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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다시 처음부터 (11/155)


11화. 다시 처음부터
2023.03.15.


“시한이 있나요? 아니면 영원…… 히요?”

“시한부.”

“저기……, 제가 답을 잘못하면 혹시라도 백작님께…….”

“전혀.”

어떠한 불이익도 없을 것이라고, 그레이언 전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어쩐지 그것이 거짓말 같지는 않아서, 나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더듬거리며 말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제브론 해변이 참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상대를 이리 초대하시는 건 어떨까요? 오가는 동안 시간이 소요될 거고, 이 해변을 보면 누구나 눌러앉고 싶을 테니 시간을 더 쓸 테고요…….”

전하의 미간은 살짝 일그러졌고, 카이델 공자의 눈은 살짝 커졌다. 각기 무슨 반응인지 알 수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전후 상황을 다 말해 주지도 않으면서 질문하는 것도 싫었고, 그렇다고 내게 상황을 말해 주는 건 더 무서웠다.

대체 승전 지휘관인 2황자 전하가 왜 이런 땅끝에서 고민이나 하고 자빠지셨……, 계신 거냐고.

그레이언 전하가 대답했다.

“그래. 나도 제브론 해변이 좋아. 우리는 그 점에서 공통점이 있군.”

내가 어색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하자 전하도 옅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이번에 아카데미에 입학했다지? 여기 로카르드는 수석을 했어. 잘 보여 두어 나쁠 것 없을 거다.”

아아악! 아카데미!

아주 옷에다가 나는 아카데미 근처에도 못 가 본 사생아라고 써 붙이고 다닐까 보다.

아카데미 이야기가 나왔을 때 카이델 공자가 달갑지 않다는 표정을 지은 건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내가 백작님과 너무 닮은 게 죄라고, 나는 남은 인내심을 박박 긁어모아 점잖게 대답했다.

“저를 로아르가의 적녀 미샤 양과 착각하신듯합니다.”

내 대답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 듯해서 그냥 쐐기를 박았다.

“저는 사생아입니다. 전하.”

“그런가. 알아 두지.”

“감사합니다.”

이런 손끝을 피클에 절여 먹을.

대체 내가 왜 거기 감사해야 하는데.

하지만 황족을 상대로 사용할 수 있는 어휘는 그게 다였다. 황공하거나 황송하거나 그런 것뿐이다.

소통하는 어휘가 지극히 제한되어 있다는 건 그 자체로 권력의 차이를 말했다. 직접 대화해 보니 그것이 더 절실히 느껴졌다.

“즐거운 대화였어. 로아르.”

“이만 물러가도 될까요?”

“기꺼이.”

“타가르에 영원한 광영을.”

나는 예를 갖추고 그 방을 벗어났다. 그리고 문을 닫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내 방으로 달렸다.

* * *

로카르드는 로리샤가 달려가는 발소리가 멀어지자 굳은 얼굴을 펴고 폭소를 터트렸다.

“하하하! 전하, 쟤 진짜 웃기지 않나요?”

“흠.”

그레이언의 얼굴이 시큰둥하여, 로카르드는 금세 표정을 정리하고 말했다.

“좋은 생각 아닙니까? 오를 전하를 이리 병문안 오시게 하는 방법 말입니다.”

그레이언은 두 사자가 각 파벌의 이익을 참고하여 전후 보상안을 협의할 때 참전 지휘관으로서 조언 역을 했다. 그 협의가 그가 요양하고 있는 이 제브론에서 열린 이유였다.

황제를 대신하여 군을 이끈 그레이언이 보상안을 직접 발표하는 것이 최상이었지만, 황후가 끼어든 지금 그것까지 욕심내기는 어려웠다.

그저 전쟁의 과실이 1황자 오를의 입으로 공표되는 일을 막는 것이 최선이었다.

“형님 전하께서 어지간히도 오시겠어. 실현이 어렵다.”

