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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제브론 해변의 남자들(3) (10/155)


10화. 제브론 해변의 남자들(3)
2023.03.14.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나를 보았다가, 순간 눈빛이 흔들렸다. 나를 알아본 것이 분명했다.

그걸 깨닫자 어떻게든 쥐어짜 내려던 내 목소리도 쏙 들어가 버렸다.

내가 입술을 파닥거리기만 하자, 백작님이 대신 말했다.

“내 딸 로리샤랍니다.”

“저는 로카르드 카이델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로아르 양.”

능글능글 웃으며 대답하는 그의 목소리는 내게는 이렇게 들렸다.

‘너 딱 걸렸어.’

“카이델 공자님.”

나는 겨우 그렇게 말하며 머리를 숙였고, 공작님이 영애께서 음전하여 백작님께서 자랑스러우시겠다 어쩌고 하는 걸 들으며 숨을 참았다.

인제 보니 아까 해변에서 본 깜장 머리도 이 인사였다. 잘 정리된 그의 머리카락 색상은 남은 내 인생에 대한 암시 같았다.

새카만 암흑.

로카르드 카이델 공자는 친근감을 표시하듯 물었다. 그것은 얼핏 들으면 해변 호텔에 있는 사람에게 적절한 사교적인 질문처럼 들렸다.

“로아르 양은 산책을 좋아하십니까?”

“아니요, 집 밖은 무서워서요.”

공작님은 내가 귀여운 말을 한다는 듯이 웃었다. 백작님은 내가 때로 시내를 돌아다니는 걸 알았지만 분위기상 웃었다.

하지만 나는 진심으로 뱉은 말이었다. 이제는 무서워서 집 밖에 못 돌아다니겠다.

나도 아마타전의 승전과 군의 귀환 소식과 함께, 2황자와 첫 번째 사자의 적자의 무용담을 들어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카이델 공자를 타가르의 새끼 사자라고 부르며 영웅시했다.

내 운이 사생아로 태어나 젊은 영웅 카이델 공자를 치한으로 몰 정도로 처참한 수준이라면, 나는 방 안에서 늙어 죽어 버리는 편이 나았다.

그런데 내 대답을 들은 카이델 공자가 한쪽 입꼬리를 슬쩍 들어 비웃는 게 아닌가.

나는 그의 표정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왜요, 번화가 밤거리도 잘만 돌아다니더니.’

숨이 턱턱 막혀서 물을 마시고 잔을 놓았는데, 그게 서비스 플레이트 테두리에 탕! 하고 부딪치고 말았다.

고상한 두 사자님들은 그런 사소한 일은 못 본 척해 주었지만, 카이델 공자의 입꼬리는 다시 움찔거렸다.

그가 내 실수를 얼마나 고소하게 여기는지가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대놓고 비웃지 않는 것이 더 빈정 상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길고 긴 정찬이 끝날 때까지 꼼짝도 할 수 없는 몸이었다. 진짜 지옥은 따로 있었던 것이다.

그때 하인이 들어와 카이델 공자에게 귀엣말을 했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용서하세요. 아버님, 로아르 백작님.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자 공작님이 나직이 물었다.

“부르시는 게냐?”

“네.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백작님.”

“물론입니다. 당연히 가 보셔야죠.”

나는 로카르드 카이델 공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손님들에게 사과의 뜻을 담아 묵례하고 떠나는 동작을 빤히 바라보았다.

통례를 벗어난 적은 나이에 군대를 이끌고 참전했다더니, 그의 몸에는 내가 본 적 없는 절도와 힘이 배어 있었다.

그것은 귀족의 교양이었으며 동시에 타고난 의무를 역경 속에서 쟁취해 낸 자에게 주어지는 품위였다.

나는 그때 어떤 까마득함을 느꼈다. 마치 아카데미 별관의 담을 볼 때처럼.

백작 부인이 잘못 사용한 말인 ‘선택된 자들만의 소양’은 바로 저런 것일지도 몰랐다.

