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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내 마음을 네가 고백해 줘 (15/155)


15화. 내 마음을 네가 고백해 줘
2023.03.19.


나는 방으로 돌아와 침대 위에 굴러다니던 약초학책을 치우고 벌렁 드러누웠다.

“아카데미…….”

미샤는 예상외로 아카데미에 잘 적응하는 모양이었다. 이제 그럴듯한 남자만 잡으면 그녀의 인생 목표는 금방 성취되는 것이다.

나는 천한 장사꾼이 되어, 앞으로 이십 년 정도 고생하면 내 이름을 건 가게를 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제까지의 내 장래 소망이자 꿈이, 오늘 돌연히 하찮고 소박하게 쪼그라든 느낌이었다.

“아니지. 아니야.”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 로리샤 로아르는 툰바르산 오두막에서 백작저까지 왔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황궁에까지 발을 들여 보았다.

미샤가 갈 수 있는 곳은 또래의 영식이 있는 귀족 가문 몇 개가 다겠지만, 나는 세상 어디든 갈 수 있었다.

“나쁘지 않잖아. 그렇다고 치자, 로리샤.”

나는 눈을 꼭 감고 침대 모서리에서 모서리까지 굴러다녔다.

그런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로리샤, 나 들어간다?”

“저게 아주.”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대충 머리를 정리하며 방긋 웃었다. 최근엔 매일 손님을 접대하다 보니, 이제는 가짜 웃음을 짓는 데는 전문가가 되어 있었다.

“미샤.”

“아카데미 떨어졌다고 이렇게 빈둥거리며 사는 거야?”

야, 이 썅…….

내가 계속 긍정적인 사고를 유지하며 살려면, 정녕 미샤 로아르를 살해할 수밖에 없는 걸까.

나는 다시 직업적 전문성을 발휘했다.

나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아니. 네가 오랜만에 온 덕에 오늘 저녁 메뉴가 장난 아니었잖아. 과식해서 그래.”

“아아…….”

미샤가 말꼬리를 끄는 게 아무래도 찜찜했다. 나한테 원하는 게 있는 모양인데, 아카데미 생도씩이나 된 로아르 양께서 이 비천한 몸에게 뭘?

“아, 이거 가져왔어. 내가 아카데미 입학하면서 지은 옷이야. 한 번도 안 입었어.”

그녀가 가져온 상자에는 붉은 벨벳으로 장식된 외출용 드레스가 들어 있었다. 내 취향과는 백만 년 멀었다.

“이거 주말에 황궁 근처 카페 거리로 외출할 때 입는다고 하지 않았어?”

내 물음에 미샤는 과장되게 손을 저었다.

“응? 아니, 공부하느라고 틈이 나야 말이지. 거기 애들은 다들 얼마나 악바린지, 꼭 너 같……. 아무튼 새 옷이라고. 너 줄게. 고맙지?”

여기까지. 내 직업적 전문성 발휘는 여기까지. 나는 더 웃어 주지 않았다.

나는 짐짓 냉랭하게 물었다.

“내가 이걸 입고 갈 데가 있을까?”

너도 이제 아카데미 생도씩이나 되었으면 그 머리로 생각을 좀 해 보지 그래?

“…….”

미샤는 도톰한 입술을 꼭 다물었다가, 버럭 짜증을 냈다.

“몰라! 너 다음 생일에 성년식 한다며? 그 선물이라고 치든지, 이제 이건 네 거니까 알아서 해!”

생일 선물로 저 안 입는 쓰레기를 주다니, 감격스러워서 눈이 다 쓰리다, 미샤.

나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럼 저기 벽장에 넣어 둘 테니까 생각나면 가져가.”

“이제 네 거라니까!”

“너 원래 그러잖아. 줬다가 뺏었다가.”

“씨이…….”

미샤는 다시 입을 앙다물었다.

나는 그때쯤 진짜로 걱정되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감히 네까짓 것이 내 호의를 거절하네 마네 난리를 쳤을 계집애가 꾹꾹 눌러 참는 것이 아닌가.

