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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제브론 해변의 남자들(2) (9/155)


9화. 제브론 해변의 남자들(2)
2023.03.13.


“예? 뜻은요, 무슨.”

“내가 일어나게 만들 건가?”

순간 욱해서 싸울까 싶었지만, 해변을 거닐며 내 영혼이 많이 청소된 탓에 나는 욕설이나 독설을 날리기가 힘든 상태였다.

상대는 참전 기사다. 참자, 참아.

나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이곳이 얼마나 더 휴양지로 남아 있을까 싶어서……. 진짜 별말 아니었어요. 그저 지금을 즐기시라는 말이었어요. 저도 그렇게 하고 있거든요.”

“아직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정말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는 퍽 집요했다.

그래, 내가 방에 앉아서 주는 밥 먹으면서 책만 파는 동안, 당신은 툰바르산맥에서 목숨 걸고 싸웠으니까.

나는 앞으로 괜한 소리는 지껄이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이마에 주름을 잡았다.

언덕 위의 바닷바람은 좀 쌀쌀했다.

“제국이 아마타족을 복속시켰잖아요.”

“그런데?”

“그러면 중요한 철광석 수입 경로를 잃은 아가엘 왕국은 새 경로를 찾아야 할 거고요.”

아마타는 툰바르산맥 지류 끝자락에 자리 잡은 부족이다. 그들은 원시적인 국가 형태를 유지하면서도 철광석을 캐어 교역하며 주변국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하지만 툰바르산맥 너머 아가엘 왕국이 아마타족을 유혹해 제국과의 철광석 거래를 단절시키고 자신들과 독점 거래를 트게 했다. 그것이 이번 전쟁의 원인이었다.

곧, 이번 전쟁의 상대는 실제로는 아마타족이 아니라 아가엘 왕국이었다.

아카데미 입학시험을 준비하면서, 나는 과거뿐 아니라 현재의 정세도 신경을 써서 공부했다.

그러니 지금은 내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이야기들이었다.

“그 상대로는 바다 건너 스마일란이 제일 유력하잖아요? 거리상으로나 지금까지의 외교 관계를 봐서도요.”

“그게 이 해변과 무슨 상관이라는 거지?”

“음. 제브론은 아가엘 왕국과 스마일란의 교역 항로에 가장 근접한 제국 영토거든요. 아까 호텔 로비에 걸린 지도를 보니까 그렇더라고요?”

“…….”

“아마타 전쟁도 있었던 데다 공해의 해적 문제도 있으니, 아가엘 왕국에서는 그 중요한 교역에 군함을 보낼 가능성이 높고, 그러면 제국에서도 관례적으로 해상 병력을 배치해야 하는데 위치상 여기가 적소니까…….”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면 호텔 영업은 힘들지 않겠어요? 쉬러 와서 창밖으로 군함과 병사들을 보고 싶은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

“괜히 들었다 싶으시죠? 해변을 걷다 보니까 이 생각 저 생각 나서 아무 말이나 한 거예요. 저도 추억의 장소가 추억 속 모습대로 남아 있는 편이 좋거든요? 그러니까 잊어버리세요.”

그때 바위 언덕 아래에서 귀족 복장의 남자가 이쪽으로 올라오는 게 보였다. 하필 검은 머리카락이었다.

아우, 씨.

속에서 욕부터 나왔다. 나는 아마 검은 머리 노이로제에 걸린 모양이었다.

그리고 괜히 귀족과 마주쳐 ‘누구네 가문 아무개입니다. 아, 그렇게 잘해 주지 마세요. 저는 사생아거든요.’ 하고 말하는 절차를 거치고 싶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세 번째 사자의 가족에게 늘 지나친 친절을 보였는데, 내가 사생아라는 걸 알고 나면 얼굴이 썩곤 했다.

“혹시 땡땡이치는 중이세요? 저기 기사님 주인이 오시네요. 타가르에 영원한 광영을. 쾌차하시길 바랄게요.”

