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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악바리 영애 (3/155)


3화. 악바리 영애
2023.03.07.


“야! 너 또 내 책 가져갔지?”

“먼저 가져온 사람이 보는 거지, 뭐가 ‘내 책’이야? 그리고 애초에 읽지도 않는 책은 뭐 하러 욕심내?”

“이게, 씨…….”

“‘이게, 씨’? 어머, 로아르가 영애께서 말이 이렇게 험하셔서야.”

“하! 내가 말이 험해? 내가? 말을 말아야지!”

미샤 로아르. 내 이복동생.

그녀는 내 책상에 놓인 책을 획 채어서 나가 버렸다. 그녀가 걸을 때마다 어머니를 닮아 붉고 탐스러운 머릿결이 찰랑거렸다.

이 저택에서 지낸 지도 7년째, 미샤를 겪는 일은 이제 간지럽지도 않았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기지개를 켰다. 어제도 새벽까지 공부했더니 눈이 침침했다.

잠시 책상에 엎드리니 하녀 테리아가 레몬차를 가져다주었다. 그녀의 레몬차는 미치도록 시어서, 그걸 먹으면 피로가 풀리는 동시에 잠이 확 깼다.

오늘은 지금 이것만 외우고 방금 미샤가 가져간 책을 보려고 했는데 계획이 틀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래 봐야 한나절이다. 미샤는 제국의 가장 위대한 두 학자 간에 벌어진 신성 논쟁을 한 문단 이상 읽지 못할 것이다.

연회용 드레스에 적정한 러플 두께에 대한 논쟁이라면 몰라도.

그 책은 교사에게 읽었다고 표지만 보인 다음 책상 한쪽 책 더미에 놓일 거고, 나중에 미샤가 마사지를 받으러 가면 테리아를 보내서 가져오면 된다.

그 애는 그 책이 없어졌다는 걸 절대 알아채지 못하니까 괜찮다.

미샤 또한 아카데미 입학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백작 부인이 붙여 준 다섯 명의 고급 가정 교사와 한 명의 유명 마사지사와 함께.

미샤는 공부가 힘들어 피부가 상한다며 매일 같은 시간에 얼굴 마사지를 받고 있었다.

미샤에게 제국 아카데미란 좋은 신랑감을 얻기 위한 사교 장소였다. 그러니 입학을 해도 남자들에게 잘 보일 수 없다면 의미가 없었다.

나는 당연히 마사지사 같은 건 배정받지 못했다. 줄리아 선생님을 돌아오게 하려 백작님이 백작 부인과 다시 끔찍한 줄다리기를 해야 할 정도였다.

백작 부인은 내가 아카데미 입학시험을 보려고 생각하는 것부터 괘씸하게 생각했다.

백작님의 사생아인 내 존재는 이미 공공연했다. 그렇다고 해서 동갑내기인 적녀와 사생아가 같이 입학하는 모양새가 좋을 리 없었다. 무엇보다, 공부를 내가 더 잘했다.

만약 미샤가 사생아도 통과하는 아카데미 시험에 탈락하기라도 한다면 얼마나 마음이 고통스럽겠는가. 그 애가 고통이라는 걸 이해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돌이켜 보면 기적 같은 일이었다. 툰바르산에서 약초나 캐던 욕쟁이 계집애가, 이제 아카데미 입학시험을 준비하고 있다니.

그동안 백작 부인의 나에 대한 태도는 조금도 달라진 적이 없었다. 갑자기 백작저에 끌려간 이후 나는 언제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때 백작님은 출장에서 돌아와 내가 부인에 의해 백작저에 끌려온 걸 알고는, 바로 나를 데리고 영지 순시를 나갔다.

사람들은 마차에서 백작님 곁에 앉은 여자아이가 누군지 단박에 알아보았다.

평소 정숙함으로 칭송받던 로아르 백작이 사생아를 데려왔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고, 그래서 백작 부인은 나를 방임하여 죽이거나 쫓아내는 식으로는 처리할 수 없게 되었다.

덕분에 나는 백작님이 다시 출장 나간 동안에도 어느 정도 안전하게 지낼 수 있었다.

상황이 처음부터 좋았던 것은 아니다.