물론 그의 놀랍도록 잘 다듬어진 얼굴, 움직이지 않을 때마저 힘이 느껴지는 비율 좋은 몸, 그리고 미성이 그러한 분위기를 북돋우는 것도 사실이었다.

동시에 그가 재수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이 변한 것도 아니라서, 카이델 공자는 내게 생경하고도 이중적인 감정을 느끼게 하고 사라졌다.

나는 누군지 몰라도 그를 불러낸 사람에게 마음속으로 두 손 모아 감사했다.

그때 공작님이 백작님에게 말했다.

“이런, 영애의 안색이 좋지 못하군요.”

그러자 백작님이 대답했다.

“먼 길을 오느라 여독이 쌓여 그런 모양입니다. 로리샤, 돌아가 쉬겠니?”

나는 두 사자님의 연극이 눈물 나게 고마웠다.

공작님은 내 또래마저 없으니, 그러잖아도 긴장한 내가 더 큰 실수를 하기 전에 말을 꺼내 준 것이 분명했다. 존중해야 하는 상대의 망신을 목격하는 건 서로 불편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냅킨을 살포시 놓으며 머리를 숙였다.

“두 분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러면 죄송하게도 일어나 보겠습니다. 카이델 공작님, 백작님.”

공작님은 내게 가볍게 끄덕여 주었고, 나는 최소한의 인간적 품위를 지키며 퇴장할 수 있었다.

‘십 년은 늙은 것 같아!’

그렇게 생각하며 식당 문을 닫았을 때, 나는 꺅 소리를 지를 뻔했다.

전실 입구 문에 카이델 공자가 삐딱하게 기대서 있었다. 나를 향해 사악하게 웃으면서.

‘저건 악마야.’

그자는 나더러 ‘따라와.’ 하듯이 몸을 돌려 앞장섰다.

나는 그 웃음이 던지는 협박을 바로 이해하고 부들거리며 그를 따라갔다.

그는 복도 끝의 방문을 열고 들어갔지만, 나는 그와 단둘이 한 방에 있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문을 연 채로 말했다.

“저기, 하실 말씀 있으면 밖에서…….”

하지만 안에서 대답한 것은 다른 목소리였다.

“괜찮으니 들어와.”

내 입은 그대로 굳었지만, 내 몸은 홀린 듯이 문을 닫고 들어가고 있었다.

안에는 아까 바위 언덕에서 만났던 기사가 앉아 있었다. 문제는 그의 가슴에 달린 방패 속 사자의 휘장이었다. 황족의 표시 말이다.

나는 제복을 갖추어 입은 그를 보고 그제야 은발이 타가르 황족의 특징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말로만 들었지 황족을 본 적이 있어야 알아보지!

나를 향해 보이는 차가운 웃음에는 호의란 전혀 섞여 있지 않았다.

내게 유감이 있어서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애초에 남의 호감이 불필요한 사람이라고, 내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타가르의 작은 태양 그레이언 2황자 전하십니다.”

옆에 선 카이델 공자의 말에 나는 뻣뻣하게 예를 올렸다.

“타카르에 영원한 광영을. 로리샤 로아르가 2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아까는 몰라뵈어 송구합니다.”

“로아르 양은 주로 몰라보는 게 취미입니다. 전하.”

나는 이를 빠득 물며 카이델 공자를 노려보았다.

이건 자칫하면 목숨이 걸린 상황이다. 나는 단호하게 해명해야 했다.

“평복을 하시어 몰라뵈었습니다. 신분을 숨기려 평복을 하셨는데도 제가 알아뵈었다면 그거야말로 송구한 일이 아닌가 합니다.”

그레이언 전하의 눈이 커졌고, 카이델 공자는 이것 좀 보라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때는 상황이 그랬으니 오해한 거지, 그걸 이렇게 복수하다니!

그레이언 전하가 말했다.

“사자들 사이에 끼어서 밥이 넘어가지 않을 것 같아 불렀어.”

