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케인은 이러지 않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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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화 케인은 이러지 않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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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화 케인은 이러지 않았는데
2023.08.04.
헤르시스가 걸어오면서 재킷 단추를 하나둘씩 풀었다.
그 거친 손놀림과 빠르게 좁혀지는 거리가 몹시도 위협적이었다. 리즈는 이 남자가 제 숙부를 때려눕힐 거라 생각했다.
말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그가 리즈의 어깨를 가만히 그러쥐었다.
“…….”
크고 섬세한 손이 리즈의 어깨에서 몬타네르 대공의 재킷을 걷어 내어 뒤따른 근위대장에게 넘겨주었다.
헤르시스가 제 옷을 리즈의 몸에 두르는 동안 근위대장이 송구스러운 표정으로 대공에게 재킷을 전했다.
몬타네르 대공이 재밌다는 듯 픽 웃음을 터뜨리며 재킷을 건네받았다.
“제가 괜히 불편하게 해 드린 모양이군요. 모르고 계시는 게 능사는 아닌 것 같기에 말씀드렸는데…… 죄송합니다, 황제 폐하. 그리고 황후 폐하.”
정중한 말에 묘한 경멸이 묻어났다.
리즈는 괜찮다는 말로 상황을 마무리 짓고 싶었지만 헤르시스가 길을 터 주지 않았다.
“숙부님의 진심이야 저도 알고 예비 황후도 알죠.”
“…….”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들 눈에 숙부께서 자칫 앙심을 품은 것으로 보일까 우려스럽습니다. 조카에게 기꺼이 황좌를 양보해 주신 숙부께서 그렇게 치졸한 사람으로 인식되면 몹시 슬플 것입니다.”
헤르시스가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앞으로 제 처 될 사람과 그 집안에 대한 과도한 관심은 삼가 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숙부님.”
리즈는 호기심에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그러자 몬타네르 대공이 그녀의 시야에 보였다.
그의 표정은 헤르시스의 평온한 목소리만큼이나 온화했지만, 리즈는 그의 적자안이 적안에 미묘하게 가까워진 것을 보았다.
‘잘못 봤나?’
“부탁이라뇨? 그럴 땐 그냥 명령하시는 겁니다, 폐하.”
“명령은 말귀를 못 알아먹을 때나 하는 거고요. 사리 분별 정확하신 숙부님이야 그럴 필요가 전혀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죠?”
목소리에 웃음기가 배어 있었다. 말을 마친 헤르시스가 가볍게 묵례했다.
“그럼 저흰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숙부님.”
리즈는 그가 제 어깨에 팔을 두르고 돌려세우기 전까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팽팽한 긴장감에 질식할 것 같았다.
대공에게 미처 인사를 하지 못한 것이 생각났지만 다시 돌아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완전한 핏빛 적안이 되어 버린 대공의 눈을 마주보기가 두려웠다.
***
“너무하신 게 아니었을까요?”
대공의 시뻘게진 눈빛이 마음에 걸린 리즈가 물었다.
“난 너무 관대했던 것 같아 아쉬운데.”
“…….”
목 뒤를 깍지 낀 손으로 받치고서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헤르시스는, 마치 휴양지에라도 온 사람 같았다.
안절부절못하는 저와는 달리, 태평하기 짝이 없는 태도에 리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창밖엔 다시 한번 고개를 가로저을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정원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불쌍한 근위대원 스무 명이 보였다…….
“저자들은 그냥 풀어 주세요. 몬타네르 대공을 일개 근위대원이 무슨 수로 막겠어요? 불과 한 절기 전까지만 해도 본인들이 엄호하던 주군이었는데…….”
“그래서 봐준 거야.”
헤르시스가 맑은 날 호수 표면처럼 잔잔하게 말했다.
“아니었으면 죽였지.”
감은 눈꺼풀 아래로 길게 드리운 속눈썹 그림자를 바라보며 리즈는 생각했다.
‘케인은 이렇게 무자비하지 않았는데. 케인은 훨씬…….’
그 순간 헤르시스가 눈을 떴다. 심연을 꿰뚫어 보는 듯한 금빛 눈동자에 리즈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했다.
“이리 와서 앉아.”
헤르시스가 말했다.
그와 케인을 비교한 것이 미안하기도 해서, 리즈는 얌전히 그의 말에 따랐다.
“네…….”
“아까 같은 일 다시는 없게 할 테니 안심해.”
다정한 말투 속에 단호함이 스며 있었다.
“괜찮아요. 많이 놀라지도 않았어요.”
