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재수 없는 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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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재수 없는 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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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재수 없는 영식
2023.03.09.
유명한 고급 식당 앞 도로는 멋있게 차려입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식당에서는 음식 냄새보다 불빛이 더 아름답게 흘러나왔다.
식사를 마치고 나온 사람들은 즐거운 듯 웃고 있었다. 나는 절대로 저렇게 웃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그들을 지나쳐 무작정 걸었다.
내가 얼마나 독하고 못돼 처먹었는지는 스스로도 자부하는 바였다. 내가 믿을 건, 나를 생존하게 하는 건 오직 그것뿐이었는데, 그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엄마를 창녀라고 생각하는 게 싫었다. 맹세코 내가 느끼는 모욕감 때문은 아니다.
어렸을 때 그런 말을 한두 번 들은 것도 아니다. 아비 없는 자식을 낳은 여자에게는 으레 그런 모욕이 따라붙었으니까.
하지만 그것과 이것은 다르다. 나를 도발하려고 지껄이는 말과 사실이란 전제하에 퍼지는 말은 비교할 수가 없다.
나는 엄마가 그런 모욕을 당하게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무책임하고 잔인하게 나를 떠난 엄마를 앞으로도 계속 미워하려면, 엄마에게 미안해할 만한 일을 만들어서는 안 되었다.
백작님도 문제였다. 귀족들의 오입질이야 이야깃거리도 아니지만, 그 당사자가 로아르 백작이라면 달랐다. 그는 깨끗하고 올곧은 사람으로 귀족들에게도 존경받고 있었다.
그런 그가 싸구려 창녀에게서 아이까지 얻었다는 소문이 난다면 황제 폐하의 신뢰마저 깨트릴 수 있었다.
내가 그 모든 일을 방관하고 아카데미를 졸업하더라도, 그 앞에는 백작 부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온 힘을 다해 내 앞길을 막겠다는 백작 부인의 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결국 내 노력 같은 건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니었던 거다.
백작 부인은 대체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했을까. 몇 개월째 내가 공부하느라 잘 자지도 못하는 걸 조용히 지켜보면서,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기다린 것일까…….
“염병할. 벼락 맞아 나동그라질…….”
“방금, 뭐라고 했지?”
문득 들리는 남자의 낮은 미성이 사나웠다.
후드 끝을 살짝 들어 앞을 보니 내 또래 귀족이었다.
나는 그제야 내 맞은편에 펼쳐진 광경을 눈에 담았다.
검은 머리카락에 큰 키. 허우대가 멀쩡한, 다시 보니 지나치게 잘난 남자가 어떤 평민 여자의 손목을 붙잡고 있었다. 여자는 겁에 질려 있었다.
하필 내가 그 사이로 다가가며 욕을 한 것이다.
저런 도련님이 왜 혼자 돌아다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당신한테 욕한 것이 아니라고 해명하기도 피곤했다.
게다가, 꼴을 보니 내가 욕을 계속해도 될 것 같았다.
신께서 내 눈앞에 악당을 보내사, 내 뼛속까지 파먹고 있는 분노와 무력감을 풀 기회를 주신 것이다.
손목을 잡힌 여자가 울먹이며 말했다.
“갑자기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어요. 제발 보내 주세요, 도련님. 이렇게 빌게요!”
저렇게 멀쩡하게 생겨선 길에서 낯모르는 여자나 희롱하고.
저런 놈들이 아카데미에 들어가서 제국의 장래를 갉아먹는 거다. 이제 내 알 바는 아니었지만.
내 알 바는 아닌데,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터질 것 같은 기분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내가 얼마나 막 나가는 중이었냐면, 내가 사고를 쳐도 백작님이 어떻게 해 주겠지 싶을 정도였다. 누구 코가 더 큰가 대 보면 제국에서 백작님을 이길 사람은 몇 없는걸.
나는 몹시 파탄스러운 정신 상태에서 삐딱하게 말했다.
