희 집도 돈 많습니다.”
“미친놈.”
그레이언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로아르 백작의 적녀는?”
“…….”
로카르드는 내심 로아르 백작을 존경했다.
칼날 위 같은 황제의 시야 안에서, 평생 그 정도의 균형 감각을 발휘하며 처신하기는 누구라도 쉽지 않았다. 입지상 때로 백작과 대립하는 카이델 공작마저도 그렇게 평가하는 바였다.
그런 로아르 백작가의 영광이 이번 대에서 끝장났다고 말하는 건 절대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로카르드가 말을 고르는 동안 그레이언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왜? 문제 있어?”
“예뻐요.”
“제길.”
그레이언은 미샤 로아르의 장점이 외모뿐이라는 말을 알아듣고 작게 욕지거리를 했다.
아무리 몰린 입장이라지만 사생아가 아쉬워질 줄이야.
로카르드는 기왕에 말이 나왔으니 잡담을 이었다.
“로리샤 말입니다.”
“왜?”
“지금 전하를 치료해 드리고 있는 게 그녀입니다.”
“무슨 소리야?”
“로이만 실장에게 약초를 대는 게 그녀예요. 그쪽에도 조예가 있는 모양입니다. 아마 그걸로 백작가에서 독립하려는 것 같아요. 바닥부터요.”
바닥부터. 로카르드가 그렇게 말했을 때 그의 가슴에 얼마간 남아 있던 적대감마저 흩어져 사라졌다.
툰바르산맥에 도착한 몇 개월간, 그들은 적보다 먼저 생존의 밑바닥과 싸워야 했다. 온화한 수도에서 지내던 그들에게 험준한 자연 속 생존은 그것부터 전쟁이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이 바닥에서 기어오르는 일이 얼마나 처절한지 이해했다. 그래서 느끼는 어처구니없는 동질감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녀를 용서했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도발은 엄연한 대결을 성립시켰으며, 카이델은 결코 대결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은연중에 정보를 흘려 2황자가 로리샤에게 익숙해지게 만들려는 생각도 바뀐 적이 없었다.
그레이언이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백작도 속이 적잖이 타겠군.”
로카르드는 동의의 뜻으로 침묵했고, 그레이언은 몸통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로이만을 들라 해. 이제 슬슬 열기가 내려와.”
로카르드가 명령을 전하러 일어났을 때 문이 벌컥 열렸다. 문을 지키는 황궁 하인이 어쩔 줄 모르고 바깥에 서 있었고, 밀리오라 황녀는 빠른 걸음으로 거침없이 들어왔다.
“오라버니, 몸에다가 무슨 이상한 사술을 쓰고 있다면서?”
“사술이라니, 로이만의 처치야.”
“그럼 연금술? 금은 이제 안 만든대?”
그레이언은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쳤다.
“로이만! 뜨겁다!”
휘니드는 소리 없이 로브를 날리며 달려 들어와 거의 다 타 내려 간 약초 덩어리들을 떼어 접시에 담았다.
타가르의 유일한 황녀는 그새 오라버니에게 관심을 잃은 듯 로카르드를 돌아보았다.
“로카르드! 여전히 잘생겼네?”
“로카르드는 폐하의 사자의 아들이다. 예를 갖춰 대하란 말이야.”
그레이언이 끼어들었으나 밀리오라는 들은 척하지 않았다. 그녀는 가지런한 은발 끝을 출렁이며 까르르 웃었다.
“로카르드 카이델이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로카르드 공자? 황녀궁에 와서 차를 한잔해요. 지금은 안 되겠고, 다음에!”
그레이언이 괴로운 신음을 흘렸으나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영애들이 얼마나 난리인지 알아요? 전쟁 영웅이 아카데미 수석까지 해? 욕심이 너무 많은 거 아니에요? 공자가 온다면 내 티 파티가 미어져 나갈 거야. 참석 못 한 애들은 막 울겠지? 웃기겠다. 호호호.”
“여전하십니다. 전하.”
“여전히 철없다고요? 알아요. 하지만 공자는 나보다 더 철없고 못된 오라버니도 잘 보필하고 있으니, 나 정도야 문제없겠지. 안 그래요?”
로카르드가 빙긋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하자 그레이언이 가운을 여미며 소리쳤다.
“꺼지지 못해? 로카르드가 네 장난감인 줄 알아?”
“하! 그럼, 오라버니 장난감이야?”
그 말에 그레이언이 로카르드를 빤히 바라보자 밀리오라도 따랐다.
그레이언은 짧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로카르드는 신음을 내며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었고, 휘니드는 자신의 도구를 챙겨 조용히 사라졌다.
“사술이니 하는 소리는 어디서 들은 게냐?”
그레이언의 물음에 밀리오라는 동그란 이마에 주름을 잡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어디겠어?”
“…….”
“황후 폐하께서 2황자가 회복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폐하께 꼰질렀다던데?”
“어째 말법이 전쟁터를 구르는 병사와 같으냐.”
“뭐 어때, 황궁에서 나한테 신경 쓰는 사람이 누가 있다고. 폐하 눈치 보는 건 오라버니뿐이잖아. 큰 오라버니는 황후 폐하가 알아서 다 해 주시고.”
그 발언에 그레이언의 기색이 예민해지자 그녀는 로카르드에게 말했다.
“어차피 비밀도 아니잖아요, 안 그래요? 그래서, 내 티 파티는 언제 올 거예요?”
“아카데미 방학 때나 시간이 날 듯합니다.”
그레이언이 사납게 끼어들었다.