리즈는 이 일은 이대로 마무리 짓고 싶었다. 해결해야 할 더 중요한 일이 생각난 까닭이었다.
“저기, 폐하.”
“…….”
“왜 얘기 안 해 주셨어요? 릴리아에 대한 거 말이에요.”
“알아서 좋을 게 뭐지?”
헤르시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흐려졌다.
“저희 집안일이잖아요.”
“그대 친정은 이제 모르센 남작가라고 말했을 텐데.”
“하지만 베리움 성을 따르고 있는 이상 출신은 변하지 않잖아요.”
“그럼 베리움 성을 떼어 버려야겠군.”
“…….”
“말만 해. 무슨 성을 원해? 마음에 드는 걸로 붙여 줄게. 아니, 차라리 결혼을 서두르는 게 낫겠군.”
“폐하.”
리즈의 한숨 섞인 부름에 잠깐 반짝였던 헤르시스의 눈빛이 다시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베리움 가문의 후일에 대해선 내게 맡겨 둬. 그댄 아무 신경도 쓰지 말고.”
“아뇨.”
이번만큼은 리즈도 물러설 수 없었다.
“저한테 맡겨 주세요.”
헤르시스의 미간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왜지? 내가 알던 리즈는 집안을 벗어나고 싶어만 했지, 감싸 안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왜 갑자기 없던 애정이 생긴 거지?”
“애정은 친정 가문이 아니라 폐하한테 생겼죠!”
“…….”
무심결에 내뱉은 말이었다. 리즈는 제가 말하고서 되레 제가 놀라고 말았다.
‘내…… 내가 왜 이런 말을 했지?’
역시 몬타네르 대공과의 만남의 여파가 아직 가시지 않은 건가, 그래서 이런 헛소리를 지껄인 건가 싶었다.
리즈는 재빨리 본론으로 돌아왔다.
“제발 부탁드려요. 제 친정에 대한 처분은 제게 맡겨 주세요. 사람들 보기에도 그편이 나을 거예요.”
“사람들 눈은 아무래도 상관없는데.”
그는 여전히 단호했지만, 조금 전만큼은 아니었다.
“……그대에게 맡기면 뭘 할거지?”
아니. 이젠 단호한 것도 아니었다.
갑자기 말랑말랑해진 태도가 어쩐지 묘했지만, 리즈는 이 순간을 놓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 방식대로 벌을 줄 거예요.”
“관대한 처사는 곤란해. 릴리아 베리움은 내가 황후로 선포한 내 여자를 해치려고 했으니 어떤 식으로든 중죄는 피해 갈 수 없어.”
“관대하게 하지 않을게요. 저 믿으시고 제게 넘겨주세요.”
“…….”
헤르시스는 고민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리즈는 그가 승낙하리라는 것을 확신했다.
이윽고 그가 눈빛을 굳히며 결심을 내렸다.
“좋아. 그대에게 처분권을 넘기지.”
“정말요? 정말 감사합니다. 폐하.”
리즈의 입꼬리가 활짝 끌어 올려졌다. 그의 완고한 고집을 꺾었다는 사실이 기뻤다.
그래서 그가 다음 말을 했을 때 저도 모르게 흔쾌히 수락하고 말았다.
“대신 진도 2는 건너뛰게 해 줘.”
“그럴게요.”
리즈가 자신의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땐, 이미 늦어 버린 뒤였다.
***
십여 일 만에 지상으로 나온 여인의 눈에 한낮의 햇빛은 너무 강했다.
여인은 눈이 멀지 않도록 손차양을 만들었다. 조금 살 것 같았다.
막 한 걸음 내디디려는 찰나, 몇십 보 떨어진 곳에서 대기 중이던 또 다른 여인이 뛰어오는 게 보였다.
“고생 많으셨죠? 릴리아 아가씨.”
모니카가 그녀 어깨에 외투를 걸쳐 주었다. 그러곤 돌아서서 소매 끝으로 눈물을 훔쳤다.
릴리아의 몰골은 정말 엉망이었다.
화사하고 결 좋던 금빛 머리칼은 밀짚처럼 푸석푸석했고, 볕을 쐬지 못한 피부는 하얗다 못해 푸르게 보일 정도였다, 손톱은 물어뜯었는지 벽을 긁었는지 죄다 뭉개지고 갈라져 있었다.
제 아가씨에 애정이 그다지 많지 않은 모니카였지만 지금, 이 순간엔 눈물이 핑 돌았다.
“가요, 얼른 가서 뭐라도 좀 먹어요.”
