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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화 시간 갖기 (63/65)


#63화 시간 갖기
2023.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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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잤어?”

갑자기 들려온 헤르시스의 목소리에 리즈는 비로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오셨어요?”

리즈가 안락의자에서 황급히 일어나 그를 맞았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연분홍 실크 가운이 맨다리를 사락사락 건드렸다.

“여태 안 자고 뭐 해? 그대는 열 시 전후로 잠자리에 드는 사람 아니었나?”

“아…….”

리즈는 그제야 시간을 확인했다.

‘언제 시간이 저렇게 됐대?’

자정이 넘어 있었다.

상념에 빠져 있느라 시간이 이렇게 된 줄도 몰랐다.

‘지금이라도 도망가십시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가뜩이나 무거운 중압감에 짓눌리고 있던 리즈에게 이샤르의 제안은 그야말로 가뭄의 단비 나 다름없었다. 능력 있고 믿을 만한 남자가 내민 제안이라 더욱 유혹적으로 느껴졌다.

‘내일 오전까지 말씀드릴게요.’

고민의 시간이 필요했다.

‘혹시 제가 내일 오전까지 공께 아무 언질이 없다면, 거절의 의미로 받아들여 주세요.’

‘그러죠.’

이샤르는 가볍게 승낙하고 가 버렸다. 그리고 리즈는 그가 빠뜨린 상념 속에 장장 한나절을 잠겨 있었다.

“혹시 날 기다리느라 안 자고 있었던 건가?”

갑작스러운 헤르시스의 물음이 침잠한 리즈의 의식을 완전히 수면 밖으로 끌어올렸다.

“하하…….”

멋쩍은 웃음으로 대답을 때우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그거…….”

“……?”

“준비가 되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거지?”

길고 섬세한 손가락이 리즈의 턱을 지그시 붙잡아 올렸다.

깊은 눈매 속의 금안이 긴 속눈썹으로 인한 그늘 덕에 한결 그윽하게 빛났다.

그의 눈빛과 표정, 입고 있는 옷, 방 안의 분위기, 얼마 남지 않은 밀랍 초. 모든 것이 리즈에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그를 받아들여. 본능에 충실해.’

조금만 덜 외골수였다면 그녀 또한 그 속삭임에 굴복했을 것이었다.

“아뇨!”

“…….”

“제 말뜻은 그게 아니고요……. 사실은, 폐하를 기다리느라 안 잔 것도 아니에요.”

헤르시스의 미간이 딱딱하게 굳었다. 섬세한 손가락이 리즈의 턱에서 천천히 떨어져 나갔다.

“그럼 뭐 하느라고 안 잤지?”

그가 다소 허탈한 얼굴로 리즈를 지나쳐 안락의자 두 개 중 하나에 앉았다.

리즈가 그 맞은편에 앉아 말했다.

“그냥…… 생각 좀 하느라고요.”

“무슨 생각?”

그가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짚으며 집요하게 물었다.

“그게…….”

말과 말 사이의 간격을 길게 두어서 좋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조…… 좋은 황후가 되려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보았어요.”

“…….”

“일단은…… 귀족들에 대해서 좀 파악을 해야 할 것 같더라고요. 누가 확실한 우리 편이고, 누가 잠재적으로 우리 편이 될 가능성이 높은지 아는 건 매우 중요하니까요.”

제법 그럴싸한 변명이었다. 제게도 이런 임기응변 능력이 있었나 감탄하려던 찰나.

“리즈.”

헤르시스가 다정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런 거 할 필요 없어.”

“…….”

“그대에게 일이나 시키려고 데려온 거 아니니까. 그대는 그냥 내 옆에만 있으면 돼.”

“그럼 정부나 다름없잖아요.”

“…….”

“혹시 제가 못 미더우셔서 그러세요? 제가 황후 자리에 많이 부족한 인물이라서?”

저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온 말이었다. 하지만 꼭 한 번 묻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제가 느끼는 걸 그도 느끼는지 궁금했으므로.