“내가 방금 뭐라고 했는지 궁금해요?”
남자의 보기 좋은, 짙은 눈썹이 한쪽만 잔뜩 일그러졌다.
나는 그를 본 순간 내가 출세하긴 했구나 생각했다. 어렸을 적 나를 괴롭히던 촌장 아들놈은 똥자루 같았는데, 지금 내 앞에 있는 악당의 외모는 급이 달랐다.
말투는 재수 없기 짝이 없었지만.
“남의 일에 끼지 말고 갈 길 가라.”
“제가 이웃을 좀 내 몸처럼 사랑해서요. 좀처럼 남의 일로 여겨지지 않네요. 이봐요, 괜찮아요?”
여자는 울먹이며 대답했다.
“저는 지나가고 있었을 뿐인데……!”
“그 손 놓고 얘기하시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고 용기도 가상하다. 방금 한 거친 언사는 용서할 테니 이만 물러가라.”
내가 폭발해 버린 것은 다른 말이 아닌 ‘물러가라’란 말 때문이었다.
이 빌어먹을 귀족 놈들!
내 주변에는 고귀한 귀족 놈들의 밀도가 지나치게 높았다. 이러니 사람이 숨을 쉴 수가 있나!
“그놈의 손모가지를…….”
“……뭐?”
남자의 눈은 등잔만큼 커졌다.
“영식께서 길에서 이러시는 거, 양친께서 아시나요?”
“지금…….”
내가 오랜만에 한번 거하게 퍼부어 주려고 입을 열었을 때, 여자가 그의 손목을 뿌리치고 달아났다. 실로 바람 같은 속도였다.
남자는 내게 고함쳤다.
“놓쳤잖아!”
“……!”
나는 무슨 기가 실린 것 같은 남자의 고함에 놀라서 몸을 움찔했고, 그 때문에 내 후드가 툭 떨어지듯 벗겨지고 말았다. 즉시 뒤집어썼지만.
그때 여자가 달아난 쪽 길에서 기사 하나가 나타나 그녀를 막아섰다. 여자는 그와 몸을 부딪히며 그에게 팔을 붙잡혔고, 그녀의 품에서는 돈주머니가 툭 떨어졌다.
한눈에 보아도 귀족의 돈주머니였다.
“헉……!”
맹세코 그 순간, 내 턱은 잠시 빠졌다가 다시 붙었을 거다. 그동안 내 안에 잠재워 두었던 욕설들이 한꺼번에 용솟음쳤으나 한마디도 입 밖에 낼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이 귀족 남자는 소매치기를 붙잡았고, 소매치기는 내 동정심을 이용해 상황을 모면하려던 것이었다.
그런 사람을 치한 취급했으니, 내 인생은 이미 나락에 떨어진 데 더해 박살이 났고…….
남자가 잘 보았느냐는 듯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돌아섰다.
내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토껴야지.
내달리기 시작하자 남자의 다급한 고함은 금방 멀어졌다.
“거기 서!”
* * *
기사의 뒤를 이어 모습을 드러낸 남자는 클록 후드 안에 모습을 숨기고 있었다. 기사가 여자를 끌고 가려 하자 그가 말했다.
“놓아줘.”
“하지만…….”
그녀를 처음 붙잡았던 검은 머리카락의 남자, 로카르드 카이델이 다가와 말했다.
“돈은 찾았으니 놓아주시죠.”
“운 좋은 줄 알아라.”
기사가 손을 놓아주자, 여자는 감사 인사도 없이 사람들 사이로 달아났다.
로카르드는 클록의 남자에게 말했다.
“이만 돌아가시죠, 전하.”
“기분 잡쳤어.”
“그래도 식사는 맛있었지 않나요? 그렇죠, 팔콘 경?”
기사는 웃으며 대답했다.
“다리가 어찌나 빠르신지 겨우 쫓아왔습니다. 카이델 공자님.”