그사이에 백작 부인은 나를 ‘교화’해야 한다며 가정 교사를 들였다. 하지만 그는 나를 교육하러 온 것이 아니라 괴롭히러 온 것이 분명했다.

그의 괴롭힘은 퍽 새로웠는데, 나를 끊임없이 수치스럽게 하는 식이었다.

예를 들어 내가 더하기를 틀리면 내 어린 시절의 삶을 들춰내 한심하다는 듯이 한숨을 푹 쉬었다.

‘로리샤 양은 여덟 살 때 무얼 배웠길래 지금 이걸 틀리죠? 뭐라고요? 약초요? 하아……. 당신의 어머니는 그때 뭘 했습니까? ……그렇단 말이군요. 이건 정상적인 귀족 영애라면 여덟 살 때 떼는 건데……. 하아…….’

아니면 말끝마다 백작님을 들먹였다.

‘백작님의 얼굴에 먹칠을 할 셈인가요? 이것도 외우지 못한다면 황궁에서 백작님의 체면이 뭐가 되실지…….’

나중에는 그를 쳐다보기만 해도 ‘이 비참하고 한심한 사생아야!’라는 외침이 들리는 듯했다.

나도 처음에는 참아 보려고 했다. 백작 부인이 가정 교사를 보내 준 것이 내 존재를 용인하겠다는 허락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만히 보니 그녀는 나를 은근하게 괴롭힐 방법을 찾은 것뿐이었다.

어느 날도 그가 하던 짓을 하기에, 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다 말했다.

‘줄리아 선생님은 나더러 공부 잘한다고 했는데. 제 실력이 나쁜 게 선생님 탓은 아닐까요? 그런 생각 해 본 적은 없으세요?’

그러자 그가 눈을 땡그랗게 떴다. 나는 그의 게슴츠레한 눈이 그렇게 커질 수 있는지 처음 알았다.

‘백작님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게 선생님 자신 아니냐는 의문은 가져 본 적이 없으시냐고요.’

그는 얼굴이 시뻘겋게 되더니 나가 버렸다.

그리고 다음 수업부터 체벌을 시작했다. 내가 풀 수 없는 어려운 문제를 내고는 틀린 개수만큼 손바닥을 때렸다.

나는 이건 일러도 소용없으리라는 걸 직감했다. 틀린 시험지를 내보이며 이미 가르쳐 준 걸 틀렸다고 하면 나만 거짓말쟁이가 될 뿐이었다.

나는 그 교묘하고 은밀한 악행에 분노하다가, 그대로 갚아 주기로 했다.

내가 욕과 싸움을 잘하게 된 건 나를 욕하고 때리는 아이들 때문이었다. 괴롭힘이라고 배우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며칠 뒤를 밟아 보니, 가정 교사는 내 생각만큼 교활하지 못했다. 나는 그가 수업이 끝난 후 후원에서 어린 하녀와 시시덕거리는 걸 잡아냈다.

다음 수업이 끝났을 때, 나는 백작님에게 산책을 청했다. 후원으로.

백작님은 멀리서 그 꼴을 보자마자 손바닥으로 내 눈을 가렸다가, 나를 그쪽에서 등지게 세워 놓고 내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내 손을 붙잡고 오던 길로 돌아갔다. 백작님은 내 뜻을 알아들은 것 같았다.

‘저 인간 좀 치워 주세요.’ 하는 내 뜻을.

그 뒤로는 가정 교사는 없었다. 테리아가 나를 돌봐 주었고, 나는 백작님이 갖다주는 책을 읽으며 지냈다. 나는 마침내 완전한 자유를 누리는 듯이 행복했다.

내 행복이란 언제나 찰나에 그치는 것이었지만.

백작 부인이 가정 교사 다음으로 내게 보낸 사람은 그녀의 딸이었다. 미샤 로아르, 그 계집애는……, 나도 그 애만은 건드리기가 까다로웠다.

왜냐하면 미샤 로아르 또한 백작님의 딸일 뿐 아니라, 사생아인 내가 비벼 볼 수 없는 로아르가의 적녀였기 때문이다.