“아카데미가 망해도 로카르드는 네 티 파티에 안 가. 돌아가라.”
“치사해서 정말! 키울 새끼 사자가 없는 사람은 이렇게 서러워요?”
밀리오라는 로카르드를 향해 예쁘게 웃으며 빈정댄 다음, 그레이언에게 소리쳤다.
“아무튼 빨리 나아! 보는 나까지 조마조마하게 하지 말고.”
형식은 어떻든 황자녀 간의 우애가 보기 아름답다고, 로카르드가 따뜻한 미소를 띠자 밀리오라가 말했다.
“오해하지 마세요, 큰 오라버니의 방패막이가 필요해서 그러는 거니까. 큰 오라버니가 작은 오라버니 목을 베려고 애쓰는 동안은 나는 안전할 것 아니에요?”
밀리오라가 들어올 때처럼 경쾌한 걸음으로 나가자 잔향이 남았다.
그레이언이 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게 정말……. 너 보기도 민망하군.”
“타가르 황가의 꽃은 생기가 가득합니다.”
밀리오라를 꽃에 빗댄 로카르드의 대꾸가 너무 세련되어서, 그레이언은 너도 꺼지라고 손을 저었다.
지난번 전쟁 보상안 발표 건으로 빈정이 상한 황후는 이제 그레이언의 건강 문제를 공격하고 있었다. 방어가 까다로운 문제였다.
“로이만 실장의 시술이 효과가 있는 것 같으십니까?”
“아마도. 네가 꺼지면.”
로카르드는 미소 지으며 예를 올리고 2황자의 방을 나왔다.
그는 출궁하는 대신 한참을 걸어 제3황궁으로 향했다. 입궁한 김에 로리샤 로아르가 얼마나 자주 황궁에 드나들었는지 알아 두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출입 명부에는 로리샤 로아르가 없었다. 잠시 당황했던 그가 명부를 뒤져 발견한 것은 다른 이름이었다.
‘로리샤 로바’. 출입 기록은 단 한 번이었다.
“하……. 가명까지?”
4. 화해
미샤는 주말마다 백작저로 돌아왔다. 입시 준비를 도왔던 다섯 중 세 명의 가정 교사가 다시 고용되었는데, 그들은 미샤의 달라진 학습 태도를 보고 겁을 먹을 정도였다.
계속 잘 보이려 애쓰는 걸 보니 아마 카이델 공자는 편지에 답을 하지 않은 것 같았다. 미샤 말마따나 현명한 판단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나도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사랑이 그렇게 대단한 걸까?’
그러고 보면 나는 사랑에 회의적이었다. 백작님과 엄마의 그것이 남긴 건 대를 이은 고통뿐이었으니까.
그렇게 별일 없이 시간이 흐르자, 나는 편지 사건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처음부터 나 혼자만의 장난이었으니까.
내 성년 생일은 어느덧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고, 백작님은 나를 찾아와 물었다.
“성년식은 어떻게 보낼지 결정했니?”
파티를 열어 선물을 모으고, 남자들에게는 꽃을 받고. 나는 그런 성년식은 관심 없었다.
나는 고민한 답을 말했다.
“별장에 가고 싶어요.”
“별장?”
“엄마 뼈를 거기 묻었잖아요. 엄마한테 저도 이제 어른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열 살 때 백작 부인에게 갑자기 끌려오는 바람에, 나는 엄마의 유골 항아리를 가져오지 못했다.
내가 처음 백작님을 따라와 머물렀던 별장에서 나를 돌봐 주었던 하녀 모리아는 혹시 몰라 백작저로 내 짐을 보낼 때 그것을 빼놓았다.
정말 현명한 결정이었다. 그때 유골 항아리가 함께 왔다면 백작 부인이 어떻게 했을지 모른다.
그래서 엄마는 지금 별장 마당가의 보기 좋은 참나무 아래 잠들어 있었다.
백작님은 목소리가 살짝 잠겼다.
“좋은 생각이구나.”
“그리고……, 백작님도 함께 가 주시면…….”
왜 이렇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지, 목소리가 다 잠겼다.
평소라면 백작님에게 이런 부탁은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가 백작님에게 나를 맡기기를 원했다는 걸 알고 나니 그와 함께 가고 싶었다.
이 부탁이 내가 백작님에게 감히 아버지의 역할을 요구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평생에 딱 한 번 성년이 되는 날에는 이런 무모함도 용서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함께 가자. 로리샤. 오전에 출발하자꾸나.”
백작님은 선선히 대답하고는 내 머리를 차분히 쓰다듬어 주고 돌아갔다.
나는 저절로 한숨을 쉬었다. 건강한 백작님에게 유산 달라는 소리는 뻔뻔하게 잘도 했으면서, 몇 시간 거리에 동행해 달라는 말이 왜 그렇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지.
그래도 어떻게든 말하고 허락을 받고 나니 기분이 좋았다. 나는 기분 좋게 잠들었다.
하지만 내 운이 그렇지.
주말에 백작저로 돌아온 미샤는 식사 자리에서 다음 주 저녁에 아카데미 1년 차 생도들을 초대해 파티를 열기로 했다고 했다.
내 생일날에 말이다.
백작 부인은 들떠서 물었다.
“누가 참석하니? 내가 아는 가문의 자녀들이 있을까?”
“카이델 공자님이요!”
“어머나, 미샤!”
미샤는 자신이 승전 영웅이라도 된 듯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분이 승낙하시니 모두 참석하겠다지 뭐예요?”
“잘됐구나! 잘했어!”
백작님이 화를 낸 것은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