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이건 질서의 문제란다
(4/155)
4화. 이건 질서의 문제란다
(4/155)
4화. 이건 질서의 문제란다
2023.03.08.
줄리아 선생님의 평가로는 내 역사와 수학 성적은 수준급이라고 했다. 법률은 좀 어려웠다. 외울 것이 너무 많았다.
음악은, 피아노는 내 성질머리와 맞지 않았다. 아마 내가 시험에 떨어진다면 음악 때문일 것이다.
미샤는 피아노를 비롯한 악기를 3개나 수준급으로 다뤘다.
그래서 백작 부인은 함께 식사할 때면 아카데미 입학시험에서 음악 과목의 가산점이 늘어나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음악이 드러내는 예술적 소양은 선택된 자들만의 것이라며.
내가 악기를 잘 다루지 못하는 이유가 사생아이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그러면 나는 작은 고기 조각을 입에 넣으며 동의한다는 듯 끄덕거린다. 속으로만 ‘웃기시네.’ 생각하면서.
불과 7년 만에 그 대책 없던 깡촌 계집아이가 이렇게 세련되게 변신할 줄은 백작님도 예상 못 했을 거다.
이 기적의 시작이 백작님이었다는 걸 부정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나도 여기까지 오며 그만큼의 대가를 치른 것 같아서, 지나친 감상을 갖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나는 언젠가는, 할 수 있다면 빨리, 백작님의 곁을 떠나야 하니까.
* * *
아카데미 입학시험이 일주일 남자 백작저는 초긴장 상태였다. 나 때문은 아니었고, 미샤가 히스테리를 부려서였다.
미샤는 시험을 앞두고 집중 수업을 하려는 가정 교사들과 싸우고 울었다. 교사들이 가르쳐 준 적도 없는 걸 물어본다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는데, 억울한 쪽은 가정 교사였을 게 분명했다.
나는 미샤의 히스테리와 백작 부인의 긴장을 무시하고 공부에 집중했다.
머리를 못 감고 세수도 못 한 얼굴에는 기름이 돌아 꼴은 너저분했지만, 청결은 내 우선순위 리스트에 끼어 있지도 못했다.
백작 부인이 종일 미샤를 챙기느라 나에 대한 감시를 게을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줄리아 선생님도 그 틈을 타 저택에 몇 시간씩 더 머물렀다.
줄리아 선생님은 내가 안심할 수 있는 말은 하나도 해 주지 않았다. 이 정도면 붙을 거라거나 아직 부족하다거나, 아무것도.
그냥 끝까지 최선을 다하라고만 했다. 내가 언제 최선을 다하지 않은 적 있었다고.
그녀가 늦은 수업을 마치고 돌아갈 때 나는 말을 전했다.
“선생님, 백작님께서 선생님이 원하는 게 있는지 물어보셨어요.”
“응?”
“시험 끝나면 성의 표시를 하고 싶으시대요.”
“이미 보상은 충분히 받고 있어요. 그런데 언제까지 백작님이라고 부를 거예요? 호칭을 바꿔야 할 때가 지난 것 같지 않아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웃으며 돌아갔다.
“……칫.”
백작님. ……아버지.
지금 그런 것까지 생각하면 내 머리는 터져 버릴 것이다. 나는 다시 제국법 책에 머리를 박았다.
그리고 얼마 뒤. 점심을 먹고 너무 졸려서 잠깐 눈을 붙였는데, 일어나니 책상에 두었던 공책이 없었다. 내가 공부한 내용을 정리해 둔 공책이었다.
“미샤!”
범인은 너무 빤했다. 하지만 곱씹어 보니 나는 없어진 공책의 내용을 거의 외우고 있었다.
“어우, 또라이 같은 게. 맘대로 해.”
나는 그렇게 투덜거리고 보던 책을 계속 보았다.
내가 그렇게 미친년처럼 머리 박고 공부만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그 공책을 즉시 찾아오지 않은 걸 그토록 후회하게 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 * *
백작 부인이 내 방에 나타난 건 그날 해가 질 무렵이었다.
나는 유령이라도 나타나는 듯한 서늘한 기운에 책상에서 고개를 들었다. 테리아도 이미 돌아간 탓에, 나는 백작 부인과 단둘이 마주하게 되었다.
‘염병할…….’
백작 부인은 우아한 몸짓으로 소파에 앉았다. 나는 떡 진 머리카락을 대충 정리하는 척하며 그녀 앞에 앉았다.
“고생이 많구나.”
“아니에요. 한참 부족한걸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니?”
이건 또 무슨 참신한 지랄이람.
백작 부인의 입술이 미소를 짓고 있는 걸 보니 가슴 한편이 차갑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미샤가 한참 울었단다.”
나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
“부담감이 큰 시기니까요.”
“그 애가 네 공책을 훔친 걸 알고 있니? 가정 교사들이 치른 시험에 그걸 베껴 답안을 쓰려고 했다더구나.”
“…….”
뭐지, 얘기가 왜 이렇게 되는 거지?
내 심장이 콩닥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몰랐어요. 하지만 훔치다니요. 미샤의 공부를 도울 수도 있는 거지, 공책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백작 부인.”
나는 내 영혼을 바꿔 낀 듯 착한 아이처럼 대답했다.
백작 부인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서렸다.
사람이 사람을 웃으면서 증오할 수 있다는 건 참 신기한 일이다.
백작 부인은 말했다.
“가정 교사들이 네 공책을 보고 감탄하더구나. 어떤 선생님이 정리해 주었는지 궁금해하며 내가 가정 교사를 더 채용한 걸로 오해했어.”
