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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제브론 해변의 남자들(1) (8/155)


8화. 제브론 해변의 남자들(1)
2023.03.12.


백작님과 단둘이 탄 마차 안에서, 나는 창틀에 몸을 붙이듯 기댄 채로 멍하니 생각에 빠졌다.

백작님이 출발 전에 한 말은 내내 내 뒷머리를 간지럽히는 기분이었다. 내가 백작님에게 거리를 둔다는 줄리아 선생님과 미샤의 말도 떠올랐다.

백작님이 내게 이런 말을 한 건 처음이었다. 그는 처음으로 내게 불만을 드러내는지도 몰랐다.

왜 나를 아버지 취급해 주지 않느냐고.

하지만 나는 그를 이미 너무 오래 백작님이라고만 불렀다. 내 혀 근육은 ‘아버지’라는 단어를 발음해 본 적이 없었다.

백작님은 분위기를 환기하고 싶은지 말했다.

“제브론 해변에 반하지 않는 사람은 없단다. 그 바다가 어떤 빛깔인지 알려 주랴?”

나는 의무감으로 대꾸했다. 미샤처럼 애교스러운 딸 노릇까지는 못 해도 대답이라도 꼬박꼬박 하자 싶었다.

“어떤데요?”

“거울을 보렴.”

“아. 네.”

바다 빛깔이 내 눈동자 색이라는 거다. 백작님이 내 기분을 돋워 주고 싶어 하는 건 알지만 좀 심했다.

“깨끗하고 맑은 기묘한 녹색 바다가 절경이란다. 큰 호텔이 하나 있지만 매우 한적하지.”

파리 날리는 큰 호텔이라니, 큰일 날 소리였다.

“확인은 하신 거예요? 도착했는데 호텔이 망했으면 어떡해요.”

백작님은 낮게 웃었다.

“그 호텔이 망하는 법은 없으니 걱정 말거라.”

“네.”

나는 쥐어짜 낸 의무감을 벌써 다 써 버리고 다시 유리창으로 옆머리를 기댔다.

사실 나는 미샤가 아직도 내 옆에서 속닥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엄마의 편지 이야기를 지껄이면서.

나는 백작 부인을 죽을 때까지 용서하지 못할 테지만, 지금은 지쳐 그녀를 미워하며 내 힘을 완전히 바닥내고 싶지 않았다.

백작님에게 편지 이야기를 해야 할까, 하지 말아야 할까. 왔다 갔다 하는 마음의 진자는 도무지 한 자리에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아카데미 입학에 좌절하고 나니 내가 미래를 기약한다거나 하는 짓은 의미가 없는 것 같았다.

내가 읽던 소설 속의 한 등장인물의 입버릇이 ‘나는 오늘만 살아’였는데, 이제는 나도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무엇이라도 가슴에서 덜어 내야 숨쉬기가 수월해질 것 같았다. 이제는 좀 설렁설렁, 편하게 살고 싶었다.

나는 입을 열었다.

“있잖아요, 엄마는 백작님을 그리워했대요. 백작님한테 돌아가기 원했나 봐요.”

백작님은 둔기로 얻어맞은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자기 옆, 내 반대편 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마차 안에는 깨기에는 너무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가 힘겨워하는 게 느껴졌다.

그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갑자기 어디서 나온 이야기냐?”

“그냥 그렇다고요. 그렇게 알고 계세요.”

백작 부인을 언급할 수는 없다. 그 비밀은 결국 백작님도 불행하게 만들 것이다. 나는 백작님을 다치게 할 정도로 미쳐 있지 않았다.

“…….”

“생각해 보니까, 백작님도 엄마한테 상처받았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요. 어떻게든 곁에 붙들어 두고 싶었던 여자가 달아나서 십 년씩 소식 끊고, 아이도 숨기고…….”

백작님은 겨우 피식 웃었다.

“어떻게 아니? 멜리아가 꿈에라도 나왔어?”