나는 재빠르게 말하고 얼른 바위 언덕 너머로 달려 내려갔다.

‘타가르에 영원한 광영을.’

그것은 황족에게 쓰는 인사말이면서 제국을 지키는 군인들에게도 존경과 예우의 의미로 쓰였다.

* * *

바위 언덕에 다 올라온 로카르드는 2황자 그레이언이 바라보는 바다를 함께 응시했다. 어느새 바람이 세찼다.

“이만 들어가시죠. 부상이 덧나십니다.”

“로카르드, 호텔에 누가 묵고 있지?”

퍽 무심하게 들리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로카르드는 의아하게 여겼다.

제브론 호텔은 황실 자금으로 운영하는 비공개 시설이다. 황가가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 있을 리 없었다.

“저희 아버님과 로아르 백작입니다. 백작은 아까 오후에 도착했습니다.”

“혼자?”

“딸을 데려왔답니다.”

“이번에 아카데미에 입학했다는?”

로카르드는 설핏 웃었다.

“전하의 상대로는 어리지 않습니까?”

“죽어 버려, 로카르드.”

로카르드는 낮게 클클 웃었다. 파도 소리와 어울리는 음색이었다.

“두 사자가 전후 보상 협상 초안을 마무리 지으면 다음 주에는 공표할 수 있을 겁니다.”

“늦지 않게 해. 참전자에 대한 포상은 빠르고 확실해야 한다.”

“…….”

“왜?”

“황후궁에서, 전하께서 하필 여기서 부상을 달래고 계시는 것에 대해 불만을 표시했습니다. 아마타 출정군은 해체되었으니 2황자의 신분으로는 종전 후에 행해지는 정치적 협상에 관여할 권한이 없다는 걸 지적하면서요.”

그레이언의 삐뚠 웃음은 퍽 사나웠다.

“……‘너는 개처럼 뛰기만 하라’는 건가.”

“웃으며 먹이를 나눠 주는 건 1황자 전하만의 역할로 돌리고 싶으시겠죠.”

“제국의 군대는 이제 제 개라 이거지…….”

로카르드는 웃지도 대답하지도 않았다.

음유 시인들이 이번 전쟁을 사랑하는 이유는 분명했다.

젊은 나이에 지병을 얻은 1황자를 대신해 출정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끈 용맹한 2황자.

그리고 함께 출정하여 혁혁한 무훈을 세우며 그의 목숨을 구한 카이델 공자와의 끈끈한 우정.

하지만 그건 음유 시인들이나 홀릴 이야기다.

2황자는 전장에서 죽음이 스쳐 간 부상을 얻었고, 1황자는 전쟁이 끝나자마자 그 공을 손끝으로 집어 한입에 털어 넣으려 하고 있었다.

부상이야 시간이 지나면 나을 테지만, 지금 처신에 따라서 향후 2황자의 입지가 결정될 터였다.

전쟁에서 돌아온 영웅이거나, 제 몫도 차지하지 못하는 형의 호구가 되거나.

그래서 방금 그레이언의 가벼운 대꾸에는 위험한 긴장이 서려 있었다. 로카르드는 부상으로 예민해진 황자의 분노에 침묵으로 거리를 두었다.

그레이언은 사악한 눈으로 로카르드를 바라보았다.

“아까 여기서 어떤 여자애를 만났거든.”

“…….”

“그 애가 너를 보고 내 주인이라던데?”

로카르드는 2황자의 보석 같은 녹안을 바라보았다.

그 험준한 산맥에서 2황자는 그에게 등을 맡겨 살아남은 전우였으나, 그러한 관계가 결국은 휘발하고 만다는 것 또한 그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레이언은 타가르다. 황족의 피에는 의심이 반절 섞여 흐른다.

하지만 2황자가 전쟁 부상이 채 낫기도 전에 마음속에 휘몰아치는 의구심을 곱씹기 시작한 것은 지나치게 빠르게 여겨졌다.