“‘전하께서 제국의 철광석을 확보한 전쟁에서 부상까지 얻으셨는데 1황자 전하께서 치하의 뜻을 공개적으로 표하신 적이 없다. 이것은 황가 내부 갈등의 징후가 아닌가.’ 타르간지 논평 주제로 어떻습니까?”

그레이언은 그제야 피식 웃었다.

“악마 같은 놈.”

로카르드는 즐거운 듯 궁리했다.

“내년에 아카데미 입학시험을 치르게 할까? 바로 궁으로 들이는 게 나을까요, 전하?”

하지만 그레이언은 잠잠했다. 로카르드가 시선을 맞춰 오자 그가 말했다.

“들었잖아.”

로카르드의 눈썹이 잔뜩 일그러졌다.

“사생아라서요?”

그레이언은 느긋한 걸음으로 객실로 돌아가며 말했다.

“쓸 만한 아이인 건 인정하지만 내 주변에 약점이 생기는 건 사양이야, 로카르드. 기왕 아카데미에 들어갔으니 거기서 주워 와 봐. 흠 없고 유능한 인재로.”

아마타전에서 돌아오니 황궁에 그나마 몇 되지 않던 2황자 쪽 사람들이 모두 물갈이되어 있었다. 황후의 입김이었다.

로카르드는 그것을 새 인재를 찾는 기회로 받아들이고 있었으나, 2황자의 기준은 예상 밖으로 까다로웠다.

앞으로 시작될 진검승부에서, 그레이언 타가르는 등을 맡길 사람이 필요했다. 제가 먼저 찔려 나자빠질 인간은 처음부터 잘라 내는 게 나았다.

로카르드는 그의 생각이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동의하지도 않았다. 새로이 나타난 이 흥미로운 대상을 충분히 살펴본 다음 반박해도 늦지 않았다.

일은 그들의 예측대로 되었다.

다음 날 수도의 유명 일간지 타르간에 로카르드가 말한 요지의 논평이 실리자, 1황자는 바로 제브론으로 출발했다.

그다음 날 신문에는 1황자 오를이 2황자의 병문안을 위해 그가 요양 중인 모처로 떠났다는 기사가 실렸다.

카이델 공작이 전후 보상 최종안을 가지고 황궁에 도착한 것은 1황자가 수도를 떠난 후였다.

그리하여 전후 보상안은 황제의 입으로 공표되었다. 모두가 만족할 만한 내용이었다.

3. 처음부터

돌이켜 보면 나는 약초 냄새가 싫지 않았다. 우리 오두막에서 늘 나던 냄새, 엄마의 머리카락에 은은하게 배어 있던 냄새였으니까.

나는 시내의 약재상에 사흘 걸러 한 번꼴로 얼굴을 비추다가 슬금슬금 간격을 줄여 가고 있었다.

내게 자리를 빼앗길까 우려한 약재상 점원들이 슬슬 경계심을 드러내기 시작했지만, 나는 먹을 걸 뇌물로 바치며 뻔뻔하게 엉덩이를 밀어 넣고 있었다.

물론 주인 할아버지는 좋아했다.

거기서 하루를 보내고 돌아오면 내 옷에서도 약초와 약재의 냄새가 났다. 그걸 맡으면 마음이 편해졌다.

나는 약재상 주인 할아버지가 다음에 한 번 더 취직하라고 하면 못 이기는 척 승낙할 생각이었다.

백작저로 돌아오면 약초학과 식물학책을 탐독했다. 지난 몇 년간 공부라면 이골이 나서, 이 정도 공부는 우습지도 않았다.

미샤가 아카데미에 들어간 후 저택이 조용해져서, 내게는 최상의 환경이었다.

약재상 점원들에게 먹인 뇌물의 약발이 슬슬 떨어져 갈 때쯤엔, 나는 공부한 걸 적당히 써먹으며 아는 척할 수도 있게 되었다.

약재에 관한 빠삭한 지식은 손님들과의 소통을 원활하게 하면서 매상과 직결되었으므로, 그들도 이제는 슬슬 포기하는 느낌이었다.

그런 걸 보니 나는 진작에 이쪽으로 나갔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오후, 희끄무레한 로브를 입은 남자가 가게에 왔다.

