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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소심한 복수 (16/155)


16화. 소심한 복수
2023.03.20.


토할 뻔했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미샤는 얼굴을 금방 발갛게 달궜다. 시선을 내리깔며 피하는 모습이 영락없는 모지리였다.

저런 이기적인 계집애도 하는 게 사랑이라면, 사랑은 분명 자기만족을 그럴듯한 방식으로 착각하는 행위에 붙인 이름인 거다.

나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저한테 든 다섯 명의 가정 교사 비용이 얼마인지나 아는지. 그렇게 아카데미에 들여보내 놨더니 입학하자마자 고작 한다는 게 연애질이다.

그걸 위해 별것 아닌 것처럼 내 인생을 휘두르려 들면서.

하지만 미샤는 천진하게 떠들기 시작했다.

“키가 크셔. 검정 머릿결에 햇살이 부딪히면 마구 반짝거려! 얼굴은……. 그걸 뭐라고 설명하지? 잘생겼어. 잘생겼는데, 그냥 잘생긴 게 아니라…….”

나도 그자의 외모에 대해서는 별로 반박할 마음이 없다.

단지 그런 얼굴은 카이델 공자가 아니라, 석상에나 새겨서 그것을 황궁 앞에 세워 두는 편이 공익에 부합한다고 생각할 뿐이다.

“됐어, 넘어가. 내가 그림을 그릴 것도 아니잖니?”

“아아, 네가 그분을 한 번만 봤다면 편지를 백 장이라도 쓸 수 있었을 텐데!”

응. 고소장은 한 백 장 쓸 수 있겠더라.

“남자 생도들 체술 시간에 봤는데, 난 환상을 보는 줄 알았어.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니까?”

“왜?”

“파밧, 파바밧! 교사들도 놀래서 같이 박수를 쳤다니까?”

“파밧……. 하아……. 뭐, 넘어가자. 가병을 이끌고 참전한 기사야. 당연하겠지.”

“얼마나 인기가 많으신지 몰라. 모두에게 늘 다정하시거든. 생도들은 싸움이 생기면 그분에게 가. 그분은 공정하고 현명하니까.”

이번에는 너무 나갔다. 그자가 다정해? 공정해? 현명?

콩깍지가 이렇게 무서운 거라니, 나도 하나 배웠다.

그게 아니라면 로카르드 카이델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식적인 인간이 분명했다.

누가 누구더러 연극을 한다고?

“공부는 또 얼마나 잘하시는데! 아카데미에 돌아오자마자 일등만 하고 계셔. 나 같은 건 그분 발치에도 다가갈 수가 없다니까! 다들 그분을 사랑해.”

그렇게 말하는 미샤는 눈가는 순식간에 촉촉해졌다.

설마.

“너, 설마 그 공자님 때문에 공부하는 거야?”

“나 성적도 올랐어. 또 꼴찌지만, 그래도 점수는 지난번보다 많이 올랐……. 흡! 난 몰라!”

제 입으로 성적을 까발린 미샤는 소파 위로 털썩 엎어져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꼴…….”

나는 그제야 백작님의 침울한 기색을 이해했다.

백작님은 천사가 아니면 성직자가 분명하다. 내 딸이 어디 가서 꼴찌씩이나 해 가면서 내 얼굴에 똥칠을 한다면 나는 절대 모르는 척해 줄 자신이 없었다.

아주 그냥…….

나는 우느라 들썩거리는 미샤의 엉덩이를 바라보다 이대로 화장실이나 갈까 생각했다.

하지만 미샤의 속내를 알아 버렸으니, 난 이미 너무 깊게 들어와 있는 셈이었다.

미샤는 소리쳤다.

“내가 그래서 공부를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하나도 없는데, 그래도 계속 읽고 계속 외웠어. 피부가 상하는 걸 참으면서!”

피부가 상했다니, 그거참 힘들었겠다.

나는 한숨을 푹 쉬고 일어나 물었다.

“백작 부인, 진짜 책임질 거야?”

미샤는 몸을 일으키더니 눈물을 쓱 닦았다. 그리고 몹시 단호하게 끄덕였다.

“약속해!”

나는 미샤 로아르에게서 처음 보는 투지에 더 할 말을 잃었다.

“나 저런 옷 진짜 필요 없어.”

“알았어. 알았다니까.”

내가 책상에 앉자 미샤는 나를 흘끔거리며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눈앞에서 흔들리는 사탕을 본 아이와 같은 얼굴이었다.

나는 정말 막막했다.

아예 상대가 누군지 몰랐다면 상상력을 발휘해 쓸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눈앞에는 기분 나쁘게 빙글거리는 카이델 공자가 떠올라 간지러운 말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우, 씨X.

나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펜을 움직였다. 편지를 완성하는 데는 내 예상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이 걸렸다.

나는 그것을 잉크가 다 마르도록 쏘아보다가 미샤에게 손짓했다.

그녀는 얼른 책상으로 달려왔고, 나는 그녀가 편지지를 받으려 할 때 다시 잡아챘다.

“너, 꼴찌라면서 공부 안 하고 이러는 거 괜찮다고 생각해?”

“하지만, 사랑이 내 힘인걸!”

이 우라질 것이…….

미샤는 내 손에서 편지를 빼앗아 가더니 얼른 열어 읽었다.



이델, 영웅이라 불리는 새끼 사자님께.

마음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고민하며, 저는 깊고도 긴 밤을 보내곤 했습니다.

파에서 들여온 향도 당신 인품의 향기보다 짙지는…….”

미샤는 입술을 달싹거리며 편지를 마저 읽더니 그것을 안고 꺄악, 소리를 질렀다.

