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기이한 연애편지 (17/155)


17화. 기이한 연애편지
2023.03.21.


로카르드는 이 대화의 목적을 깨닫고서 편안하게 미소 지었다.

그녀는 졸업 때라고 말했지만, 로카르드는 칼린 앙카르트에게 그만한 인내심이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벌써 이렇게 그에게 말을 걸어오지 않았는가.

“그건 2황자 전하께서 결정하실 겁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많은 눈이 아카데미를 주시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런, 잘해야겠네요. 그 책, 제가 빌려 가도 될까요?”

“기꺼이.”

로카르드는 『툰바르산맥의 전설』을 칼린에게 정중하게 건넸다. 그들은 동시에 예를 갖추고 헤어졌다.

로카르드는 그녀가 그 책을 빌려 간 것이 이번 전쟁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가 겪은 일들은 2황자도 겪었을 터, 향후에 2황자 그레이언과의 대화를 풍성하게 하려는 준비였다.

툰바르의 사정을 아는 영애는 거의 없을 테니 그런 지식은 그녀를 단연 돋보이게 할 것이다.

로카르드는 책장을 다시 훑어보다가 적당한 책을 집어 서가를 빠져나왔다. 그때, 접수 책상을 탕 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돌아보았을 때 보인 것은 입구로 달아나는 여성 생도 제복 끝자락뿐이었다. 탕 치는 소리는 그의 주목을 끌기 위해 일부러 낸 것이 틀림없었다.

로카르드는 빈 접수 책상에 놓인 핑크색 편지 봉투를 발견하고 집어 들었다.

“…….”

* * *

그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책상에 다리를 올리고 앉은 다음, 느긋하게 봉투를 열었다.

여성 생도가 몰래 놓고 간 핑크색 편지 봉투는 다른 것일 수 없었다.

대명문가를 이끌 무거운 운명을 타고난 로카르드 카이델은 걸음마를 할 때부터 쉼 없이 수련해 왔다.

그의 어린 시절은 가혹하다고 불리고도 남을 만한 것이었으나, 그렇다고 이런 종류의 설렘까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편지를 뜯은 그의 얼굴은 즐거움으로 환해졌다. 하지만 그 빛은 점차 꺼져 갔다.

“……

약한 희망 속에서…….

교가……. 한 마리

처럼 제 심장은……. 그럴 여지가

어들기 어렵다 한들, 저는 겨울을 나는 들꽃처럼 굳센 희망을 품으려고 합니다. 미샤 로아르 드림. ……하!”

로카르드는 편지를 구겨 쥐고 벌떡 일어났다. 그가 이토록 평정을 잃은 것은 오랜만이었다.

그러다 그는 문득, 쥐고 있는 편지를 다시 펼쳤다.

‘겨울을 나는 들꽃’. 그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한 것은 그 부분이었다.

그는 툰바르산맥 빈터에 어김없이 자라는 들꽃 로리샤를 알고 있었다. 그 구절을 읽자마자 그의 머릿속에는 하얗고 작은 꽃밭이 펼쳐졌다.

“하…….”

그는 대충 편 편지를 부들거리는 손으로 붙잡고 각 줄의 맨 앞 글자만 소리 내어 읽었다.

“카, 이, 델, 미, 친, 새, 끼. ……하. 어처구니가 없군.”

그것은 교묘한 이합체시였다.

로카르드는 편지를 자기 손으로 만지고 있음에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을 죽이려 덤벼드는 아마타족의 욕설은 수없이 들었지만, 이런 기괴한 기분은 처음이었다.

“봉투는 왜 핑크색인 거야!”

로카르드는 이제는 헛웃음만 나왔다. 첫 글자의 비밀을 발견한 것이 먼저인지, 로리샤 꽃을 떠올린 것이 먼저인지는 그도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이 편지를 미샤 로아르가 쓰지 않았다는 것만은 목숨을 걸고 확신했다. 이 편지의 유려한 문장과 교묘한 모욕은 그녀의 것일 수 없었다.

