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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아카데미의 하루 (12/155)


12화. 아카데미의 하루
2023.03.16.


“좋은 아침이에요, 로아르 양.”

“좋은 아침이에요, 밀레나 양, 써린 양.”

아카데미 복도에서, 미샤 로아르는 반갑게 인사하고 바쁘게 멀어지는 두 동기 생도의 뒷모습을 보며 입술을 조금 깨물었다.

저쪽에서는 앙카르트 자작 영애 칼린이 가까운 기숙사 방을 쓰는 생도들과 모여 서서 잡담하고 있었다. 같이 밤새워 공부하며 먹었던 야식 이야기였다.

그것을 바라보는 미샤의 턱에는 힘이 조금 더 들어갔다. 그녀는 얼굴을 붓게 하는 야식을 혐오했음에도 그 모습에 부러움을 느꼈다.

그녀는 무심결에 숙면을 취하여 매끄러운 자신의 뺨을 손끝으로 쓰다듬었다.

방금 지나간 이들은 로아르가와 밀접한 관계를 맺은 가문의 딸들이었다. 그들의 친절은 그 이유일 뿐, 그들 사이에는 표현하기 미묘한 거리감이 존재하고 있었다.

입학식 직후에는 많은 생도가 세 번째 사자의 딸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미샤의 미모와 배경은 동시에 빛났고, 그녀는 지금까지처럼 자신에게 쏟아지는 주목과 동경을 당연하게 여겼다.

하지만 첫 번째 시험 결과가 벽에 붙은 후로 공기는 바뀌었다.

그녀로서는 집에서 하던 대로 ‘공부했다’고 생각했는데, 결과는 가혹했다.

아카데미는 모든 생도의 성적과 등수를 벽에 붙였고, 그녀는 꼴찌만을 면했다. 게다가 바로 앞 등수와 성적 차이는 컸다.

꼴찌는 로카르드 카이델 공자였다. 그가 2황자를 모시고 요양지에 가 있어 아직 등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심지어 입학식에도 불참했다.

그 후 생도들은 조수가 들고 나듯 자연스럽게 미샤로부터 멀어져 1등 생도 칼린 앙카르트 곁으로 모여들었다.

거기에는 무시나 경멸 같은 감정은 개입되어 있지 않았다. 굳이 표현하면 무관심에 가까웠다.

생도 대부분은 아카데미만이 제공하는 인맥과 경험을 얻기 위해 수년간 입시에 매달린다.

파티나 다과회에서 얻을 수 있는 종류의 힘은 이미 그들 본가의 옷장 안에도 있었다.

그들에게는 곧 낙제하여 집으로 돌아갈 사람과 친교를 나눌 시간이 없었다. 그것이 아카데미의 공기였다.

미샤는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기숙사 복도의 여성 생도들이 그녀의 새 주말용 드레스와 장신구에 무관심한 것도 상처가 되었다. 그들은 주말에 외출 대신 공부 일정을 짰다.

심지어 이미 방학 공부 일정까지 짜 놓은 생도들도 있었으니, 그들은 졸업할 때까지 아카데미 제복 말고는 입을 일이 없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미샤는 모친으로부터 어떤 강인한 힘을 물려받았고, 그것을 발휘해 우아한 자태로 버텼다.

‘내 아버지는 폐하의 세 번째 사자야. 언젠가는 저들도 나를 받들어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될 거야.’

그사이 나는 공부를 조금만 더 하면 다 잘될 것 같다고.

하지만 미샤는 수업 시간에 교사들이 사용하는 단어의 삼분의 일가량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에게는 특히 커다란 제국어 사전이 필요했다.

그래도 그녀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가 제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강단이 그토록 하찮은 것이었다면, 백작 부인은 진작에 자제력을 잃고 추문을 일으켰을 것이다.

천천히 생기를 잃어 가던 미샤에게 한 줄기 빛이 찾아든 때는 입학식 이 주일 후였다. 로카르드 카이델 공자가 아카데미에 등장한 날이었다.