“…….”
식은땀이 났다.
“줄리아 양이 정리해 준 거니?”
“그게…….”
그녀는 내 어색한 변명은 필요 없다고, 자르듯 말했다. 그럼에도 그녀의 음성은 참으로 부드러워서, 마치 실제가 아닌 것처럼 들렸다.
“아카데미 입학시험은 포기하렴. 네가 못 하겠다고 말하면 백작님도 별말씀 안 하실 거다.”
“……!”
내 호흡은 이미 거칠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내게 틈을 주지 않았다.
“이건 이미 내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게 되었어. 내가 나서지 않을 수가 없구나.”
“…….”
“사생아가 제국 아카데미의 수석을 차지하기라도 한다면……. 명문가 자제들이 어떤 모욕감을 느낄지 너는 상상하지 못한단다. 그들은 그 책임이 우리 로아르가에 있다고 여길 거야.”
그녀는 우아하고도 단호하게 말했다.
“이건 질서의 문제란다. 로리샤.”
모욕감. 모욕감. 모욕감…….
나는 머리가 터질 것 같은 상태였다. 매일 밤을 새우다시피 공부한 피로에 그녀가 준 충격은 나를 어지럽게 했다.
나는 더듬거리며 내가 가진 마지막 카드를 꺼냈다.
“백작님과 상의해 볼게요.”
하지만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않는 게 좋을 거란다. 나는 이 문제를 최대한 조용히 처리하고 싶거든.”
“백작 부인!”
“기어이 시험을 치르고 싶다면 그래도 돼. 하지만 네가 합격해도 아카데미에 계속 다닐 수는 없을 거야. 누가 길거리 창녀의 딸과 같이 공부하려고 하겠니? 넌 어떤 이유로든 퇴학당하게 될 거야.”
우리 엄마가 길거리 창녀라고, 내가 그런 여자의 딸이라고 아카데미에 소문내겠다는 협박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튕기듯 일어났다. 주먹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내 다리가 나를 지탱하지 못하고 무너질까 봐 두려웠다.
“우리, 우리 엄마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아시잖아요!”
“하지만 소문은 그렇게 날 거고, 네가 그걸 부정할 방법은 없을 거야. 로리샤.”
나는 씩씩거리는 숨을 고르며 겨우 침착하게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 로아르 가문과 백작님의 명예는요? 백작님이 그런 분이 아닌 건 누구보다 잘 아시잖아요. 그런 거짓말은 하실 수 없어요.”
“있단다. 나는.”
그녀는 천천히 일어나 나와 마주 섰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소름 끼쳤다.
“내 남편의, 폐하의 세 번째 사자의 명예를 망가뜨려서라도 내 딸이 상처받는 걸 막을 수 있다면, 나는 그렇게 할 거란다. 생각해 보렴.”
내 거친 숨소리가 귀로 들려왔다.
“너는 평생 창녀의 딸로 알려질 거야. 네가 그 악다구니를 발휘해 끝까지 버텨 낸다 해도, 너를 가정 교사로 들이는 귀족은 아무도 없을 것이고. 혹시나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해도 내가 막을 거거든.”
“…….”
내 다리가 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였다. 나는 천천히 주저앉았고, 백작 부인은 부드러운 옷자락 소리와 함께 문으로 멀어졌다.
그녀는 문을 닫기 전에 나직이 말했다.
“남편의 사랑을 가질 수 없다면 다른 거라도 가져야 하지 않겠니?”
* * *
이상한 일이었다. 내 인생이 산산조각이 났는데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약간 졸렸을 뿐.
아직 외우지 못한 제국법 공책이 떠올랐지만 애써 떨치고 밖으로 나갔다.
시내에 도착했을 땐 이미 밤이 되어 있었다.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조명은 오늘도 상가 거리를 퍽 황홀한 모습으로 드러나게 했다. 수도 없이 드나든 그 거리가 갑자기 지독히 낯설었다.
나는 평범한 옷에 클록 후드를 걸친 채 거리 끝의 톨만 약재상을 찾아갔다. 톨만 약재상 주인 할아버지는 내가 로아르라는 걸 몰랐다.
그는 어린 계집애가 약초를 잘 안다고 신기해하며 내게 차를 내주기도 했다. 그러면 나는 점원인 양 손님을 접대해 매상을 올려 주어 찻값을 했다.
그는 몇 번이나 나를 자기 가게에 취직시켜 주겠다고 했다.
“어쩐 일이야? 당분간 못 온다더니.”
“아……. 지나가다가요. 무릎은 어떠세요?”
“매일 똑같지, 뭘.”
“그럼 가 볼게요.”
“응? 벌써? 이렇게 갈 걸 뭐 하러 와.”
나는 어색하게 돌아섰다. 갑자기 아무것도 알 수가 없어서였다. 누가 말을 걸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지, 할아버지의 무릎이 뭔지, 약초는 또 뭔지.
나는 그대로 밤길을 걸었다.
아카데미에 못 들어간다고 세상이 끝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려 했지만, 그럴수록 이제 나에게는 끝날 세상도 없는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엄마가 갑자기 사라졌듯, 아카데미라는 기회도 갑자기 사라졌다. 이제는 내 앞에 뭐가 더 있기나 한지 나아가기 무서웠다.
진작에 이 거리로 나와야 했는지도 몰랐다. 반쪽짜리 귀족은 귀족이 아니다. 그런 애가 백작저에 붙어 있었으니, 일은 거기서부터 잘못되었는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