낡아 색이 바랜 로브가 특징 없는 외양이었지만 자주 세탁하여 낡아졌을 뿐, 나는 로브의 고급 원단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가게를 쓱 둘러보더니 물었다. 작고 조곤조곤한 목소리였다.

“만다리오사와 개뜸북풀도 취급합니까?”

“만다……, 그런 건 없는데요?”

마침 입구를 지나던 점원이 대답하자 그는 조용히 돌아섰다.

그 두 가지 식물은 흔히 사용되는 약초가 아니었다. 그 풀들을 원하는 사람들은 한 부류뿐이었다. 연금술사들.

어제 책에서 본 걸 찾는 사람이 바로 나타날 줄이야.

나는 얼른 다가가 말했다.

“연금술 재료 식물들을 수급할 수 있는지는 좀 확인해 봐야 해요. 그런 건 주인어른이 결정하시거든요.”

“아.”

“차를 한잔 대접해 드릴 테니 잠시 기다려 주시겠어요?”

그는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내가 끌어당기는 대로 가게 안으로 따라왔다.

어지간한 약재상에서는 이름도 모를 식물인데 내가 연금술 재료라고 아는 체하니 믿음이 생겨 그러는 것이었다.

“작두콩차 어떠세요?”

“좋아요. 고마워요.”

나는 헤쭉 웃고 차를 낸 다음 안채로 달려갔다.

어쩌면 이건지도 모르겠다고, 오랜만에 기분 좋은 흥분감이 몰려왔다.

연금술사란 실재하나 싶을 정도로 희귀한 직업이었다. 그들이 사용하는 재료가 특수한 만큼, 거래를 한번 트면 고액 거래가 가능했다. 이것은 나만의 시장을 개척할 기회인지도 몰랐다.

나는 약재상 주인 할아버지에게 그의 주문에 관해 설명하고 구할 수 있는지 물었다.

연금술사란 가난한 주제에 돈을 물 쓰듯 하는 유일한 직업이라고, 이문은 충분히 남을 거라고 덧붙이면서 말이다.

할아버지는 내 말을 다 들은 후에 오만상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이게 장사가 되냐?”

나는 그가 이윤이 아니라 수고할 가치가 있는지를 묻고 있음을 깨달았다.

유통로를 뚫고 채집상 수수료까지 고려하면 초기 비용이 꽤 든다.

그 부담이 비교적 적더라도 남는 이윤이 미미하다면, 적자 유무를 떠나서 이 일은 접어야 할 테다. 그 시간과 노력을 이윤이 더 남는 곳으로 돌려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해 보지 않은 일의 결과를 알 리 없다. 하지만 해 보지 않으면 그것을 영영 알 수 없게 된다.

나는 근엄한 표정을 짓고서 힘차게 끄덕였다.

“돼요. 할아버지. 연금술이라니까요?”

마치 내가 금을 만들어 내기라도 할 것 같은 대꾸였다.

할아버지는 뭐라고 구시렁거리며 오래된 점원을 불러 누구에게 연락하라고 지시했다. 그라면 네가 말한 걸 구해 줄 거라며.

그가 평생 구축해 온 유통망의 위력은 그 정도였다.

나는 손님에게 돌아가 기쁘게 말했다.

“저희도 처음 취급하는 거라 넉넉하게 닷새는 주셔야 해요. 물론 그 안에라도 구해지는 대로 바로 배달해 드리겠지만요. 괜찮으신가요?”

그는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좋아요. 기다리죠.”

그가 선금을 치르고 적어 준 배달지는 뜻밖의 장소였다.

내가 그걸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는 소리 없이 웃고는 몸을 돌려 사라졌다.

나는 저렇게 소리 내지 않고 움직이는 사람을 처음 보았다. 말도 안 되는 직업이나 그런 희한한 점이 왜인지 좀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공책의 글자를 다시 내려다보니 내가 또 내 무덤을 팠나 싶었다.

“아아…….”

「제3황궁 약제실 휘니드 로이만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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