백작 부인은 내가 그런 점을 의식한다는 것을 깨닫자 미샤를 통해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언어로, 나중에는 신체로.

한동안은 연전연패였지만 나도 곧 방법을 찾아냈다.

간략하게 말하면, 미샤 로아르는 온실 속의 화초다. 지능의 측면에서도 화초에 가깝다.

그런 애에게 제국의 최고 영재들을 위한 아카데미 입학시험이 얼마나 부담스럽겠는가.

하지만 내게 그것은 마침내 찾아온 기회였다. 백작 아버지 같은 기적 말고, 내가 노력해서 얻어 낼 수 있는 기적 같은 기회.

아카데미에는 기숙사가 있었다. 거기 들어가면 나는 이 집을 나가고, 백작님의 보호와 영향력에서도 벗어난다.

나는 그동안 백작님이 준 것에 진심으로 감사했지만, 이 저택이 내 집이라고 느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백작 부인의 학대와 미샤의 괴롭힘은 나를 때로 힘겹고 지치게 했지만, 그들의 입장이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이 집안의 침입자니까.

하지만 아카데미를 졸업하면 귀족가에서 환영받는 가정 교사가 될 수 있었다. 그러면 줄리아 선생님처럼 결혼하지 않고도 혼자서 살아갈 수 있었다.

나는 정말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비록 다섯 명의 가정 교사는 없어도 줄리아 선생님과 전쟁을 치르듯 공부했다.

말은 안 하지만 백작 부인은 내가 미샤를 제치고 합격할까 봐 몹시 조바심을 냈다.

내 노트가 벽난로에서 재로 발견되거나 책이 없어지는 일도 다반사였다. 그래서 나는 아예 그날 공부한 건 다 외워 버리는 쪽을 택했다.

백작님이 줄리아 선생님을 데려오려 했을 때도 백작 부인은 저택에 외부 사람이 많이 드나드는 게 우려스럽다며 내 수업 시간을 하루 두 시간으로 제한했다.

그래서 나는 그 두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전날 밤부터 예습했다. 그리고 선생님이 오면 준비한 질문을 퍼부었다.

수업 시간에는 선생님의 답변과 지적을 정리하고, 의문점이 생기면 책을 뒤져 해결하고 공부한 걸 외우느라 오후를 보냈다. 또 밤에는 예습을 시작했다.

다행히 백작님은 대단히 훌륭한 도서관을 가지고 있어서 딸들이 책을 마음대로 빌려 가도록 허락했다.

듣자 하니 미샤의 가정 교사들은 아카데미 준비에 특화된 사람들이라고 했다. 시험 문제를 미리 알아낸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래서 그들의 몸값이 그렇게 비싼 거라고.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들이 시험 문제를 알았다면 적당히 시간을 때우다가 미샤에게 그것만 달달 외우게 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그들은 수업이 끝나면 당혹한 얼굴로 복도로 몰려나오곤 했다. 그것은 미샤가 공부를 하지 않으면 그들의 경력에 오점이 생길 수도 있음을 뜻했다.

그런 광경에 마음속으로 미샤를 조롱하는 건 내가 쉬는 시간에 잠깐 하는 놀이 같은 거였다.

나는 이제 제국어와 아가엘어를 고급 수준으로 구사할 수 있다. 바다 건너의 스마일란어 실력도 썩 나쁘지 않다.

어렸을 적 쓰던 각양각색 고난도의 비속어는 내 안에 고스란히 잠들어 있지만, 나는 일상에서는 외국어를 쓰는 기분으로 고상한 표준 제국어를 구사했다.

귀족들과 살다 보니 거칠고 상스러운 말투를 쓸 일이 많지 않았거니와, 귀족들의 말싸움은 고도로 정교하고 신랄했다. 그것은 기세보다 악의의 싸움이었다.

가끔 이렇게 멍해져서 딴생각에 빠질 때가 있기는 했지만, 지난 일을 곱씹으며 누구를 미워하는 것보다는 자신을 위해 시간을 쓰는 편이 훨씬 낫다는 걸 이제는 안다.

나는 제국 아카데미에 들어갈 거다. 그러면 모든 게 해결된다. 나 자신을 구하고, 백작님을 명예롭게 하는 것까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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