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나를 꼭 닮은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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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나를 꼭 닮은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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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나를 꼭 닮은 남자
2023.03.06.
우리 엄마는 그렇게 갔다. 정상 근처에서 소나기가 내리는데도 나를 집에 혼자 둘 수 없다고 급하게 산을 내려오다 실족사했다.
사냥꾼들이 엄마를 발견해 마을로 데려왔고, 촌장이 대충 장례를 지내 주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모두가 나를 무시했다. 이런 건 마치 어른들의 일이고 아이에게는 아무 권리도 없다는 듯이.
저 형편없는 관에 든 게 우리 엄마 멜리아 로바가 아니고 다른 무엇이라는 듯이.
마을 어른들은 알아서 장례를 치르고, 화장을 하고, 유골을 항아리에 담았다. 그들은 나를 그 일을 지켜보도록 맨 앞에 세워 놓았을 뿐이다.
촌장은 내게 유골 항아리를 안겨 주며 말했다. 그게 너무 무거워서 무릎을 휘청거렸기 때문에, 나는 그의 말을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어디로 갈 거냐?”
“…….”
“어디로 갈 거냐고, 로리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그렇게 얼굴 전체에 힘을 주면 눈시울이 뜨거워지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에.”
“뭐라고?”
“집에…….”
나는 그 무거운 유골 항아리를 안고 집으로 달렸다.
‘내가 집 말고 갈 데가 어디 있다고! 얼어 죽을 영감탱이가.’
어떤 어른의 팔이 나를 붙잡았는데, 촌장이 말렸다. 그냥 놓아두라고.
해가 져 가는 하늘이 불타듯 붉어지고 있었다. 나는 이 무거운 항아리를 떨어트리면 안 된다고, 그러면 우리 엄마가 어떻게 될 것 같아서, 절대 넘어지지 말고 밤이 되기 전에 집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내 머릿속에 든 전부였다.
나는 내 목에서 새어 나오는 쌔액, 쌔액, 낯선 숨소리가 무섭고 싫다고 느꼈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엄마. 엄마. 엄……. 엄마!”
오두막으로 돌아온 나는 아직 온기가 도는 엄마의 유골 항아리를 안고 차게 식은 벽난로 앞에 드러누웠다.
집에 꼭 온다며. 무조건 나한테 돌아올 거라며……. 믿어 달라고 해 놓고. 나는 믿었는데…….
나는 엄마를, 엄마만 믿었는데.
망할. 이제는 나 엄마 안 믿어. 아무도 안 믿어.
그때가 열 살 때였다.
* * *
아마 나는 그 벽난로 앞에서 아사 직전에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 나를 들어 안고 옮기는 감각, 마차에 몸이 흔들리는 느낌은 기억에 어렴풋이만 남아 있다.
그 후 어느 별장에서 할머니 하녀의 간호를 받고 기력을 회복했을 때, 금발이 멋들어진 중년의 귀족이 찾아왔다.
그는 말문이 막히는 듯 촉촉하게 젖어 드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중지에 낀 커다란 인장 반지를 보니 신분 높은 귀족이었다. 그런데 내게 무슨 용무인지.
나는 어색해서 먼저 말했다.
“저는 로리샤예요. 로리샤 로바.”
그는 목이 막히는지 헛기침을 하고는 말했다.
“너는 로리샤 로아르다.”
“…….”
“나는 헬리든 로아르 백작, 네 아버지다.”
나는 멍한 가운데 겨우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아닌데요.”
이번에는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네 어머니에게……, 네게 다른 아버지가 있느냐?”
“아니요.”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무리 귀족이라도, 처음 보는 남자가 엄마를 두고 이상한 소리를 하게 놓아두고 싶지 않았다.
“저는 아빠 같은 것 없어요. 우리 엄마한텐 남편 같은 건 없고요. 그런 게 있었다면 우리가 이렇게 살았을 리 없잖아요.”
나는 그때 눈앞의 남자가 마치 칼에 찔린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내가 널 돌보마.”
그 말이 왜 그렇게 화가 나는지.
엄마는 이미 죽었는데, 이제야 나타나서는!
나는 울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정신을 놓은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나는 그의 품에서 울먹이고 있었다.
귀족들은 고상한 말만 하고 천박한 소리는 듣지도 않는다고 했는데.
