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프롤로그 (1/155)


1화. 프롤로그
2023.03.05.


<1화>

0. 프롤로그

“젠장, 또 시작이네.”

나는 부채 뒤에서 조용히 읊조렸다.

그가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연회장을 채운 영애들의 따가운 시선을 이끌고서 말이다.

카이델 공작의 장남 로카르드 카이델. 용모 수려, 문무겸전, 배경 특출, 성격 파탄, 양심 불량, 또…….

내가 다른 네 글자 단어를 찾는 사이, 그는 내 앞에 서 있었다.

키는 쓸데없이 커서, 눈을 똑바로 보아 주려면 내가 턱을 쳐들어야 하는 것부터 마음에 안 든다.

매끄럽게 빗어 넘긴 검은 머리카락마저 한 올 한 올 잘난 척하는 놈. 내게 집중한 저 보라색 눈동자는 또 얼마나 열정 가득한지.

저렇게 빛나는 눈이 저렇게 완벽한 얼굴에 자리 잡은 걸 설명하는 단어는 하나뿐이다. 불공평. 신은 불공평하다.

그가 입을 열기 전에, 나는 눈을 휘어 접어 웃으며 속삭였다.

“꺼져 주시겠어요?”

“로아르 양…….”

이 새끼, 상처받은 얼굴 하는 것 좀 봐라.

나는 코웃음을 숨기려 부채를 똑바로 세웠다.

그때 그의 뒤로부터 훅 끼쳐 오는 열기. 그것은 아닌 척 우리를 주시하는 영애들의 눈에서 나오는 질투의 불길이었다.

하. 이거지.

이 자식은 제 손을 더럽히지 않고 나를 저 불길로 태워 죽이려는 거다.

나는 이자의 시커먼 속을 안다. 지금 이런 연극을 하는 이유도.

내 말투는 몹시 무례하고 쌀쌀맞았으나, 그는 진중한 얼굴로 한 발 더 다가왔다. 마치 당신이 주는 것이면 마음의 상처마저 소중히 간직하겠다는 것 같은 몸짓이었다.

나는 ‘거기 딱 서!’ 하듯 눈을 치떴다가 그의 촉촉한 눈빛과 마주치고 말았다.

저런 가련한 얼굴로 나를 제국 영애들의 공적으로 만들다니.

그가 저 압도적인 표정으로 제국을 다 홀려 놓았는지는 몰라도, 나는 어림도 없다.

그나저나 저런 눈빛은 대체 어디서 살 수 있는 거지? 제길.

내가 순간 집중력을 잃자 그가 훅 치고 들어왔다.

“로아르 양. 춤을 청하려 했습니다만, 제가 불쾌하게 해 드렸다면 먼저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오해가 있다면 풀고 싶군요. 잠시 대화를 청해도 되겠습니까?”

꺼지라니까 사람 말이 안 들리는 모양이다.

“청력도 안 좋으신 분이 무슨 대화를 원하시는 걸까요?”

그러자 그가 가슴을 펴고 대답했다.

나 같은 사람에게 저 빛나는 자존감과 자신감이 얼마나 거슬리는지, 저 인간은 아마 죽었다 깨어나도 모르겠지.

“로아르 양, 어째서 제게 기회를…….”

나는 그의 말을 싹둑 자르고 그에게만 들리게 사납게 속삭였다.

“공자님 속셈을 모를 줄 알아요? 이 악마 같으니!”

엄마, 나는 못된 애가 맞아. 어릴 때는 마을 애들이 못된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까 내가 못돼서 걔들이 나한테 돌 던진 거였나 봐.

나는 고민했다. 이럴 땐 입만 댄 술을 끼얹어 주어야 하나, 아니면 그의 요청에 응하는 척, 발코니로 데려가 정강이를 까 주어야 하나.

하지만 둘 다 곤란했다. 감히 제국의 첫 번째 사자, 카이델 공작의 적자를 공개적으로 모욕했다간 내 부친 로아르 백작에게도 후폭풍이 미칠 터다. 서열상 백작님이 딸리니까.

그렇다고 함께 발코니로 갔다간 내가 저놈에게 반했다고 공증받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금 우리를 주시하는 사람들은 로카르드 카이델 공자와 단둘이 시간을 보낸 여자가 그에게 반하지 않았다는 말을 믿을 생각이 없을 테다.

이 자식도 그걸 알고 이러는 것이다. 내게 차여 살갗이 까진 정강이를 쓱쓱 문지르며 웃겠지.

