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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14/155)


14화.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2023.03.18.


이 새끼가 사람을 바보 취급해도 정도가 있지.

벌컥 화를 내야 할 것 같은데 그러지 못했다. 그에게서 악의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처럼 악의에 잘 벼려진 사람이 감지하지 못한다면, 악의란 없는 것이다.

단지 그는 나를 악의에 가까우리만큼 당황하게 했다.

‘제발 날 좀 이해시켜라, 이 새끼야. 너 제국의 새끼 사자라며.’

제국의 새끼 사자에게 나를 이해시킬 의무 같은 건 없다. 하지만 내 정신은 그렇게 억지를 부렸다.

그는 웃음을 멈추더니 삐딱한 미소만 띤 채 나를 응시했다.

“내가 툰바르산맥에서 병사들하고 구르면서 말법이 상당히 망가지긴 했는데, 명문가 영애께서 그러는 건 낯설어서 좀 과하게 흥분했나 봐요.”

이건 무슨 종류의 변태지? 누, 누가 마음대로 흥분하래? 확 뭐를 비틀어 버릴라…….

한동안 차분하고 평온했던 내 내면은, 로카르드 카이델이 일으킨 파문으로 진흙탕이 되어 버렸다. 밑바닥에 가라앉았던 뿌연 욕이 뭉게뭉게 올라왔다.

따지고 보면 문제는 나였다. 한 번만 꾹 참고 가식적으로 대하면 될걸. 그런데 이상하게 이 남자에게는 그러기가 힘들었다.

카이델 공자는 웃으며 말했다.

“사람 참 궁금하게 만드네요. 정체가 뭔지.”

나는 배에 힘을 주고 말했다.

“약초가 필요하시면 말씀하세요. 저희는 상급만 취급해요.”

“백작님이 상점을 열어 주신 건가요?”

나는 무슨 바보 같은 소리냐고 물었다.

“제 가게면 제가 배달을 하겠어요?”

“흠.”

카이델 공자는 조금 민망한 표정을 짓더니, 갑자기 엄숙하게 말했다.

“그런데, 내게 사과할 것 있지 않습니까? 로아르 양.”

“…….”

나는 슬슬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그는 성큼 한 발 다가와 그 거리를 없애 버렸다.

“그날 로아르 양의 달리기 실력은 확인했습니다만, 원한다면 제 달리기 실력도 보여 드릴 용의가 있습니다. 로아르 양.”

꼬박꼬박 로아르 양 하고 불러 대는 것도 재수 없다. 로아르가 내 이름이지, 지 이름인가?

아무튼 제국 최연소 기사였던 분께서 나에게 달아나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만은 선명하게 전달되었다.

“그동안 이 얘기를 꺼낼 겨를이 없었는데, 이 정도 우연이면 하늘이 제게 기회를 주신 게 아닐까요?”

“그때는, 제가……, 오해할 만하지 않았나 싶은데…….”

내 귀로 들려오는 내 목소리는 작고, 초라하고, 비굴했다.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러면 지금 로아르 양은 아무 잘못도 없으시다는 겁니까?”

“아니, 그게 아니고…….”

나도 내가 왜 이렇게 버티는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짐작은 어렵지 않았다. 그날의 기억. 아카데미 시험을 포기하고 밤길을 방황하던 그날 밤의 끔찍한 기분을 떠올리기 싫어서.

하지만 그건 내 사정이고, 카이델 공자에게 사과를 빚진 건 맞았다.

나는 목에 힘을 주고 말했다.

“죄송합니다. 공자님. 치한으로 몰고, 오해인 걸 안 다음에도 사과 없이 달아난 건 잘못이었어요!”

나는 진심으로 내 잘못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 마음과 달리 내 음성은 한껏 높아져서 삑삑 갈라지고 있었다. 마치 욕을 하는 듯한 어투였다.

카이델 공자도 그렇게 느꼈는지, 지금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절규했다.

“진짜, 진짜, 죄송하다니까요!”

그는 미간을 잔뜩 좁히며 마지못해 대답했다.

“알았어요……. 사과 받아들이죠.”

이건 또 무슨 마음인지. 그가 내 꼴을 도저히 더 못 보겠는지 마지못해 사과를 받아 주니, 그것도 그것대로 불쾌해졌다.

나는 얼른 자리를 떠야 했다. 이 남자는 참으로 수렁 같았다. 내 실수와 흑역사로 출렁거리는 시커먼 수렁.

“그럼 실례했습니다, 공자님. 앞으로 마주치는 일은 없길 바랄게요. 공자님을 위해서도요.”

“어딘데요?”

몸을 획 돌리려던 나는 발이 꼬이며 다시 어정쩡하게 몸을 돌렸다.

“네?”

“그 약재상, 어디냐고요.”

“…….”

그는 내 쪽으로 허리를 숙여 키를 조금 접었다. 제 얼굴을 잘 보라고, 퍽 은근해진 목소리를 가까이서 들으라고 말이다.

“사람 풀어서 찾을까요? 나, 그런 거 잘하는데.”

아카데미 입학시험 날, 그의 마차를 가득 둘러싼 기사들의 모습이 퍼뜩 떠올랐다. 그들의 반의반만 동원해도 시내에서 나를 찾아내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부드럽게 협박하고서, 그는 허리를 폈다. 굽혔다 펴니 그의 몸의 태가 더 반듯해 보였다.

재수 없는 귀족 놈.

내가 그에게 순순히 사과하지 못한 진짜 이유를 나는 그때 깨달았다.