그래서 나는 내가 욕을 하면 이 귀족도 쫓아낼 수 있을 줄 알았다. 겁을 먹어서든 듣기 끔찍해서든 손사래를 치며 가 버릴 줄 알았다.
그런데 그가 나를 숨도 못 쉬게 꽉 안아서, 어쩌면 그도 조금 울고 있는 것 같아서, 나는 혹시 그가 진짜 내 아버지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었지만.
그는 내 호흡이 잠잠해진 다음에야 나를 놓아주었다.
“로리샤꽃. 그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란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이 사람이 좋아하는 꽃 이름을 따서 내 이름을 지었다고? 엄마. 혹시 듣고 있으면 우리 얘기 좀 해.
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며 그의 밝은 금발과 녹색 눈동자 색상과 눈매, 얼굴의 윤곽 같은 것이 나와 상당히 닮았음을 깨달았다.
그 어린 나이에도 나는 이것이 얼마나 잔인한 일이었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엄마는, 귀족의 아이를 낳고 빈손으로 숨어 살아야 했던 우리 엄마는, 매일 그 남자를 꼭 닮은 나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가 좋아하는 꽃 이름을 붙이고, 그와 닮은 내 얼굴을 보면서 용케도 예쁘단 소리가 나왔구나.
아닌가? 그래서 거짓말을 했을까? 돌아온다고 그러고서 안 오고, 나를 버렸을까? 내가 아빠를 닮아서?
그런 생각을 하자 가슴 안에서 불덩어리가 뭉치는 것 같았다.
“엄마를 왜 버렸어요?”
증오에 찬 열 살짜리 계집애의 질문이 그에게는 어떤 느낌이었을까.
“말 안 해도 돼요. 정육점네 콜린도 귀족 나리가 걔네 엄마 자빠트려서 낳은 애래요. 걔네 엄마가 젊었을 때 하녀였거든요.”
내가 조롱하듯 말했을 때, 백작님의 눈빛은 충격으로 흔들렸다. 그때 나는 내 공격이 잘 먹힌다고 좋아했지만, 실은 그게 아니었다는 걸 지금은 안다.
그는 멜리아가 딸을 도대체 어떻게 키운 것인가, 실망하고 경악했을 것이다.
“말조심하거라. 로리샤.”
나는 평생 그렇게 근엄한 명령을 들은 적이 없었다.
나는 그제야 내가 나와는 전혀 다른 종족을 상대하고 있다는 자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지만 이미 실컷 나불거린 후였고, 이제는 그의 하인에게 질질 끌려가 매질을 당할 일만 남아 있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멜리아를 버린 적 없다. 그녀가 달아났고, 사람을 풀었지만 찾을 수 없었다. 네가 있었다는 것 또한 몰랐어.”
그는 내게 엄마의 실크 리본을 꺼내 보였다. 그 리본을 묶은 로리샤 꽃다발이 배달되어 그걸 보낸 사람을 추적하여 여기까지 왔노라고.
엄마가 가진 유일한 사치품이었던 그 리본은 그가 엄마에게 준 선물이었다고 했다.
그는 말했다.
“멜리아는 내가 너를 거두기를 원한 거야.”
* * *
백작님은 나를 자신의 별장으로 데려갔다. 새하얀 벽에 핑크색 가구가 놓인 여자아이의 방이 내 것이라고 했다. 나는 얼떨떨할 뿐이었다.
며칠 후에는 가정 교사가 찾아왔다. 숱이 많은 갈색 머리를 솜씨 좋게 올린 미혼의 중년 여자였다.
“나는 줄리아예요.”
나는 초면에 만만치 않게 보이려고 퍽 도도하게 물었다.
“가정 교사이시라고요?”
“네. 정확하게 알고 있네요. 로아르 양.”
“가정 교사가 뭔데요?”
그녀는 미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놀란 듯 말했다.
“그거 좋은 질문이군요! 로아르 양은 가정 교사가 어떤 사람이길 원하죠? 저에게 배우고 싶은 게 있어요?”
“우라질. 내가 먼저 물었는데.”
내가 중얼거리자 그녀의 눈 밑이 굳어졌다. 그러나 평온한 얼굴을 하려고 애쓰며 물었다.
“우라…… 질. 그건 무슨 뜻이죠?”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우라질이 우라질이지, 무슨 뜻이에요? 그러고 보니까 이상하네. 무슨 선생님이 우라질을 몰라요? 그러면 염병도 모르겠네요?”
