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검정 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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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검정 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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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검정 튤립
2023.08.03.
‘왜지?’
평의회를 마치고 나온 헤르시스를 보는 이샤르의 눈에 의아함이 번져 갔다.
아무것도 달라진 건 없는데.
원로들은 여전히 고집불통에 사적인 약점을 하나하나 나열해서 압박을 해야만 못 이긴 척 고개를 수그렸다.
심지어 조금 전엔 대놓고 몬타네르 대공 때가 훨씬 나았다는 말까지 했으니, 원래대로라면 다 죽여 버릴 듯한 눈빛으로 연무장으로 향해야 하는 게 맞는데. 어째서 저렇게 기분이 좋을까?
“뭐 좋은 일 있으십니까?”
“좋은 일…… 있지.”
헤르시스가 미소 띤 얼굴로 그를 스쳐 지나가며 대답했다.
이샤르는 고개를 갸웃하며 뒤를 따랐다.
‘이상한데.’
자신이 알기로 주군이 저렇게 히죽댈 만한 일이란 하나뿐인 걸로 아는데.
그리고 그 일은 어젯밤 일어나지 않은 걸로 아는데…….
“이샤르.”
앞서가는 헤르시스의 부름에 이샤르가 보폭을 넓혀 바싹 따라붙었다.
“예, 폐하.”
“황후 궁에 배치해 두었던 근위대는 1개 소대로 축소한다.”
“예에?”
이샤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폐하께서 웬일이십니까? 중대로도 부족하다며 대대로 하자고 주장하시더니?”
“예비 황후가 마음을 굳혔거든. 도망 안 가기로.”
“아…….”
이샤르의 의문이 일시에 해소되었다. 그의 엷은 입매가 비틀렸다.
‘웬일로 정상적인 지시를 내리나 했네.’
그리고 생각은 이제 리즈 베리움에게로 향했다.
‘그나저나 예상보다 빨리 마음을 다잡았군. 한참 고민할 것처럼 보이더니.’
“그래서 이젠 어떻게 하시겠답니까?”
“황후로서의 소임을 다하고 싶다는군.”
그 말은 헤르시스뿐만이 아니라 이샤르의 얼굴에도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게 했다.
‘괜히 자리만 차지하고 민폐만 끼치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이네. 그럼 이젠 교육 강도를 좀 더 높여 봐도 되겠어.’
“이샤르.”
헤르시스의 나지막한 부름이 이샤르의 득의양양한 표정을 공손하게 바꿔 놓았다.
“예, 폐하.”
“결과가 좋으니까 봐주는 거다.”
“……?”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자 헤르시스가 걸음을 멈추지도 않고 덧붙였다.
“또 한 번 주제넘은 짓을 하면 그땐 봐주지 않을 거다. 아무리 너라고 해도.”
이샤르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 주군은 멈추지 않았다.
멀어지는 주군을 바라보는 이샤르의 눈빛이 당혹감으로 일렁였다.
‘다 알고 계셨구나.’
***
리즈는 갑작스러운 로사의 태도 변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주 잘하셨습니다. 지금처럼만 하시면 될 거 같아요.”
“…….”
“자세도 아주 좋으세요. 표정도 황후 폐하답게 근엄하시고, 눈빛도 또렷해지셨어요. 박수를 쳐 드리고 싶네요.”
내가 그새 장족의 발전을 이루었구나…… 하마터면 그리 생각할 뻔했다.
조금도 웃고 있지 않은 눈과 한소리 하고 싶어 근질거리는 로사의 입매를 보지 않았다면.
“로사.”
“네, 아리스테 님.”
로사가 가까이 다가와서 허리를 숙였다.
“무슨 일 있었어? 왜 갑자기 안 하던 칭찬을 하는 거지?”
“…….”
“말해 봐. 괜찮으니까.”
“실은…….”
로사가 몹시 고통스럽게 뒷말을 입에 담았다.
“폐하께서 선을 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리즈가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럼 그렇지. 역시 폐하의 입김이었어.’
“아리스테 님의 심기를 거스르면 삼대를 멸할 것이라고 하셔서요. 발데미온 공작께도 같은 말씀을 하신 걸로 압니다.”