무슨 말인가 싶어 전하를 바라보니 그가 말했다.

“로아르 백작은 예와 격을 중시하는 사람이니, 공작과 함께 하는 자리에서 로카르드가 자리를 뜨면 그대를 내보낼 것 같아서.”

내가 그 방에서 쫓겨난 건 내 덜떨어진 예와 격 덕분이라고 해야 했지만, 대충 그렇다 치자. 어쨌든 결과는 같으니까.

나는 욱하는 기분으로 물었다.

“그냥 부를 생각은 못 하셨고요?”

“몰래 보고 싶어서.”

그레이언 전하는 그렇게 대답하고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재빨리 머리를 숙였다.

“이 일은 함구하겠습니다.”

그러자 그레이언 전하는 웃으며 말했다.

“아까 그대가 한 이야기를 로카르드에게 해 주었어. 너와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영애를 만나 신기하다고 말해 줬어.”

“네. 전하.”

“이놈은 미친놈인데 말이야.”

“전하.”

카이델 공자는 처음으로 당혹한 기색을 내비치며 작게 불렀다. 아마 전하가 나를 심하게 대한다고 느껴서인 듯했다.

나는 그게 웃겼다. 내가 이 정도로 당황할 거라고 생각하다니, 살짝 모욕적이었다.

나는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미친놈이라고?

“어쩐지…….”

“뭐라?”

“아닙니다. 전하.”

그레이언 전하는 웃음을 터트렸고, 카이델 공자는 미간을 찌푸리며 팔짱을 꼈다.

그가 슬슬 열받아 하는 게 즐거워서, 나는 오랜만에 기운이 돌아오는 걸 느꼈다.

“내가 질문 하나 해도 되나?”

“하문하십시오.”

“왜 안 쫄지? 황족이라 하나 2황자 정도로는 그대를 감동시키기 부족한가?”

갑작스러운 질문에, 팔짱을 끼고 있던 카이델 공자는 손바닥으로 눈을 가렸다.

나도 당황스러웠다. 이게 몰래 불러내서 할 질문인가?

“그게…….”

“말해.”

“현실감이 없어서요.”

“꿈이라도 꾸는 것 같다는 건가?”

“그게 아니라…….”

재빠른 부정에 그레이언 전하는 미간을 좁혔고, 카이델 공자는 내가 무슨 소리를 할지 약간 겁먹은 표정이 되었다.

나는 속으로 흣, 웃음이 나왔다.

좋네. 그 표정.

“저는 황족은 보통 사람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화장실도 안 가는……. 죄송합니다. 제가 긴장해서 다른 표현이 생각이 안 나서요.”

“너무 평범하다는 거지? 평복을 입으면 티도 안 날 만큼. 걱정 마, 그대는 전혀 긴장한 것처럼 안 보이니까.”

그레이언 전하는 웃음을 짓누른 표정으로 계속하라고 손을 저었다.

“아니요! 그런 말씀이 아니고……. 아닌데요.”

카이델 공자가 마지못한 듯 끼어들었다.

“로아르 양은 밤길에 치한에게 혼자 맞설 정도로 당당한 성격입니다.”

저게 진짜!

“너는 그녀를 오늘 처음 만난 게 아니었어?”

“예를 든다면 말입니다.”

아주 능글능글, 이렇게 단시간에 이만큼 미워지는 인간은 또 오랜만이었다.

즐겁다는 듯 웃던 그레이언 전하가 조용히 웃음을 삭이며 내게 물었다.

“내가 질문이 하나 더 있는데 말이야.”

하. 싫다. 피곤하다.

“하문하십시오.”

“사람 입을 틀어막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뭘까?”

상대는 황제 폐하의 둘째 아들 2황자 전하다. 금력이든 무력이든 동원하지 못할 것이 없다. 그런 사람이 입을 틀어막지 못해 고민하는 상대라면…….

끄으. 내 운이 이렇지.

갑자기 골이 지끈거렸다. 묻기도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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