그가 귀족 같아서였다. 우리 백작님 말고 처음 만나는 진짜 귀족 같아서.

내가 절대 가닿을 수 없는 어떤 순정하고 완전한 상태.

나는 입을 벌린 채 그 짙고 오묘한 색상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다가, 하아 한숨을 쉬었다.

“비밀로 해 주실 건가요?”

그는 나를 내려다보며 빙긋 웃었다.

“나를 찾아와서 로리샤 로아르 양이 일하는 약재상이 어디냐고 물어볼 사람이 있을 것 같은가요?”

“…….”

역시.

재수 없는 새끼.

“발로아 거리 끝 톨만의 약재상이에요! 절대 뵐 일이 없기를 바라요.”

나는 재빠르게 뱉고는 바구니가 원심력에 붕 뜰 정도로 몸을 팩 돌렸다.

“……!”

나는 고장이 난 듯 덜컥 멈추고 말았다.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니 어깨가 들썩거렸다. 그러자 바구니가 같이 오르내렸다.

말하려니 쪽팔렸다. 죽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오늘 내가 처음으로 성사시킨 거래 대금을 받아서 돌아가야 했다.

나는 몸을 다시 돌려 그에게 소리쳤다.

“저기요! 저 제3황궁 손님 대기실에 좀 데려다주세요!”

막 건물로 들어가려던 로카르드 공자는 내게 돌아와 못된 계집애처럼 웃었다.

웃음을 짓누른 얼굴이 얼마나 얄미운지!

그는 내게 상체를 숙이더니 귀 가까이에 대고 나직이 말했다.

“나한테 빚, 졌어요. 로아르 양.”

그리고 그는 성큼 걸어 나를 제치고 앞장섰다. 내 옆을 지날 땐 내 팔에서 바구니를 채어 가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는 바구니가 뜻밖에 비어 있자 무게를 확인하듯 다시 높게 들어 보고는 경쾌하게 걸어갔다.

나는 가는 내내 치마 옆선을 쥐어 비틀었다.

‘어우, 어우, 어우!’

* * *

미샤는 지난 주말에 처음으로 귀가했다. 아카데미 입학 후 한 달도 더 지난 때였다.

백작 부인은 자랑스러운 아카데미 생도 딸을 환영하려 다양한 음식을 마련하고 집 장식도 바꾸었다. 저택은 축제 분위기였다.

모두가 기다리는 가운데 마차가 도착하고, 미샤는 아카데미 제복 차림으로 마차에서 내렸다. 그걸 본 백작 부인은 탄성을 내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아카데미 제복은 내 눈에도 멋있었다.

반면 백작님은 평소와 조금도 다를 바 없이 평온했을 뿐 아니라, 얼핏 조금 가라앉아 보였다. 나만 느낄 정도의 미묘한 것이었다.

그녀가 너무 오랜만에 돌아와서 그런 것 같지는 않았고, 혹시 아카데미 외부에서 제복을 입으면 안 되는 규칙이 있는 건가 싶기도 했지만 모를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미샤를 놀려 먹으며 마음의 위안으로 삼았던 때의 기분도 꽤 오랜만이었다. 그리고 미샤를 보며 열받는 시간도.

미샤는 마차에서 내릴 때부터 시작해 식사하는 동안에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아카데미가 어쩌고, 아카데미가 저쩌고. 아카데미는 공기 중에 떠다니는 먼지도 금가루로 되어 있다고 주장할 기세였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제국 아카데미에는 유니콘도 살고 드래곤도 살아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오랜만에 들뜬 백작 부인은 말끝마다 그러니, 그러니 하며 장단을 맞춰 주었다.

나는 이제 내 인생 경로를 어느 정도 가다듬고 있었던 탓에, 미샤의 끝나지 않는 자랑이 죽을 만큼 듣기 힘들지는 않았다.

미샤라면 로아르의 성을 달고 약재상이라니 그 무슨 천박한 짓이냐고 할 테지만.

나는 미샤의 자랑이 하도 지루해서 눈앞 식탁에서 유니콘이 뛰어다니는 상상을 했다. 백작님도 묵묵히 식사만 했다.

미샤가 수다를 멈추고 겨우 한 호흡 쉬자, 백작 부인이 말했다.

“그런데 아카데미의 식사 질이 좋지 못하니? 네 피부가 어째 거칠어진 것 같구나.”

“공부하느라 피곤해서요.”

풉. 내가 낸 아주 아주 작은 웃음소리는 곁의 백작님만 들었다. 나는 흘끔 눈치를 보며 내 접시에 코를 박았다.

반면 백작 부인은 눈이 등잔만 해지더니 냅킨을 든 채 일어났다. 그리고 냅킨으로 눈물을 찍으며 밖으로 나갔다.

미샤 로아르가 공부를 한다니, 사람 하나 울릴 정도는 되는 뉴스긴 했다.

그러자 백작님이 평온한 목소리로 물었다.

“공부는 따라갈 만하니?”

“그럭저럭이요. 애쓰고 있어요. 아버지, 저 가정 교사를 붙여 주실 수 있어요? 주말에 집으로 올 수 있게요.”

백작님은 미묘한 표정으로 미샤를 바라보며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성적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아카데미는……. 다들 너무 열심이라서 앞서 나가려면 좀 더 노력해야 할 것 같아요.”

“그러자꾸나.”

나는 그제야 백작님의 표정이 조금 밝아지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미샤 로아르도 공부를 한다.

게다가 앞서 나가겠다고?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음, 예가 이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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