“그냥 안다니까요. 사실이니까 그렇게 알고 계세요.”

“…….”

“저 때문에 섭섭하세요?”

“로리샤. 나는 절대 네가 아카데미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제가 백작님이라고 불러서요.”

“…….”

그는 옅은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일 년에 한두 번은 너에게도 아버지 소리를 들어도 좋을 거다.”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알았어요. 백작님 생일 선물로 퉁 치면 되겠네요.”

“하. 이런.”

“아버지.”

“……!”

백작님은 놀라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입술을 달싹거리며 할 말을 찾고 있었다.

백작님이 나 때문에 당황하는 모습을 오랜만에 보니 기분이 좋았다.

“올해분이에요. 아버지 생신 지났잖아요.”

백작님은 고개를 획 돌려 창밖을 보았다. 표정을 숨기는 것이었다.

나도 내 쪽 창에 이마를 붙인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가슴이 눈치도 없이 콩닥거렸다.

아버지라니. 마치 내가 마지막으로 배운 외국어 같았다.

백작님은 좌석 위로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았고, 우리는 여관에 도착할 때까지 내내 말이 없었다.

* * *

나는 호텔에 묵기 위해 몇 개의 여관을 전전하며 이동하는 건 꽤 멍청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제브론 호텔 앞에 섰을 때 깨끗이 사라졌다.

거칠고 검은 바위 언덕에 선 새하얀 벽돌 건물은 수도나 로아르령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아름다움이었다.

배경으로 보이는 드높은 하늘, 은은한 파도 소리, 약한 짠 내음이 섞인 바람까지 모두 사람을 설레게 했다. 백작님은 내 표정을 보더니 빙긋 웃었다.

“들어가자, 로리샤.”

우리는 동관 꼭대기의 고급 객실을 얻었고, 백작님은 기꺼이 더 전망이 좋은 방을 내게 양보해 주었다.

프론트에 걸린 장식용 지도를 보니 이곳은 남부 해안 끄트머리에 있는, 특이한 모양으로 구부러진 형태의 곶이었다.

방으로 달려 들어가 발코니로 나가니 녹색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나는 그제야 백작님이 내게 어설픈 아부를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해안선의 물빛은 정말 내 눈동자와 닮아 있었다. 물결은 맑고 고요해 세상 어떤 일도 그 바다의 평정을 해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도 없는 테라스에서 잔잔한 파도 소리만 듣다 보니 가슴이 시원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아카데미에 못 간다고 죽는 건 아니잖아?’ 싶을 정도였다.

백작님은 내가 사생아라는 제약에 너무 매여 있다고 지적했지만, 그런 소리를 하는 건 세상에서 백작님밖에 없다.

내가 독립하고 싶다면 나는 이 세상에서의 내 한계를 받아들여야 했다. 아카데미 별관의 담처럼 까마득하게 보이는 한계를.

하지만 나는 금세 이 해변에 근심을 끌고 들어오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내 장래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기왕에 오늘만 살기로 결심했으니 일단은 지금을 즐겨 보기로 했다.

나는 편안한 신발로 바꿔 신고 해변으로 나갔다.

미지근한 바닷물에 손도 담가 보고, 새하얀 모래 속에서 예쁘게 닳은 조개껍데기도 골라내 보았다.

좁은 백사장을 따라 걸으니 바위 벽이 나타났다. 켜켜이 기울어진 단층 무늬는 그 자체로 해안의 장식물처럼 보였다.

그곳을 따라 바위 언덕 위로 올라갔다. 바위 끝에는 허름한 클록을 입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

바위에 퍼질러 앉아서도 곧게 편 등, 건장한 어깨가 두드러졌다. 하지만 나로서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피로가 그의 어깨에 얹혀 있었다.

그가 무심결에 팔을 움직여 허리춤의 검대 위치를 더듬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검을 지니지 않아서 헛손질이 되고 말았다.

검사가 할 법한 습관적인 행동이었다.

아마도 그는 얼마 전 귀환한 아마타전 참전 기사인 것 같았다.