미샤는 아름다울 뿐 아니라 사랑스러웠고, 우아했다.

그녀에게는 파티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무심결에 한 번 더 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었다. 하지만 로카르드 카이델 공자는 그런 그녀를 오히려 자기 쪽으로 빨아들였다.

그의 중력은 거대하여 기숙사 방에 틀어박혀 공부하던 생도들까지 스스로 휴식관에 나와 보게 했다.

그 로카르드 카이델 공자가 마침내 아카데미에 나타났다고.

미샤는 휴식관 복도를 우연히 지나다 그를 발견했다. 그는 키가 커 생도들에게 둘러싸여서도 얼굴이 잘 보였다.

로카르드는 미샤의 상상과 완전히 달랐다.

자원하여 전쟁에 참여하여 2황자의 목숨을 구했다기에, 그녀는 날 때부터 검을 잡은 거칠고 잔인한 남자를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아름다웠다. 그의 검은 머리카락 말단이 관자놀이나 귓가에서 슬쩍 굽이쳐 만들어 낸 곡선은 그가 섬세한 미감을 가진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

사람을 바라볼 때 그의 눈은 생생한 빛을 내며 열려 있었다. 그 안에는 그녀가 본 적 없는 단호함과 열의가 서려 있었다.

그는 새 아카데미 제복이 불편하다며 웃었지만, 미샤는 제복이 그토록 잘 어울리는 남자를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소년과 사내의 얼굴을 동시에 드러내며 보는 사람의 시각을 기만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타가르의 새끼 사자로 불리며 젊은 귀족 세대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떠오른 그가, 다른 이들을 살짝 깔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라면 당연히 그렇게 했을 테니까.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무도 그를 싫어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생도들은 그에게 2황자 전하가 어떤 분인지, 정말로 그분의 목숨을 구했는지, 아마타족은 얼마나 야만인인지 따위를 쉴 새 없이 물었다.

그들 상당수가 초면임에도, 로카르드 카이델은 스스럼없되 진솔하게 대답했고, 생도들은 저절로 ‘아!’라던가 ‘어머, 저런’ 따위의 감탄사를 냈다.

그는 뻐길 의도가 없었으며 최소한의 사실을 말하는 것만으로 듣는 사람을 경탄시키며 휘어잡고 있었다.

그는 말솜씨뿐만 아니라, 이미 큰 업적을 이룬 후에도 드러내는 겸손한 태도 때문에 더욱 빛났다.

그가 내는 빛과 아름다움은 절대불변의 진품이었다.

미샤는 충격으로 멍해졌다. 그때 먼 곳으로부터 자신을 향하는 집요한 시선을 감지한 로카르드가 그녀를 향해 눈을 돌렸다.

미샤는 입구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가 달아났다. 남자를 엿보다니, 자신이 어쩌다 이렇게 수치스러운 짓을 저질렀는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날, 밤새워 뒤척였다. 생도들이 공부하느라 밤을 밝혀 둔 시각에, 그녀는 캄캄한 방에서 로카르드 카이델 공자를 생각하느라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음 날, 차기 시험 날짜가 고지되자 미샤는 방으로 돌아와 책을 펼쳤다. 그녀에게 아카데미에 머물러야 할 확실한 이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 * *

얼마 뒤, 그녀가 혼자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돌아갈 때,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로아르 양.”

쿵, 혹은 쾅.

그의 나직한 미성은 미샤 로아르의 가슴을 그런 식으로 가격했다.

로카르드는 도서관 앞임을 고려해 그녀를 조용한 목소리로 불러 세우고는, 빠른 걸음으로 그녀 앞으로 왔다.

긴 다리 탓에 보폭이 커 그것은 아무 수고도 들지 않는 일처럼 보였다.

“저는 카이델가의 로카르드라 합니다.”