모니카가 아가씨의 가녀린 어깨를 외투와 함께 감싸며 입구 쪽으로 이끌었다.
입구에는 경비대원 두 사람이 기다란 창을 들고 서 있었다.
이미 언질을 받은 그들은 릴리아와 모니카의 걸음을 방해하지 않았다.
문을 나서니 널찍한 수로 위로 아치형 다리가 나왔다.
문득 지하 감옥을 같이 썼던 동료에게서 들은 말이 떠올랐다.
‘시체가 되어 들것에 실리지 않고선 다리를 건너지 못한대.’
“후훗.”
릴리아가 웃었다.
자신은 들것에 실려서가 아니라 멀쩡한 두 다리로 이곳을 건너고 있으니까.
이런 걸 행운이라고 해야 하나. 아님, 저주라고 해야 하나.
릴리아는 자신의 낡은 구두가 밟는 돌다리와 그 아래로 보이는 유수의 느릿한 흐름을 바라보며 너털웃음을 흘렸다.
갑자기 모니카가 멈춰 섰다. 릴리아는 고개를 들어 모니카의 당혹스러운 시선이 고정된 곳을 좇았다.
거기에 누군가가 있었다.
‘가만, 저 사람이 누구였더라?’
릴리아의 눈매가 가늘게 좁혀졌다.
너무 긴 시간을 어둠과 환상 속에서 살아온 탓일까? 선뜻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저게 누구지?”
“그게…… 큰 아가씨인 것 같습니다만…….”
정신이 말짱한 모니카도 확신하지 못하는 걸 보니 제가 바보가 된 건 아닌 듯했다.
릴리아는 상대를 찬찬히 살폈다.
그녀는 이전에 자신이 알던 샘 많고 심술궂던, 하지만 내면은 약해 빠졌던 언니와는 도무지 같은 사람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성숙하고 우아했다.
비단 외형뿐만이 아니었다.
그 무엇도 범접하지 못할 위엄과 당당함이 리즈를 감싸고 있었다.
고작 황실에 십여 일 산 것만으로 저렇게 된다고?
릴리아는 아니라고 보았다.
언니의 변화는 그보다 훨씬 일찍 시작되었다. 마치 알을 깨고 나온 새처럼, 언니는 자신 안의 무언가를 각성했다.
‘그래. 나는 오래전에 이미 알고 있었어.’
하지만 인정하지 않았다. 그저 한순간의 변화라고만 생각했다.
누구나 아주 잠깐은 변할 수 있는 거니까. 늘어났다가 손을 놓으면 원래대로 돌아오는 고무줄처럼 금세 제자리로 돌아오지. 그게 사람이었다.
하지만, 언니는 아니었다.
언니는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본래의 궤도에서 영원히 이탈해 버렸다.
그걸 좀 더 일찍 인정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저 자리가 내 자리가 될 수 있었을 텐데.
“아…… 안녕하세요. 리즈 아가씨.”
모니카가 고개를 숙여 예를 갖췄다.
릴리아는 몸을 숙이지 않았다. 그건 그녀가 가진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타라. 데려다줄게.”
리즈가 말했다.
릴리아는 그녀 뒤편의 호사스러운 마차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마차가 같은 곳에 있지 않은 게 다행스러웠다. 누가 보면 짐마차인 줄 알았을 테니까.
모니카가 어떻게 할 건지 묻는 눈으로 릴리아를 보았다.
“그러죠.”
릴리아가 모니카의 손을 떨쳐 냈다. 그러곤 성큼성큼 마차로 다가가 당연하다는 듯이 마부의 손을 붙잡고 먼저 마차에 올라탔다.
‘언니가 먼저 타셔야죠.’
그런 가식적인 예의 따위 릴리아는 진작에 내다 버렸다. 삶의 의지를 잃고 비소를 들이켜던 그 순간에 이미.
“넌 네 마차를 타고 가.”
우물쭈물하고 있는 모니카에게 명을 내리고서, 리즈는 제 마차에 올랐다.
릴리아는 정방향 창가 자리에 당당히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리즈가 맞은편에 앉자, 그녀는 리즈를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마주했다. 시선에서 죄책감, 자괴감, 복종과 같은 감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고요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의미심장한 미소만이 오갔다.
뚫린 창으로 흘러들어 오는 마부의 목소리가 침묵을 깨뜨렸다.
“어디로 갈까요? 예비 황후 마마.”
“이니드 기암절벽.”
리즈가 말했다.
원작 속 자신이 최후를 맞이한 장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