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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정체불명의 수석 입학생 (13/155)


13화. 정체불명의 수석 입학생
2023.03.17.


2황자가 황궁에 복귀했으니, 로카르드는 당분간 아카데미 생활에 집중할 생각이었다.

이곳에서 그가 발굴할 수 있는 보석이 있는지, 여기저기 컴컴한 땅속을 파헤쳐 볼 작정이었다. 하지만 세 번째 사자의 적녀를 보자니 그 일은 첫 시도부터 좌초된 듯했다.

그는 어느 틈에 도착한 학사 사무실 문을 노크했다.

반갑게 맞이하는 학사 실장에게, 로카르드는 웃으며 말했다.

“입학시험 시험지를 보고 싶어서요. 가능할까요?”

“당연하지요, 공자님. 본인의 시험지는 1년간 언제든 확인하실 수 있답니다.”

“제가 보고 싶은 건 라보리 시하의 시험지입니다.”

정체불명의 입학자 수석 라보리 시하.

학사 실장은 곤혹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학사 실장은 카이델 공자가 본인의 성적표와 시험지만 열람 가능하다는 아카데미의 규칙을 알고 있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것을 재차 거론하여 서로 불편해질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카이델 공자님.”

로카르드는 전장에서 허무하게 죽어 간 병사와 기사들을 기억하기도 힘들 정도로 많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목숨을 건 시간은 이렇듯 매 순간 보상을 받고 있었다. 그가 앞에 서기만 하면 어떤 문이든 기꺼이 열리기 때문이다.

* * *

약재상 점원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말했다.

“배달이 그렇게 좋아요?”

“열심히 해야죠.”

나는 빙긋 웃으며 대꾸한 다음 클록을 걸쳤다. 그리고 팔에 바구니를 끼고 거리로 나섰다.

알고 보니 연금술사가 아니라 황궁 약제사였던 휘니드 로이만 씨의 주문품은 이틀 만에 도착했다. 아마 연금술을 취미로 하는 모양이었다.

황궁 약제사라니, 그런 거물 손님을 두고 즐겁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를 잘 붙잡기만 하면 약재상으로서의 내 입지도 성큼 성장할 터였다.

나는 약속한 기간을 단축한 것을 생색낼 수 있어서 조금 들떠 있었다. 대여 마차 안에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다 보니 아침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백작님은 다음 달 돌아오는 내 생일에 맞추어 성년식을 열어 줄 테니 원하는 방식을 생각해 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떠오르는 게 없었다. 초대할 귀족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다음 생일이 지난다고 내게 수염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오늘은 그 생각으로 자칫 우울하게 보낼 수도 있었는데, 이 연금술과 같은 약재 사업의 가능성에 살짝 들뜨는 기분이 들기까지 했다.

하지만 제3황궁 앞에 도착했을 때, 나는 내가 그동안 미처 생각하지 못한 문제가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곳은 황실의 각종 행정 사무를 보는 이들과 사용인들이 지내는 궁이었다. 그러니까 황궁의 업무 전용 공간이라는 뜻이다.

거기 출입하기 위해서는 명부에 이름을 남겨야 하는데, ‘로아르’라고 적었다가는 문제가 될 게 뻔했다.

이런 삐리리…….

나는 그 사실을 황궁을 들어선 다음에야 깨닫고, 몸이 얼어 버렸다.

“이름이 뭐냐니까요?”

나는 넋을 놓고 있다가 황궁 경비의 재촉에 어렸을 적 이름을 대고 말았다.

“로리샤 로바요.”

백작님한테 미안해졌다가, 백작님한테 미안해해야 하나 의문이 들었다가, 미안해하고 싶지 않아졌다.

‘백작님, 저 지금 일하는 중이라서요. 저도 내일모레 성년인데 백작님도 제가 제 코는 혼자 닦을 줄 아는 편이 좋으시잖아요.’

나는 마음을 다잡고 황궁 하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기다리세요.”

‘황궁이래서 으리으리할 줄 알았더니…….’

작고 평범한 대기실에 버려진 나는 바구니를 안고 기다란 소파에 앉았다. 알아볼 사람도 없는데 괜히 후드를 다시 당겨 썼다.

2황자 전하가 나타난다면 빼도 박도 못하겠지만, 그런 귀한 분이 이런 데 다니실 리가 없다.

조금 있으니 로이만 씨와 같은 로브를 입은 젊은 남자가 들어왔다.

남자의 로브는 빳빳하고 고급스러웠다. 로이만 씨는 지독히 검소한 사람인 모양이었다.

“따라오세요. 실장님이 안에서 보자시네요.”

“실장님이요?”

로이만 씨는 약제실 실장님이 분명했다. 이럴 땐 신뢰감을 주기 위해 정식 호칭을 불러 주어야 한다.

“로이만 실장님 찾아오신 것 아닌가요?”

“맞아요. 휘니드 로이만 실장님을 찾아왔어요.”

나는 발딱 일어나 그를 따라갔다.

그는 건물을 나와 후원으로 나를 데려가더니 그곳을 지나 점점 더 구석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약초밭이 꾸며져 있었다.

“어머나 세상에!”

로이만 씨는 목장갑을 낀 채 작은 나무 의자에 앉아 칼로 약초 껍질을 벗겨 내고 있었다.

“로이만 실장님, 배달꾼을 데려왔습니다.”

나를 데려간 남자가 말하자 로이만 씨가 조용히 웃었다.

“놀랐어요. 이렇게 빨리 올 줄 몰라서.”

“제가 좀 그래요. 하하하!”