대체 무슨 부탁이 있어서 저러는지, 슬슬 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샤, 나 아무래도 너무 많이 먹었나 봐. 배가 아파서 그러는데…….”

“앉아! 앉아 봐! 잠깐 들어 보라니까?”

로리샤는 두 손으로 내 팔을 뽑을 듯이 잡아당겨 나를 앉혔다.

“아파! 아프다고!”

나는 미샤의 악력에 쌍시옷이 튀어나올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그런데 미샤가 내 눈치를 본다.

허어…….

정말 배가 아팠다면 방금 나는 몹시 끔찍한 사고를 쳤을 테지만, 이쯤 되니 궁금해졌다.

대체 세상 어떤 일이 미샤 로아르를 이렇게 안절부절못하게 만드는 걸까.

“부, 부탁이 있다고. 그러니까 화장실 좀만 참아 봐. 네 장한테 부탁해 봐. 미샤에게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

내 투지는 나를 외면하고 달아났다. 아카데미에 들어가도 저 유아어는 안 고쳐지는구나.

장한테 부탁해? 로리샤한테 부탁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

“있잖아……. 그러니까…….”

미샤는 한참 동안 천장을 봤다가 카펫을 봤다가 정신 산만하게 굴더니 침을 삼키고 한숨을 쉬었다.

생각 같아서는 뺨을 한 대 쳐서 집중 좀 하라고 말하고 싶었다.

미샤 로아르의 뺨을 때리거나 저 붉고 탐스러운 머리채를 쥐고 흔드는 장면을 상상하는 건 내 길티 플레저다.

하아……. 나는 분명 지옥에 갈 거야.

“내가 할 말이 있어서 그러는데…….”

“할 말 있는 거 알아. 아까 네가 이 방에 들어올 때부터 알고 있었고 지금도 아는 중이야. 그리고 아마 내 장은 그런 거 신경 안 쓸걸? 걘 저 좋은 일만 하고 싶어 해.”

그러자 미샤가 나를 향해 눈을 치떴다. 그렁그렁, 눈물을 한가득 담은 눈을 말이다.

“이런 일은 너밖에 부탁할 데가 없다고!”

“싫어. 뭔지 몰라도 싫어.”

미샤는 다시 발딱 일어나려는 나를 붙잡았다. 내 팔에 매달린 미샤의 눈물 젖은 얼굴을 내려다보는 쾌감을 다른 누가 알까.

“나는 로카르드 카이델 공자님에게 내 마음을 고백하는 편지를 쓸 거야! 그러니까 네가 써 줘야 해!”

미샤는 그 두 문장을 일 초 만에 뱉어 버리고 씩씩거렸다.

나는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이봐요, 카이델 공자님. 댁은 왜 거기서 나와?

아아. 댁도 아카데미 생도셨지.

미샤는 내 팔을 놓더니 혼자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몸을 꼬아 댔다. 나는 그걸 보며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

나는 허탈하여 소파에 반쯤 드러누웠다.

미샤는 내가 이런 엄청난 비밀을 아는 한 달아날 수 없다는 걸 알고 한 호흡에 나불거린 것이다.

귀족가 자제는 이성과 함께하는 자리에서 엄격한 감시, 감독을 받는다. 연애편지라니, 사교계 가십거리가 되고 싶은 건지!

게다가 상대가 그 새끼 사자라면…….

내가 타르간지 주인이 아니라는 게 가슴을 치고 싶을 정도로 안타까웠다. 이 정도 뉴스면 한몫 단단히 잡을 텐데!

나는 미샤를 떠보기로 했다.

“카이델 공자가 누군데?”

“너 몰라? 폐하의 첫 번째 사자 카이델가의 후계자 말이야. 이번 아마타전의 영웅! 제국 아카데미 수석 입학생! 그야말로 완벽한 분이지 않아? 외모는 또 어떤지 아니? 그 검은 머리에 빛나는 보라색 눈동자를 보면 난……. 흐흑, 로리샤!”