범인은 태양처럼 분명했다.

로리샤 로아르.

로리샤 꽃에 대한 단서를 버젓이 남긴 건 그에 대한 도전이거나 무시가 분명했다.

로카르드는 미샤의 편지를 태우며 조용히 읊조렸다.

“로리샤 로아르. 도전을 받아 주지.”

* * *

로카르드는 주말 오후 늦게 2황자궁에 들었다. 그가 도착했을 때 휘니드는 2황자 그레이언에게 아마타족의 치료법을 시술하고 있었다.

아마타족은 말린 풀을 단단하게 뭉쳐 사람의 피부에 얹고 불을 붙였는데, 그러면 그것이 향처럼 느리게 타며 약효를 냈다.

로카르드는 그것을 신기하게 여겼었는데, 2황자의 회복이 지지부진하자 약제실장 휘니드에게 그에 관해 말해 주었다.

2황자의 검상은 순조롭게 회복하고 있었으나 그는 때로 지독한 무기력증과 현기증을 느끼며 기력을 차리지 못했다.

로카르드는 아마타족의 풍토병 감염을 의심했다. 적의 치료법을 휘니드에게 알려 준 것도 그 때문이었다.

휘니드 로이만은 본래 연금술사로, 연금술 연구의 자유를 보장받는 대신 황실 약제실을 책임지고 있었다.

그는 조용한 사람이었지만 새로운 실험이라면 열광했고, 새 치료법을 열심히 연구했다. 오늘은 그가 연구한 방법을 그레이언에게 처음으로 시험하는 날이었다.

로카르드는 맨 등 여기저기에 불붙은 약초 덩어리들을 올린 그레이언을 바라보며, 저 재료를 로리샤가 배달해 왔을 것이라는 사실에 새삼 치미는 기분을 느꼈다.

휘니드가 조용히 말했다.

“뜨거우면 즉시 말씀하십시오, 전하.”

“괜찮아.”

그레이언은 로카르드를 엎드린 채 돌아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 방법을 제안한 건 너였잖아. 이상한 표정 짓지 말고 그냥 앉아.”

“아니, 전하 때문이 아니라……. 아닙니다.”

로카르드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가, 그토록 사악한 로리샤 로아르라면 약초라고 장난치지 못할까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로이만 실장님, 약초 검수는 철저하게 하셨습니까?”

“약초는 최상품만 사용했고, 독극물 검사는 가공 단계마다 했습니다. 모든 걸 처음부터 끝까지 제 손으로 했으니 걱정 마십시오.”

“역시 실장님이십니다.”

생각해 보면 괜한 의심이었다. 세 번째 사자의 딸―자신은 부득부득 사생아임을 강조하지만―이 2황자를 시해하여 얻을 이득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약초는 충분하시고요?”

로카르드의 목소리가 퍽 신경질적이어서, 휘니드는 조금 의아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재료는 충분합니다. 이번 시술이 효과가 있다면 넉넉히 확보해 둘 예정입니다.”

로리샤 로아르를 통해서?

로카르드는 2황자 전하의 건강을 위해 자신이 직접 약재상에 다녀오겠다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오는 것을 겨우 억눌렀다.

로리샤 로아르를 먼저 찾아가 따지는 것은 그의 자존심이 용서하지 않았다. 그녀가 먼저 그를 찾아와 빌게 만들어야 했다.

‘이걸 어떻게 갚아 주지…….’

그 생각을 깨트린 건 그레이언의 목소리였다.

“아카데미는 어때?”

2황자가 사담을 시작하자 휘니드는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로카르드는 그레이언이 자신의 학교생활을 궁금해하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몇 명 그럴듯한 싹이 보여서 지켜보고 있어요. 하지만 아시잖아요. 고작 1년 차 생도들입니다.”

“앙카르트 자작의 딸이 뛰어나다던데. 너와 호각이라고.”