이번엔 보다 긴 한숨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이샤르 경한테까지 그런 말을 할 건 뭐야?’
물론 리즈도 이샤르가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지금은 그만한 충신이 없는데. 이샤르가 없다면 본인의 입지가 얼마나 불안한지 잘 알 텐데 좀 잘해 주지.
이샤르가 지조 있고 충심이 강한 남자라 다행이었다.
‘아니었다면 속에서 칼을 갈았겠지.’
리즈가 로사를 돌아보며 말했다.
“잠깐 산책 좀 하고 와도 되겠지? 밖에 호위들도 있으니 혼자 다녀올게.”
“예, 아리스테 님.”
숨통 틀 순간만을 엿보던 로사로선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밖으로 나온 리즈는 안뜰 중간중간에 놓인 매끌매끌한 포석 길을 밟고서 화단 사이를 거닐었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온 이래 처음으로 건물 바깥에 나와 본 듯했다.
창 너머로 보았을 땐 완연한 봄날처럼 따스하게 보였는데, 직접 나와 보니 얇은 옷감으로 스며드는 공기가 아직 차가웠다.
화단에 봄꽃이 듬성듬성 피긴 했지만, 무성하게 만발하려면 조금 더 시간이 지나야 할 성싶었다.
외투를 가져와야겠다 싶어 왔던 길로 돌아가던 리즈의 발걸음이 문득 비어 있는 화단 앞에서 멈췄다.
다른 화단보다 햇빛이 잘 드는 곳에 자리했고 흙도 더 고왔다.
어쩐지 여기에서 뭐가 피어날지 알 것 같았다.
리즈는 팻말을 확인했다.
“역시…….”
튤립 화단이었다.
엊그제부터 읽기 시작한 역대 황후사 책에서 선대 황후가 튤립 애호가였다는 것을 본 것 같았다.
그래서 희귀한 색상의 신품종 튤립 구근도 황궁 화훼 창고에 많이 보관되어 있다고 했다.
“그럼 그 귀하다는 검정 튤립도 있으려나?”
리즈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있지요. 당연히.”
느닷없이 들려온 대답에 리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검은색 튤립을 보고 싶으십니까? 제집 유리온실 한편에서 아주 잘 자라고 있습니다만, 내일이라도 당장 가져다 드려야겠군요.”
“…….”
리즈는 천천히 뒤로 돌아섰다.
역시 그가 있었다.
***
섭정 대공 다미엥 몬타네르는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기나긴 섭정 생활 끝에 황제가 되는가 싶다가 일순 내동댕이쳐진 과거 따위 그의 외모와 기개에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리즈가 치마폭을 넓히고 허리를 숙여 예를 갖추려 했다. 하지만 몬타네르 대공이 더 빨랐다.
“신 다미엥 몬타네르, 황후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아…….”
리즈가 난감한 얼굴로 더듬거렸다.
“화…… 황후 폐하라뇨. 전 아직 폐하의 약혼녀 신분일 뿐인데요.”
“미리 익숙해지시는 것도 좋지요.”
몬타네르 대공이 넉살 좋게 말했다.
리즈는 뭐라고 받아쳐야 할지 몰라 눈만 깜박거렸다.
역시 이런 갑작스러운 순간에 대한 대처법이 부족하다는 걸 절감했다.
“그나저나 폐하께서 검정 튤립을 보고 싶어 하시는지 몰랐습니다. 진작 알았다면 일전에 저희 집에 방문하셨을 때 보여 드렸을 텐데…….”
대공의 얼굴에 아쉬운 기색이 가득했다.
리즈는 아쉽진 않았고, 그저 민망했다.
어째서 일전에 그 집을 방문하게 되었는지 떠올랐기 때문이다. 대공이 같은 생각을 했는지 리즈의 정곡을 찔렀다.
“그러고 보니 사람 인연 참 묘하군요. 그때는 혼담이 오가던 사이가 지금은 시숙과 조카 며느님으로 만나게 되다니 말입니다. 허허.”
“…….”
리즈는 이 순간, 자신을 쳐다보는 은근한 눈빛에서 그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앙큼한 것. 헤르와 진작부터 내밀한 관계였으면서 감쪽같이 나를 속였겠다.’