“제가 좀 그래요.”
클록의 남자, 2황자 그레이언은 로카르드가 소매치기가 사라진 쪽이 아니라 반대편 길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다.
그레이언의 의아함을 눈치챈 로카르드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럼, 돌아가시죠.”
* * *
나는 허겁지겁 백작저로 돌아왔다. 그리고 침대에 널브러져 헛헛하게 웃었다.
사생아 따위에게는 슬퍼할 시간마저 허락되지 않는 거다. 미래가 싹 사라진 날에도 어처구니없는 사고를 치고 도망이나 쳐야 하고.
나는 당연하게도 여태 귀족들과 교류가 없었다. 미샤가 돈을 퍼부어 화려한 데뷔탕트를 치르는 밤에도 나는 방 안에 있었다.
그때 백작님은 참석해도 괜찮다고 했지만 내가 거절했다. 내가 그 자리에 그림자라도 비치면 나를 잡아먹을 기세인 백작 부인 때문만은 아니었다. 춤출 줄도 모르는데 콧대 높은 진짜 귀족들이 가득한 방 안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러니 귀족과 마주칠 기회는 아카데미 입학 정도였는데, 그게 무산되었으니 앞으로 그 키 큰 깜장 머리와 마주칠 일은 없었다.
아카데미를 졸업해 귀족가의 가정 교사가 될 가능성도 희박해졌으니, 그 키 큰 깜장 머리와 우연히라도 마주칠 가능성도 희박했다.
그냥 내 인생이 희박했다.
나는 새벽까지 뒤척이며, 백작님에게 시험을 포기한다는 말을 어떻게 전할지 고민하다 잠들었다.
그리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말하지 말자!’였다. 시험장에 가서 시험을 치르는 척, 다른 데로 새면 된다.
그러면 백작님은 내가 시험에 떨어진 걸로 알 거고, 시간이 좀 지난 뒤에 힘들어서 내년 시험을 보지 않겠다고 말하면 그만이다.
나는 아직 어리고, 내 힘으로 세상 모든 일을 해결하는 건 버겁다. 가능하지도 않고.
그렇게 마음을 정하자 조금 견딜 만해졌다. 나는 간간이 들려오는 미샤의 히스테리성 비명을 들으며 방에서 빈둥거렸다.
아직 다 외우지 못한 제국법 공책이 내 신경을 거슬리게 했지만 애써 무시했다.
마침내 시험 전날 밤이 되었을 때, 백작님은 내 방으로 찾아왔다. 그는 침대에서 놀라 벌떡 일어나는 나를 보고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내가 공부하다가 잠시 쉬는 중이라고 믿은 것이다.
어쩐지 그와 눈을 맞출 수가 없었다.
“병이 난 건 아니냐?”
“아니, 아니요!”
나는 얼른 머리를 정리하며 일어났다.
“내일은 평소대로만 하거라. 결과는 고민하지 말고.”
“네. 그럼요. 백작님.”
“…….”
백작님은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무엇이든 주저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속이는 걸 눈치챈 것은 아닌지,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
“곧 너도 성년이구나.”
“아…….”
“아카데미 입학식 전에 데뷔탕트를 열어야겠다. 늦었지만 안 하는 것보다 나아. 그곳은 치열한 사교장이니 말이다.”
역시 백작님은 내 합격을 기정사실로 여기고 있었다.
나는 저절로 눈을 내리깔았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이 흘러나올까 봐 잠시 이를 꽉 물었다.
“……붙으면요. 그런데 저 자신 없어요. 저 같은 애까지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으면 아카데미가 아카데미가 아니게요?”
백작님은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자거라. 내일은 일찍 일어나야 할 테니. 시험장에는 데려다주마.”
나는 슬금슬금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백작님은 내가 눕는 걸 보고서야 돌아갔다.
양심이 아팠다. 양심도 아프고 마음도 아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