나는 어색하게 웃은 게 민망해서 다시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상당히 다양한 종류의 약재가 소량씩 심겨 있었다.

자급자족이라니! 사업적으로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나에게, 실장님이 말했다.

“물건을 볼까요?”

나는 얼른 바구니를 열어 보였다.

“보세요. 들어온 물량 가운데 제일 좋은 부분만 골라 담아 왔어요.”

그가 나직이 웃자,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약재든 연금술 재료든, 언제든 요청만 하세요.”

연금술사의 본질이 뭐냔 말이다. 그들은 수천 년간 아무도 성취한 적 없는 과업을 이루려, 똑같은 실수를 하고 또 하고 또 하고 또 하는 강인한 종족이다.

그러니 실장님도 앞으로 제게 주문하고 또 하고, 또 해 주시면…….

나는 그런 망상에 빠져서도 겉으로는 최대한 태연한 얼굴로 웃었다.

그러자 그도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잔금은 지금 줘야 하나요? 아니면 가게로 전표를 써 줄까요?”

“기왕이면 직접 가져가겠습니다. 영수증은 가져왔어요. 첫 거래의 미신 같은 거예요. 물론 불편하시다면 전표도 좋아요.”

순 거짓부렁이다. 나는 그냥 내가 시작한 일의 결실을 손으로 직접 만져 보고 즐기고 싶었을 뿐이다.

내 삶에도 그 정도 쾌락은 필요하다…….

“대기실에서 기다리면 가져다줄 거예요. 그대들의 미신을 존중해 주죠. 그런데 이름이……?”

“로리샤예요. 앞으로 오시면 로리샤 로바를 찾아 주세요. 첫 거래 감사합니다. 로이만 실장님!”

나는 방긋 웃고 돌아섰다.

‘와, 나 좀 조졌다. 완전 숙련된 약재상 같잖아!’

내 손에 내가 번 돈을 쥘 생각을 하니 들뜨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거래가 또 이어질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차피 아카데미 입학시험을 때려치운 때부터 오늘만 살기로 했다는 것이 떠오르자 또 괜찮아졌다.

나는 대기실을 향해 룰루랄라 걸어갔다. 걸어갔다, 계속…….

잠시 후 나는 빈 바구니를 든 채 황궁에서 길을 잃은 나를 발견했다.

후원을 통과해 왔으니 후원으로 돌아가면 대기실 입구가 보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길을 따라 대기실이 보이긴커녕 심긴 꽃이 점점 더 많고 화려해지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부지런히 오가던 사용인들의 자취도 없었다.

‘조졌다. 이번엔 다른 의미로.’

내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 클클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음성이 누구 것인지 본능적으로 알아채고 등골이 서늘해졌다.

역시 그였다. 로카르드 카이델 공자.

“여기서 뭐 해요? 오늘도 평민 연극 중?”

“연극을 반만 하기도 하나요?”

내가 반은 평민이라고 대꾸하자, 카이델 공자가 아차 하는 듯 눈썹을 살짝 움직였다.

건물 입구에 어깨를 기대고 나를 향해 웃던 그는 부드럽게 걸어 내가 있는 정원으로 들어왔다.

“선의로 말하면 선의로 받는 건 어때요, 로아르 양?”

“그게, 이상하게 카이델 공자님의 선의는 알아보기가 어렵더라고요.”

너는 소매치기를 붙잡아도 치한처럼 보이거든?

내가 예민하게 군다는 건 인정하지만, 어차피 그도 나를 다른 귀족 영애처럼 대하고 있지 않았다.

만약 그가 이 자리에서 미샤를 마주쳤다면, 그는 지금과 다르게 정중하게 예를 올리고 어째서 여기 계시느냐고, 도와드릴 것은 없냐고 물었을 테다.

나는 이미 그에게서 그러한 격조와 품위를 보았으므로 그것이 내 억측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카이델 공자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제 가슴 위로 팔짱을 낀 채 내 앞에 섰다.

“아직 대답 안 했는데? 오늘 백작님은 입궁하지 않으셨는데 여기서 뭐 하냐고요. 혹시 날 찾아서……?”

나는 정처 없이 흔들리는 내 눈알을 때려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 전에, 그의 마지막 말이 내 눈 초점을 빡세게 모이게 했다.

내가, 너를? 왜?

나는 빽 소리쳤다.

“배달 왔어요!”

그는 생전 처음 듣는 외국어를 따라 하듯 반복했다.

“배달?”

“지금 약재상에서 일하거든요. 제브론에서는 제 다른 반을 보신 거고, 오늘 이게 제 나머지 반이에요. 공자님.”

나는 그가 어떤 표정을 짓든지 태연하게 굴려고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그가 나를 풀때기나 배달하는 귀족의 수치로 여기든, 밖에서 푼돈을 벌려고 이러고 다니며 부친의 이름에 먹칠하는 배은망덕한 계집애로 여기든, 흔들리는 표정을 보여 주지 않으려고.

그런데 그가 눈을 크게 뜨더니 말했다. 마치 큰일이 났다는 듯한 억양이었다.

“그쪽은 아주 못 하는 게 없어요?”

나는 잠깐 의식의 정체를 겪었다. 내가 예상할 수 있는 백만 가지쯤의 말 중에 그런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어버버거렸다.

“왜, 왜 의문형이에요?”

“거기서 일하려면 약재에 대해 상당한 지식이 필요하지 않나요?”

“그, 그래요! 저 약초도 빠삭하게 알아요.”

“……빠삭? 풉.”

카이델 공자는 또 신기한 말을 들었다는 듯이 웃음을 참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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