지금 제국은 그들을 영웅으로 칭송하고 있었기 때문에, 참전한 자들은 지휘관부터 병사까지 온갖 파티에 참석하느라 정신이 없을 시기였다.

그런데도 이런 휴양지에 홀로 와 있다는 건, 그가 부상을 입었기 때문이거나, 이곳에 부상을 달래러 온 주인을 호위하기 위함일 터다.

하지만 일하러 온 사람이 저러고 앉아 있지는 않을 테니까 전자겠지.

내가 이만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내 기척을 느낀 남자가 고개를 획 돌렸다. 동시에 바람이 불어 그의 클록 후드를 훅 벗겼다.

후드 안에서 나타난 은발의 미남이 나를 쏘아보았다. 갸름한 얼굴에 날카로운 눈매가 범상치 않았다.

신경질적인 분위기는 전쟁의 후유증인지 원래 성격인지 알기 어려웠다.

“뭐 하는 놈이지?”

초면에 대뜸 던지는 말투가 까칠해서, 나는 뚱하게 대꾸했다.

“‘뭐 하는 년이지?’”

“……뭐라?”

“놈 아니고 년인데요.”

“……하.”

남자는 어이없어했다.

나도 남의 휴식을 방해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조금 억울했다. 내가 쉬기도 바쁜데 무슨.

나는 이만 저쪽 바위 언덕으로 건너가 보려고 몸을 돌렸다. 그곳까지 산책한 다음 호텔로 돌아가면 백작님이 볼일 마치고 돌아올 시간과 맞춤할 것 같았다.

“잠깐.”

나는 바닷바람에 흐트러지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붙잡고 돌아섰다.

“왜요?”

“너도 호텔에 묵고 있나?”

“왜요?”

남자는 내가 못마땅하여 잔뜩 인상을 쓰며 후드를 집어 썼다.

“좋아. 질문을 바꿔 주지. 너는 누구냐?”

“……하!”

나는 어이가 없어서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저기요, 초면에 그렇게 묵직한 존재론적 질문을 던지면 어쩌자는 거예요?”

그는 신경질을 참느라 불편한 신음을 흘렸다.

“너, 사람 말문을 틀어막는 습관이 있구나.”

오늘은 백작 딸내미처럼 차려입었는데도 이 남자는 따박따박 반말이었다. 내 평민 티는 아무래도 숨겨지지 않는 건지.

하지만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때서.

나는 반말로 대거리를 해 주려다가 그가 나보다 몇 살 연상으로 보여서 봐주기로 했다. 귀환 전사에 대한 예우이기도 했다.

“툰바르에서 돌아오셨어요?”

그의 눈썹에 짧은 경련이 지나가는 게 보였다.

“그렇게 보이나?”

“네.”

“어째서?”

그는 몹시 미심쩍다는 듯이 물었다.

의심 많은 인간 같으니.

나는 이 남자와의 대화가 슬슬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여기 올라오면서 검이 잘 있나 확인하려고 헛손질하시는 거 봤거든요. 기사님이세요?”

“비슷해.”

“전쟁 포상을 많이 받으셨나 봐요. 저 호텔 비싸다던데.”

물론 나는 호텔 숙박비가 얼마인지 모른다. 백작님이 선택한 호텔이니까 당연히 비쌀 거라고 짐작했을 뿐이다.

남자는 나직이 웃었다.

“너는 여기서 뭘 하지?”

“기사님의 것과 비슷한 질문의 답을 찾고 있어요. ‘나는 누구인가’보다는 훨씬 현실적인 걸로요.”

“아하.”

남자는 웃었는데, 소리는 거의 내지 않고 몸만 들썩거렸다.

나는 몸을 돌리며 인사했다.

“제브론을 ‘지금’ 충분히 즐기시길 바라요. 그럼.”

무심코 던진 말에 남자의 눈이 순간 매서워졌다. 어마, 깜짝이야.

“무슨 뜻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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