미샤는 창문이 별로 없는 복도의 낮은 조도가 자신의 상기되는 낯빛을 가려 주기를 바라며 조그맣게 인사했다.

“미샤…… 예요. 저를 어떻게 아시고…….”

“대부분의 동기 생도와 인사했는데, 미샤 양과는 인사를 나누지 못한 듯해서요. 세 번째 사자의 따님이 아니십니까.”

“감사합니다.”

미샤는 자신의 목소리가 이렇게 조그만 것이 불만스러웠다.

하지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상기된 얼굴과 당황한 듯한 태도, 조그마한 목소리가 자신의 여성성을 오히려 돋보이게 할 수도 있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제, 제복이 잘 어울리시네요.”

“감사합니다.”

산맥에서 전쟁을 치르고 왔다는 이 남자는 애교스럽게 눈을 휘어 접어 웃을 줄도 알았다.

그 사실은 미샤를 놀라게 했다. 심장이 다시 쿵쿵, 하고 반응했다.

“저, 제가 그동안 결석하는 바람에 그러는데 질문을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네. 뭐든지요!”

뜻하지 않게 조그맣게 소리쳐 버린 미샤는 얼굴이 더 달아올라 눈을 내리깔았다.

“외국의 무역 항로에 관해 혹시 어떤 수업이 진행되었는지 알려 주실 수 있을까요? 스마일란이나 혹은 공해의 정보라던가요.”

“외국 무역 항로요? 저기, 저는 장사 쪽은 잘……. 수업 때도 들은 기억이 없어서요.”

“아, 그런가요? 제가 대충 전해 들은 모양입니다. 학사 사무실에 가서 확인하는 게 낫겠군요.”

“네……. 그러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도움이 못 되어 드려 죄송해요.”

“저야말로 귀찮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로아르 양.”

정중하게 묵례하고 돌아섰을 때, 로카르드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스마일란을 포함하여 인접국 무역 항로에 관한 문제는 아카데미 1, 2년 차 학생 수업에서는 다뤄지지 않는다. 실전과 직접 연관된 문제는 3년 차 생도들이 토론 준비를 위해 집중적으로 학습했다.

로카르드는 사실 참전하기 전에 아카데미 조기 입학을 준비했었다. 입학을 넘어 아카데미 과정을 월반하는 수준으로 교육을 마쳤기에 이미 무역 항로 수업 내용은 알고 있었다.

그러니 로카르드 카이델이 얻고 싶은 답은 수업 진도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바로 미샤 로아르의 지성.

그의 부친인 첫 번째 사자 테란 카이델 공작이 무로 황제의 곁에 우뚝 섰다면, 세 번째 사자 헬리든 로아르 백작은 문으로 황제를 보좌하는 자였다.

로아르 백작의 지성과 문제 해결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는 정파성에 속박되지 않는 유연한 처신으로 귀족들의 고른 존경을 받고 있었다.

로카르드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고작 로아르 백작의 사생아가 2황자의 주의를 끌 만큼 똑똑하다면, 적녀 미샤 로아르는 과연 어느 정도일까.

미샤가 로리샤만큼만 똑똑하다면, 2황자 그레이언이 원하는 ‘흠 없고 유능한 인재’ 자리에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부친들의 입장이 문제가 될 터이지만, 그것은 자신의 능력으로 어떻게든 돌파해 볼 작정이었다. 자식 세대가 선대의 공과 과를 무조건 답습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방금 만난 미샤에게서는 로아르 백작의 흔적이 전혀 엿보이지 않았다.

무역항로에 대해서는 모른다 해도, 공해의 해적 문제는 아카데미 입학시험 수준에서 다루는 영역이었다.

그런데도 미샤 로아르는 그의 질문에 순수하게 무지한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퍽 아름답게 빛났다. 하지만 그 빛은 그가 제 기억에 남기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로카르드는 복도를 걸어 멀어지자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렸다.

“이복이라지만 자매인데, 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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