나는 내게 내리꽂히는 따가운 시선을 훑어본 다음, 낮고 빠르게 말했다.

“그만하고 돌아가세요. 지금 남들 눈에 피해자는 공자님이시니까, 그걸로 충분하잖아요?”

그러자 그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남녀 간의 감정에 있어서는 더 큰 감정을 품은 사람이 진 거라더군요. 그러니 로아르 양의 말씀이 옳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 네.”

어디서 뭘 주워들었나 보다. 웃겨서 진짜.

“우리가 서로 다른 주인을 모시고 있지만, 그것이 우리가 가까워질 수 없는 이유는 되지 못합니다. 로아르 양. ……제가 무릎이라도 꿇으면 마음을 열어 주시겠습니까?”

“어머.”

나는 그가 더 이목을 끌기 전에 그의 앞으로 바짝 다가갔다. 그의 넓은 품에 포위당하는 기분에 움직임을 신중하게 조절하면서.

발돋움해도 키가 모자라 파직 쏘아보자, 그가 허리를 약간 숙여 주었다. 그제야 그의 귓바퀴 바로 근처에 입술을 가져갈 수 있었다.

고급 사향이 섞인 은은한 향수 냄새가 내 호흡을 따라 끼쳐 왔다. 체취까지 돈 많다고 자랑을 해야 하나. 향이 좋기는 좋지만.

나는 빠르게 속삭였다.

“지금 아무도 춤 안 추는 것 모르시겠어요? 다 우리만 보고 있다고요! 작작 좀 들이대시죠?”

그는 바로 본색을 드러냈다. 사악하고도 장난기 가득한 입김이 내 귓가를 스쳤다.

“시내에서 식사는? 수락하면 바로 꺼져 주죠.”

“한낮에도 할 일 없는 귀족들이 북적거리는 고급 식당에서요?”

“당연히. 에트랑이 좋겠군요. 마차를 보낼게요.”

“그래서 황녀님의 시녀인 제가 황녀님을 배신하고 당신에게 푹 빠졌다고 소문나게요?”

“그러면 좋고. 아니어도 그쪽의 사기를 밝혀낼 기회가 생겨서 좋고.”

“어머, 그런 흉한 말씀을!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어요. 카이델 공자님.”

“로카르드라고 부르라니까. 내 이름을 크게 불러 줘요. 모두 들을 수 있게. 화를 내면서 해도 괜찮아요. 당신의 발성에는 감정이 풍부해서 좋아요.”

“호호호. 변태 같은 말씀은 그만하시죠.”

모두 들을 수 있게 닥치라고 말하고 싶은 걸 겨우 참는다. 참고 또 참는다. 그는 내 인내심의 걸어 다니는 계측기 같은 작자였다.

그런데 바로 맞받아칠 줄 알았던 카이델 공자가 얼굴을 살짝 붉히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무리 우리가 전쟁 중이라지만 내가 너무 나갔나, 침묵이 깃든 고요한 보라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니 가슴이 철렁했다.

“방금, 저더러 변태라고 했습니까?”

그의 미성이 묵직해져 있었다.

하지만 나는 직감했다. 이럴 때일수록 밀리면 안 된다. 이것은 나만의 싸움이 아니니까.

나는 배에 힘을 팍 주고, 최대한 평온하게 말했다.

“역시 청력은 멀쩡하시네요. 카이델, 공자님.”

잠깐의 정적 끝에 믿을 수 없는 소리가 들렸다.

“풉.”

그는 웃음을 참느라 얼굴이 벌게졌다가, 공중 어디를 바라보며 자신을 진정했다.

그리고 불쑥 내 손을 가져가 손등에 입 맞추었다. 은밀한 속삭임을 뱉는 입술이 내 손등을 깃털처럼 스치며 간지럽혔다.

“2황자 전하께서 나를 괜히 타가르의 새끼 사자라고 부르시는 게 아니랍니다. 로리샤 로아르 양. 나는 반드시 당신을 무너뜨릴 거예요.”

나는 나비가 날개를 파닥이듯 부채를 잘게 흔들며 한껏 눈웃음쳤다.

“할 수 있으면 해 보시든지요.”

*

1. 깊은 산속 옹달샘

우리 엄마는 약초꾼이었다. 우리는 국경 툰바르산맥의 작은 오두막에서 살았다.

엄마가 약초를 캐러 며칠씩 산에 가면 나는 엄마를 기다리며 혼자 지냈다.

사람들은 툰바르산이 사람을 싫어해서 걸핏하면 잡아먹고 돌려보내지 않는다고 했다. 조난과 사고가 빈번한 게 그런 이유라고 말이다.