약간의 정적이 흐른 뒤, 헤르시스가 되물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

“내가 그대를 고작, 그 정도의 마음가짐으로 이곳에 데려왔을 거라고?”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어쩐지 생소했다.

차라리 화를 내는 게 나을 정도로 사람을 안절부절못하게 만드는 말투였다.

신중히 대답을 고르느라 리즈가 잠시 머뭇거리자, 그는 그걸 긍정이라 여기곤 말했다.

“나를 그렇게밖에 생각하지 않았다니, 조금 슬프네.”

그가 한숨을 푹 내쉬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오늘은 그냥 돌아가는 게 좋겠어. 내가 그대에게 그런 생각을 하게끔 행동한 게 뭐가 있는지 돌아볼 시간이 필요하군.”

“…….”

“그럼 쉬도록 해.”

헤르시스가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제 앞에 텅 빈 자리가 보이자, 그제야 리즈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에요.”

헤르시스가 멈춰 섰다. 하지만 아직 등을 돌리고 선 채였다.

리즈는 말을 이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러니까…….”

리즈는 사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해야 할 말은 알 것 같았다.

그를 따라 이곳에 걸음 하던 순간, 이미 알고 있지 않았나? 이것이 원작을 비튼 대가로 제게 주어진 새로운 운명임을?

그러니 이제 받아들여야 한다. 다른 선택지는 없다.

‘지금이라도 도망가십시오. 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저 도망 안 가요!”

“…….”

“그리고…… 황후로서 해야 할 일도 다 할 거예요.”

이샤르에게 해야 할 말이었지만, 헤르시스가 듣기엔 다소 뜬금없을 수도 있지만, 상관없었다. 각오를 다진 리즈는 비로소 후련함을 느꼈다.

그가 천천히 돌아섰다. 눈썹이 미묘하게 꿈틀댄다 싶더니, 잔뜩 억눌린 목소리가 그의 잇새로 새어 나왔다.

“다시 말해 봐.”

“…….”

“조금 전에 한 말 다시 말해.”

짐승의 그르렁거림처럼 사나운 목소리에 리즈는 어깨를 움찔했지만, 이내 용기 내어 입을 열었다.

“도망 안 가고 황후의 소임을 다하겠다고요. 그러니까 기회를…… 으앗!”

말을 끝내기도 전에 헤르시스가 성큼 다가와 리즈를 안아 들었다.

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그의 두 팔 사이에 가둬진 뒤였다.

“너…… 거짓말이면 각오해.”

***

리즈의 도망은 헤르시스에게 생각보다 큰 트라우마를 안겼다.

그는 황후 궁 안팎에 제 수하들을 잠복시켜 놓았다. 근위대 1개 중대에 달하는 규모였다.

시중인들은 모두 제 사람들로 채워 놓았고, 그녀에게 일어나는 일은 모두 제게 보고하도록 지시해 놓았다.

하지만 그렇게 해도 그의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았고, 마음은 언제나 안절부절못했다.

그도 그 이유를 모르진 않았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리즈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자신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연기처럼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할 수만 있다면 그녀의 손과 제 손을 기다란 쇠사슬로 연결해 두고 싶었다.

‘그랬다간 그때야말로 무슨 수를 써 서든 도망가겠지.’

말을 물가로 끌고 갈 순 있지만 물을 먹게 할 수는 없다고 했다.

리즈를 도망가지 못하게 철통같은 감시 벽 속에 살게 할 수는 있지만, 그녀 스스로가 그 옆에 남겠다 마음을 먹어 주지 않는 이상 그의 불안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한 마디, 딱 한 마디 말만 들으면 되는데 그 말을 듣는 건 무리겠지. 케인이라면 몰라도 이 얼굴에게 도망가지 않겠다는 약조 따윈 하지 않을 테니까…….

“저 도망 안 가요!”

“…….”

그 말을 듣는 순간 헤르시스는 일순 머리가 멍해졌다.

제가 들은 것을 믿을 수 없었다.