하지만 몬타네르 대공은 이내 공손한 눈빛으로 돌아와선 고개를 숙였다.
“제가 너무 짓궂었나요? 웃자고 한 말이었는데. 송구합니다. 용서하십시오.”
“괜찮습니다. 다 지나간 일인데요, 뭘. 그리고…….”
“…….”
“검정 튤립은 보여 주시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궁금하긴 한데, 나중에 화단에 꽃이 피면 그때 보도록 하겠습니다.”
리즈는 이곳에 더 있고 싶지 않았다. 그는 예나 지금이나 대면하기 껄끄러운 사람이었다.
“그럼 이만.”
그녀는 가볍게 묵례하고서 그의 앞을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그때, 갑자기 불어온 칼바람에 리즈가 저도 모르게 어깨를 감싸 쥐며 파르르 떨었다.
“이런, 옷을 얇게 입으셨군요.”
몬타네르 대공이 성큼 다가오더니 말릴 틈도 없이 제 겉옷을 벗어 리즈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손길이 묘하게 강압적이어서 떨쳐 내기가 쉽지 않았다.
“여자의 몸은 항상 따뜻해야 한다죠? 돌아가신 형수님께 들었습니다.”
“…….”
“형수님은 항상 제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해 주셨지요.”
그 말에 리즈가 적의가 담긴 말투로 물었다.
“선황후 폐하와 많이 친하셨나 봐요?”
“그럼요. 돌아가신 형님보다 형수님과 때론 더 잘 통했죠. 그러니 그분이 어린 아드님까지 제게 맡기신 게 아니겠습니까?”
원작에서 읽고 헤르시스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아니었다면 틀림없이 저 파렴치한 거짓말을 믿었을 것이다.
얼굴과 말투에 거짓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자기 자신마저도 완벽하게 속이는 게 분명했다.
리즈는 한시바삐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어깨에 걸쳐진 외투에도 불구하고 한기가 가시지 않았다. 어쩌면 돌개바람 때문이 아니라 이 남자의 인간성 상실이 뿜어내는 냉기였는지도 몰랐다.
“옷은 감사했습니다. 세탁해서 제 시중인 편에 돌려 드릴게요.”
리즈는 돌아섰다. 하지만 그녀가 한 발 채 떼기도 전에 그의 말이 리즈를 멈춰 세웠다.
“동생분 말입니다만.”
“…….”
“어제 감옥지기에게 들은 말로는, 자결을 시도했다고 하더군요.”
리즈가 천천히 돌아섰다. 보랏빛 눈망울이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자…… 자결을…… 시도했다고요? 릴리아가?”
리즈는 믿을 수 없었다.
릴리아는 그렇게 심지가 약한 아이가 아니었다. 오히려 살기 위해 온갖 가식으로 무장하고, 그 가식적인 모습을 제 진짜 모습이라고 스스로 세뇌할 정도로 강한 아이인데.
하지만 몬타네르 대공이 거짓을 말했을 리는 없었다.
금세 밝혀질 일을 뭣 하러 거짓말하겠는가.
“옷 속에 몰래 숨겨 놓은 비소를 먹은 것 같다더군요.”
“…….”
“아무튼 알려 드려야 할 것 같아서 말씀드립니다. 황제 폐하께선 쉬쉬하길 명하셨지만, 같은 피를 이어받은 자매이니 알고 계셔야죠. 아니 그렇습니까, 폐하?”
리즈는 머릿속에 희뿌연 안개라도 낀 것처럼 몽롱한 기분을 느꼈다.
당혹감과 불쾌함이 안개 속에서 몽글몽글 퍼져 나갔지만, 그렇다고 소식을 전해 준 이를 탓할 수는 없었다.
그는 그녀가 마땅히 알아야 할 소식을 전했을 뿐이므로.
비록 그 의도가 순수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건 숙부님께서 상관하실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불현듯 익숙한 목소리가 딱딱한 기류를 가르며 리즈의 멍해진 정신을 일깨웠다.
리즈와 몬타네르 대공이 동시에 그쪽을 돌아보았다.
헤르시스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눈빛이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