나는 여린 몸으로 산을 타는 엄마가 걱정스러웠고, 엄마가 곰이나 늑대 같은 짐승과 맞닥뜨릴까 봐도 두려워했다.

하지만 엄마는 언제나 내게 약속해 주었다.

“로리샤, 엄마는 네게 꼭 돌아올 거야. 산길이 끊기면 며칠 늦기는 하겠지만, 반드시 우리 로리샤 곁으로 돌아올 거야. 믿어 주겠니?”

그러면 나는 힘차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엄마!”

엄마가 돌아와 약초를 손질해 주면, 나는 그걸 시장에 있는 약재상에 갖다주고 돈을 받아 왔다.

심부름 가는 길에 하는 시장 구경은 언제나 흥미로웠다. 낯선 사람들, 상품들, 흥정과 심심찮게 벌어지는 싸움 같은 것들 말이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마을을 통과하는 길은 늘 녹록지 않았다.

아랫마을 아이들은 나를 보면 몰려들어 산에 사는 괴물이 내려왔다고 소리치거나, 아비 없는 애라고 막대기로 찌르기도 했다.

아마 그래서 나는 아버지에 대해서 궁금해하거나 그리워한 적이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란 언제나 가장 끔찍한 상황에서만 언급되는 단어였기 때문이다.

어느 날 촌장 아들놈이 던진 돌에 맞아 이마에 피를 흘리는 채로 집에 갔을 때, 엄마는 엉엉 우는 나를 터질 것 같은 얼굴로 바라보았다.

나는 엄마가 내게 엄청나게 화가 난 줄 알고 무섭고 서러워서 더 크게 울었다. 그런데 나중에 엄마가 집에 없어서 내다보니 엄마가 밖에서 울고 있었다.

나처럼 크게 소리 내지도 못하고, 겁먹은 사람처럼 입을 틀어막아 소리를 죽여서.

나는 그때 내가 얼마나 나쁜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엄마는 내 유일한 가족이자 내 부적이며 이불이었다. 그리고 엄마였다. 그런데 내가 엄마를 저렇게 아프게 울린 것이다.

나는 그때 결심했다. 다시는 엄마한테 나쁜 짓을 하지 않겠다고.

다음번 약재상에 다녀올 때, 배가 뽈록 나온 촌장의 늦둥이 아들놈이 다시 마을 아이들을 이끌고 나를 둘러쌌다.

그놈은 나를 막대기로 쿡 찌르며 소리쳤다.

“툰바르산 괴물이 내려왔다아! 아비 없이 태어난 괴무울.”

나는 아이들이 깔깔대는 걸 보며 입을 앙다물었다. 오늘은 맞고 들어갈 수 없었다.

“아이, 젠장할! 그거 안 치워?”

내 고함에 아이들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때 내가 아마 일곱 살 아니면 여덟 살. 그 또래 아이들은 아직 거친 쌍욕이 무서울 때였다.

내 첫 욕은 내가 들어도 귀에 착 달라붙을 만큼 차졌다.

촌장 아들은 놀라 주춤했고, 나는 이때다 하고 기세를 몰아 욕을 퍼부었다.

그동안 시장에서 들은 다양한 욕과 비난, 경멸과 폄훼의 언어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욕이라는 게 신기해서, 처음 할 때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금기를 깨는 것 같고, 영혼마저 타락하는 것 같은 두려움이 든다.

하지만 일단 한번 물꼬를 트고 흐름을 타면, 그것은 노래처럼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뿜어져 나온다. 넘실넘실.

그날 마을 아이들은 울면서 도망갔다.

이후 나는 시장에 갈 때마다 어른들의 흥정과 입씨름을 잘 들어 기억했고, 특히 싸움판이라도 벌어지면 꼭 달려가서 공부했다.

싸움은 기세다. 내가 먼저 욕을 하는 한 나는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았다. 뒤에서는 더 심한 손가락질을 당했겠지만, 적어도 내 앞에서 엄마가 가장 싫어하는 소리를 하는 놈은 없었다.

그래서 욕은 나와 엄마를 보호해 주는 마법이었다. 사실 나는 내가 욕을 잘한다는 사실이 조금은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평화는 어느 날 갑자기 깨어졌다.

어느 날 오후, 약초를 캐러 간 엄마 대신 촌장이 집으로 찾아왔다.

“나와 같이 마을로 내려가자.”

나는 그때 울음을 터트렸다. 필시 엄마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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