흐흑, 미샤!

나는 속으로 그렇게 외치며 이마에 팔을 얹었다.

카이델 공자가 수석 입학생이었다니, 나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햇수로 이 년이나 툰바르산맥에서 전쟁을 치르고 막 돌아온 인간이, 뭐가 어째?

재수가 없다, 없다 해도 이 정도로 재수 없다니. 차라리 아카데미가 성적을 유명세 순서로 매긴다고 하면 속이 편할 것 같았다.

나는 최대한 나른한 말투로 가식적으로 대꾸했다.

“아아, 그 카이델 공자? 너무 놀라서 순간 생각이 안 났어.”

“도와줄 거지? 너 글 잘 쓰잖아. 아버지가 너 칭찬하시는 거 들었단 말이야.”

“하아, 미샤. 내가 연애편지를 잘 써서 칭찬받았겠니?”

“여, 연, 뭐? 로리샤! 어쩌자고 그런 큰일 날 소리를 해? 누구 혼삿길 막을 일 있어?”

나도 얘가 어쩌자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나 싶어 머리를 들고 바로 앉았다.

미샤는 영혼을 다해 주장했다.

“나는 그분께 내 마음을 고백하고 싶을 뿐이야. 절대, 절대 연애편지 같은 게 아니라고!”

“연심을 고백하려는 거 아니었어? 결투 신청이었어?”

“아무튼! 아무튼 연애편지는 아니라고. 그런 게 소문나면 얼마나 망신인지 너도 잘 알잖아.”

“난 몰라. 나 같은 애가 어떻게 알겠어. 아무튼 난 모르겠으니까 네가 알아서 해. 아카데미에서 일어난 일은 아카데미에서 해결해.”

“로리샤! 너……. 너 그러면 외출 금지시킨다?”

이게 뭐라는 거야, 지금?

“너 매일같이 평범하게 꾸미고 시내에 나가서 뭐 하는 거야? 엄마가 사람 풀면 하루면 네가 뭐 하고 다녔는지 알아낼걸? 편지 안 써 주면 엄마한테 일러서 너 다시는 외출 못 하게 할 거야!”

“…….”

나는 미샤를 빤히 바라보았다. 백작 부인은 내 아카데미 입학을 막더니, 이 조그만 빨간 머리 계집애는 내 약재상 출입까지 막을 기세였다.

대체 이 모녀와는 무슨 악연일까.

필사적으로 얼굴을 평온하게 유지하며 미샤를 바라보자니 스멀스멀, 어떤 생각이 일어났다.

‘그렇게 원한다면, 미샤……. 너도 한번 지옥에 떨어져 보겠니?’

만에 하나, 두 사람이 맺어지면 미샤는 황자 전하께서 인정하신 미친놈의 애인이 되는 거고, 로카르드 카이델 공자는 턱없는 모지리의 애인이 되는 거다.

그래. 바퀴벌레 두 마리서 세상이 멸망할 때까지 행복하게 지내 보든지!

나는 아주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백작 부인이 알면 날 죽이려고 하실 거야.”

미샤는 머리카락이 제 뺨을 때릴 정도로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내가 다 책임질게. 다 내가 한 짓이라고, 어쩔 수 없이 들키면 내가 널 협박한 거라고 말할게. 맹세해!”

“난 정말 이런 일에 끼기 싫어, 미샤. 넌 이 일을 후회하게 될 거야.”

“절대로! 절대 후회 안 해. 내가 새 옷도 줬잖아. 그러니까 실력 발휘 좀 해 봐.”

“그건 나한테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니까 그러네.”

“로리샤, 나한테 이렇게 못되게 굴기야?”

응. 이렇게 못되게 굴 거야.

네가 지난 7년간 나를 어떻게 대했는지를, 아니, 지난 반년 어치만이라도 돌이켜 보겠니?

나는 그녀의 말을 자르듯 말했다.

“그 공자님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 봐. 나도 소재가 있어야 쓸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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