전쟁은 보이는 상흔만을 남기는 것은 아닐지도 몰랐다.

로카르드는 그레이언의 눈을 피하기는커녕 싸늘한 시선을 맞췄다.

“저는 2황자 전하께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대신 전하께서는 저를 첫 번째 사자로 삼아 운명을 같이하기로 하셨지요. 그것을 벌써 후회하시는 겁니까?”

로카르드는 충성을 말했으나 그것은 선언처럼 들렸다.

그러자 그레이언이 미소를 지었다. 웃을 때 더욱 차갑고 불안정한 그 눈매는, 그의 모후를 닮아 있었다. 그의 가장 무서운 정적을.

“그러고 보니, 너는 고양잇과니까. 그렇다면 되었어. 돌아가자.”

제브론 호텔의 음식도 맛있어야 할 텐데, 하며 그레이언은 가벼운 걸음으로 바위 언덕을 내려갔다.

로카르드는 그의 뒤를 따르며 이제 2황자에게 저 잠행용 복장을 벗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 *

해변의 이상한 남자에게서 벗어나 호텔로 돌아가니 복도에 백작님과 카이델 공작님이 있었다.

백작님이 이곳까지 온 이유가 저분과 만나는 것이었다니.

나는 순간 멈칫했고, 나를 발견한 백작님이 이리 오라는 듯 한 팔을 열었다.

“산책하고 오는 길이냐? 카이델 공작님께 인사드리거라. 제 여식입니다, 공작님.”

“카이델 공작님을 뵙습니다. 로리샤입니다.”

“오, 이번에 아카데미에 입학한 영애입니까?”

카이델 공작님은 멋있게 웃으며 물었고,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아무리 아카데미 입시가 귀족들 초유의 관심사라지만, 제국의 첫 번째 사자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니.

그러자 백작님이 먼저 대답했다. 참으로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대꾸였다.

“제 다른 여식입니다.”

카이델 공작님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백작님과 정치적으로 경쟁 관계에 있는 첫 번째 사자께서 세 번째 사자의 사생아에 대해 모를 리 없었는데 말이다.

“우리 일도 수월하게 끝났으니. 백작님, 영애와 함께 저녁 식사 어떠십니까? 마침 제 아들도 동행했습니다.”

백작님, 백작님? 안 돼요. 아버지? 안 된다니까요!

내 마음속 고함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백작님은 심지어 흔쾌히 대답했다.

“좋은 생각이군요. 로카르드 군을 만나는 것도 오랜만이군요.”

공작님은 하인에게 아들을 불러오게 한 다음 우리와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

가는 걸음걸음, 그동안 등한시했던 예법을 떠올리느라 내 머릿속은 전쟁터 같았다.

백작님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를 이런 자리에 부르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우리는 전실이 딸린 고급 개인 식당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식전 술이 나왔을 때, 깜장 머리가 들어왔다.

“늦어 죄송합니다. 로아르 백작님을 뵙습니다. 이런, 하나도 변하지 않으셨습니다. 백작님.”

“공자는 많이 변했습니다. 이토록 늠름해졌을 줄이야. 과연 아가엘을 누르고 제국을 승리로 이끈 주역답습니다.”

내가 아직 성년식 전이라 술을 마시지 못한 게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내 손에 술잔이 있었다면 쏟고 말았을 것이다.

카이델 공작님 옆에 앉는 깜장 머리는 내가 언젠가 시내에서 치한으로 몰아붙였던 바로 그 인물이었다.

‘백작님……. 저 이만 죽을래요.’

카이델 공자는 진심인 듯 정중하게 대답했다.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제가 한 일은 말 위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노력한 것뿐이랍니다.”

“겸손까지? 그건 과해요, 공자.”

백작님의 농담에 모두 웃었다.

그사이 카이델 공자는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와 인사할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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