“너무 아름다워, 로리샤! 이 편지를 읽으니까 나도 나한테 반할 것 같다고!”

나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너 잘 생각해. 나 같으면 절대 그거 안 보내.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미샤.”

“아니. 나는 보낼 거야, 편지로 내 마음을 알리고, 성적도 더 올려서 그분께 인정받을 거라고. 그분 주변엔 우수한 생도들뿐이라서 내겐 다른 방법이 없어.”

미샤는 지금 아무것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상태였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미샤더러 그 자리에 앉으라는 눈짓을 했다.

“응?”

“그럼 내 글씨로 보내?”

“아아, 그렇지!”

“너 알지? 편지에도 운율이라는 게 있어. 내가 써 놓은 것 보고 한 글자도 틀리지 않게 위치까지 똑같이 써.”

“응응. 알았어. 집중해야 하니까 말 시키지 마.”

미샤는 한참이 걸려서 핑크색 편지지에 베껴 쓴 다음 그것을 가슴에 소중하게 품고 나갔다.

“나 내일 바로 아카데미로 돌아갈 거니까 찾지 마, 로리샤.”

그녀는 이미 나갔지만 나는 혼자서 조그맣게 대답해 보았다.

“응. 안 찾아.”

약간의 미안함과 흥분이 섞여 가슴이 묘하게 두근거렸다.

복수란 이런 기분인가?

나는 그대로 침대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이미 저질러 버린걸.’

* * *

“당신은 어떤 책을 보나 궁금했어요.”

“칼린 앙카르트 양.”

“괜찮아요. 지금 도서관에는 아무도 없으니까.”

주말의 아카데미 도서관은 텅 비어 있었다. 시험이 끝난 주라 대부분의 생도가 집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칼린은 도서관에 그들뿐이니 소리를 내어 대화를 나눠도 괜찮다고 말했다.

서가 사이에서 책을 고르던 로카르드는 그녀가 나타나자 허리를 곧게 펴고 묵례했다.

앙카르트가는 상업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떨치는 가문이었다. 제국에서 일어나는 해외와의 교역 대부분은 앙카르트 자작을 거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칼린 앙카르트는 키가 크고 목이 길었다. 갈색 머리는 늘 단정하게 틀어 올린 상태였고, 화장기도 없었다.

눈매는 조금 매서운 편이었으나 늘 미소를 지어 그런 느낌을 덜어 냈다. 그녀는 미인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품위가 주는 미감을 더하고 있었다.

그녀 또한 로카르드 앞에 와서 정중하게 묵례했다. 아카데미에 돌아오자마자 자신을 2등으로 밀어낸 경쟁자에게 관심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로카르드가 들고 있던 책을 덮어 내밀자, 칼린은 놀랍다는 듯 웃었다.

“『툰바르산맥의 전설』? 예상 밖이군요, 공자님. 툰바르라고 하면 지긋지긋하시지 않나요?”

“아마타족 포로들은 저희를 여러 가지 말로 저주했습니다. 그때 들은 등장한 이름과 괴물이 어떤 건지 궁금했는데 그때는 알아볼 경황이 없었어요. 원하신다면 먼저 빌려 가셔도 됩니다.”

전장에서 경황이라니, 농담이었다.

칼린은 옅게 웃었다.

“저는 참 놀라워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공자님이 말씀하시는 방식이요. 제게는 색다른 경험이에요.”

로카르드는 그녀의 갈색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는 거기 맴도는 지적이며 날카로운 정신의 빛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그를 미소 짓게 하는 빛깔은 아니었다.

“제 삼촌께서도 이번에 귀환하셨기에 그곳의 일들을 생생하게 전해 들을 수 있었답니다. 몹시 끔찍하고, 또 고통스러운 이야기였어요.”

“…….”

“하지만 공자님께서 말씀하실 땐 마치 동화를 듣는 것 같아요. 공자님이 느끼신 고통은 어디로 간 거죠? 아니면 독수리에게는 그 정도는 아무 일도 아닌가요?”

독수리는 카이델가의 상징. 카이델은 대대로 우수한 기사단을 길러 내어 무로 부흥한 가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남들이 제 가문에 어느 정도 환상을 품는 것이 익숙했다.

로카르드는 잠시 말을 잃은 채 나란히 꽂힌 책들을 바라보았다.

“그럴 땐 저에 앞서 죽은 자들을 생각합니다. 그러면 제 감정에 빠져들 겨를은 없어집니다.”

묵직하게 가라앉았던 목소리가 금세 밝아졌다.

“게다가 끔찍한 이야기로 생도들의 밤잠을 설치게 할 필요는 없잖습니까. 우리는 바로 그들을 지키기 위해서 출정한 것이니까요.”

칼린은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머리를 숙여 예를 갖추었다.

“타가르에 영원한 광영을.”

로카르드는 맞절하여 예를 받았다.

허리를 편 칼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열심히 노력해서 다음 시험에는 공자님을 이겨 볼 생각이에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기꺼이. 저는 도전을 즐긴답니다.”

로카르드의 상쾌한 대답에, 칼린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웃지 마세요. 저는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생각하니까. 공자님께서는 2황자 전하를 모시느라 자주 황궁에 드나드시며 수업 결손이 많으시잖아요. 치사하지만 그 틈이라도 노려 보겠어요.”

“저 또한 2황자 전하의 시종으로서 성적을 유지해야 하니 마음대로 되지 않으실 겁니다.”

칼린은 눈을 깜빡이며 그를 응시했다.

“……그레이언 전하께서는 유능한 사람을 좋아하시는군요. 그렇죠?”

“…….”

“그러면 제게도 공자님을 따라 입궁할 기회가 있을까요? 졸업 때까지 성적을 유지한다면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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