“…….”
그녀는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고, 나는 승리감에 크게 웃었다.
욕 축에도 끼지 못하는 이 정도 말로 어쩔 줄 몰라 하다니.
나는 그녀 덕에 내가 쓰는 많은 천박한 어휘의 참뜻을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상관없었다.
욕은 내가 얼마나 나쁜 년인지 과시하는 일이다. ‘저거 도저히 상종 못 하겠네!’라는 반응이 욕의 목적이다. 방금 줄리아 선생님이 그랬듯이.
그러니 ‘우라질’이나 ‘염병’ 따위의 말에는 아무 뜻이 없는 게 맞다.
잠시 뒤에 줄리아 선생님이 커다란 책을 안고 돌아왔다. 그녀는 그걸 책상에 쿵 놓더니 말했다.
“이건 타가르 황실에서 편찬한 제국어 사전이에요. 우리 여기서 ‘우라질’을 찾아볼까요?”
이건 무슨 소리래?
“사전은 단어의 정확한 뜻을 모아 놓은 책이에요. 글을 읽을 줄 아나요?”
“당연히요.”
우리 엄마는 나를 그렇게까지 무식하게 놓아두지 않았다. 읽을 줄 알아야 약재상에서 정산받을 때 속지 않을 것 아닌가.
“그런데 황제 폐하가 이걸 다 쓰셨다고요?”
“직접 하시진 않죠. 황실 소속의 학자들이 썼어요. 학자들은 학술원에 있고요. 황실 학술원 알아요?”
내가 도리도리 고개를 젓자 그녀가 사전을 뒤지며 무심하게 말했다.
“우리 일단 ‘우라질’을 찾아봐요.”
나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손끝이 가리키는 자리를 따라 머리를 디밀었다.
그녀는 사전에 단어들이 특정한 순서에 따라 실려 있다는 것을 설명해 주었다.
“여기 있네요. 우라질. 음, 상대가 감옥에 끌려가 모진 일을 당했으면 좋겠다는 가벼운 저주의 의미군요. 이런, 로아르 양은 제가 감옥에 가기를 원했나요?”
나는 놀라서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니요, 그냥 선생님이 방에서 나가는 것 정도를 바란 거지, 죄도 없이 감옥이라니. 그건 진짜 나쁜 짓이잖아요!’
줄리아 선생님은 당황한 나를 향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그러면 로아르 양은 황실 학술원 학자들과 의견이 다르군요?”
“네, 달라요!”
나는 일단 거세게 긍정했다. 줄리아 선생님이 내가 하지도 않는 일을 믿게 되는 건 싫었다.
“그 사람들 막 아무 말이나 하고…….”
“음. 학술원이 그렇게 이상한 곳은 아닐 텐데……. 여기 한번 볼래요?”
그녀는 다른 책을 가져와 커다란 조직도를 펼쳤다.
“여기 제일 위에는 폐하가 계시고, 그 아래엔 황후궁, 그리고 황자녀 전하들의 궁……. 학술원은 여기 행정부 직속에 있군요.”
그녀는 백작님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었다. 백작님은 ‘제국의 세 번째 사자’라 불리는 대단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 호칭은 사자 문장을 상징으로 하는 타가르 황가를 지키는 자라는 뜻인데, 황제 폐하가 그를 절대적으로 믿는다는 의미라고 했다.
첫 번째 사자는 강력한 기사단을 여럿 거느린 공작님이시고, 두 번째 사자는 오래전에 죽었는데 폐하께서 그분을 기려 그 자리를 비워 놓았다고 한다.
나는 그렇게 당하는 줄도 모르고 줄리아 선생님에게 공부를 ‘당했다’. 열 살의 로리샤 로아르는 순 헛똑똑이였다.
* * *
아마도 백작님의 별장에서 지낸 몇 개월이 내 인생에서 가장 평화로운 시기였을 것이다.
하지만 사생아가 누릴 수 있는 행복은 그 정도였다.
어느 날 오후, 줄리아 선생님과 정원에서 놀고 있을 때 마차가 도착했다.
그런데 그 마차에서 내린 것은 백작님이 아니라 붉은 머리카락의 아름다운 귀부인이었다.
“백작 부인!”
그녀에게는 놀란 줄리아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했다.
그녀는 싸늘한 눈빛으로 내게 물었다.
“네가 그 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