로카르드의 얼굴에 조금 전보다 더 짙은 신경질이 떠오르자 그레이언이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칼린 앙카르트. 뛰어나죠.”

“그런데?”

그레이언은 엎드린 채 고개를 돌리는 것이 피곤하여 조금 찌푸렸다.

로카르드는 양손으로 천칭 저울의 접시를 흉내 내며 대답했다.

“벌써 제게 접근했어요. 조심스럽게 무게를 달아 보면서.”

그레이언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야망이 큰 우등생이 먼저 자신을 선택했다는 사실이 주는 즐거움이었다.

“어디 한번 잘해 봐.”

“전 적극적인 여자 별로입니다.”

“취향인 줄 알았는데?”

“…….”

로카르드의 침묵에 그레이언이 눈을 가늘게 떴다. 시술의 통증 때문은 아니었다.

“로카르드. 네게 만만한 자들만 골라 내게 바칠 참인가?”

저것도 풍토병일까.

부상 이후 그레이언은 부쩍 조바심이 늘고 의심이 많아졌다. 로카르드는 때로는 전투보다 그것을 다루기가 더 어렵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는 중요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황족에게는 위협으로 보이지도, 약하게 보이지도 말 것. 생존을 담보로 잡힌 그가 원하는 것을 얻게 하는 방법이었다.

“전하는 맹목적인 충성을 원하시는 게 아니었습니까?”

“바로 그래서 지금 너를 의심하고 있잖아, 로카르드.”

퍽 예민한 말투의 질문이었으나, 로카르드는 여유로운 태도로 대답했다.

“앙카르트 자작이 아마타전에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 벌써 잊으셨습니까?”

앙카르트 자작은 아마타족이 제국에 철광석 수출을 중단하겠다고 통보했을 때 일어난 전쟁론에서 전쟁 반대파를 독려했다.

반대파의 주장은 툰바르산맥이 험준하여 그곳에서 외부 세력이 승리한 적 없다는 것이었지만, 자작의 속내를 알기는 어렵지 않았다.

북부의 아마타족의 철광석 수입이 중단되면, 제국은 부족한 물량을 남동해의 해상 무역 항로를 통한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앙카르트 자작에게 엄청난 이윤을 약속했다.

로카르드는 제국보다 개인적 이익을 우선시하는 자는 일시적인 연합의 대상은 될 수 있어도 혈맹은 될 수 없다고 여겼다.

그는 황제를 발판으로 자기 욕망을 채우려던 자들의 말로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들의 할아버지 대에 있었던 황제의 숙청은 절대 권력의 지근에서 추락하는 자의 꼴이 얼마나 처참한지 증명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레이언 또한 그러한 잔인함과 단호함에 있어서는 선대 황제 못지않을 터다.

로카르드는 그 틈바구니에서 책임을 추궁당하거나 피해를 입을 생각은 없었다.

로카르드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레이언은 속 좋게 대답했다.

“그것은 아비의 입장이고.”

“그녀가 다른 입장을 취하리라고 어떻게 확신하셔서요.”

“난 돈 많은 여자가 싫지 않아. 내 모후를 봐. 외조부 때의 사업 인맥으로 귀족들을 규합하더니, 학교를 세워 행정관을 직접 길러 내기 시작하셨지. 그것이 귀족원과 관리들에게 끼치는 힘을 보라고.”

한쪽으로 돌아간 목이 피로했는지 그레이언은 농담조로 말하고는 똑바로 엎드렸다.

로카르드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는 그레이언 황자가 오를이 가진 황후의 후원을 부러워하는 마음을 이해했다. 하지만 황후와 칼린 앙카르트는 경우가 달랐다.

황후는 유구한 명문가 출신이었으나 지방 출신 앙카르트 자작은 아직 고급 사교계에 발을 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황후 가문의 1골드와 앙카르트 자작의 1골드는 값어치가 달랐다.

16793994209636.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