“다시. 다시 말해.”

그래서 조금 무섭게 다그쳤더랬다.

이 도톰한 입술이 다시금 그 예쁜 말을 내뱉게 하기 위해서.

“도망 안 가고 황후의 소임을 다 하겠다고요.”

“…….”

황좌를 탈환했을 때의 기쁨도 감히 이에 비견될 수 없었다.

몸속에 불을 지핀 것 같았다. 끓어오르는 열기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는 리즈를 번쩍 안아 들고 침대 위에 내던지다시피 눕혔다.

“너…… 거짓말이면 각오해.”

그가 으르렁거리자 리즈의 보라색 눈이 겁을 집어먹고 세차게 일렁였다. 그 두려움을 미처 인식하지 못할 만큼 그는 황홀경에 빠져 있었다.

열기가 뿜어내는 수증기가 안개처럼 그의 머릿속을 흐리게 했다.

가지고 싶었다. 그녀의 모든 것을 소유하고 싶었다.

일단은 이 예쁘고 사랑스러운 …….

“아…… 안 돼요!”

“…….”

“시……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잖아요.”

리즈의 발음이 뭉개졌다. 위험을 감지한 그녀가 제 입술을 손으로 막고 있었다.

조그만 손이 코까지 덮고 있었다. 자수정 같은 동그란 눈만이 꺼져 가는 밀랍 초의 불빛을 품고 요동치고 있었다.

그 양쪽 눈을 흥미롭게 번갈아 보며 헤르시스가 말했다.

“그대가 이렇게 나오니까 더 오기가 생기네.”

그가 눈매를 좁히며 짓궂은 웃음을 흘렸다.

리즈는 그가 자신을 강제로라도 취하려 마음먹은 게 분명하다 확신했다. 벌어진 가운 아랫단 사이로 허벅지가 노출된 것이 몹시 신경 쓰였다.

“……!”

갑자기 헤르시스의 그림자가 걷히고 리즈의 전신에 꺼져 가는 불빛이 은은하게 드리웠다.

헤르시스가 리즈의 옆에서 팔을 세워 머리를 받치고 모로 누웠다.

“해.”

그가 리즈를 비스듬히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대가 말하는 시간 갖기.”

“정말…… 요?”

리즈가 가운을 여미며 믿지 못하겠다는 듯 묻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가 이렇게 기특한 결심을 해 줬으니, 나도 보상을 해야지.”

리즈의 눈에 비친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편안해 보였다. 조금 전, 돌아 버린 눈빛을 하고 있던 이와 동일 인물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결심을 하게 된 거지?”

헤르시스가 물었다.

“운명 때문에요.”

“……운명?”

“네. 모든 게 운명 같아서요. 그래서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두루 적용되는 포괄적인 대답이었다. 또한, 진실이었다.

문득 리즈는 제 머리를 쓰다듬는 헤르시스의 손길을 느끼고선 시선을 돌렸다.

머리칼을 서너 갈래로 가르는 그의 기다란 손가락이 은근한 관능을 불러일으켰다.

“리즈.”

그가 빗질을 멈추지 않으며 말했다.

“네, 폐하.”

“헤르라고 불러.”

“아…… 다음에요.”

“그것도 시간이 필요한가?”

머리카락이 찰랑 매트 위로 떨어지면, 그는 다시 손가락을 넣어 붉은 머리칼을 여러 갈래로 빗어 내렸다.

“네…… 필요해요.”

“그래, 그것도 기다려 줄게.”

“……감사합니다.”

빗질이 느닷없이 끝났다.

다음 순간 리즈는 제 앞머리 사이로 내려앉는 촉촉한 입술을 느낄 수 있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헤르시스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뜨며 말했다. 그러고선 검지 손끝으로 리즈의 콧날을 가볍게 쓸며 또 말했다.

“내일은 여기.”

이번엔 엄지가 리즈의 입술을 옆으로 쓸었다.

모레는 여기라는 뜻이었다.

“그다음 날은 여기.”

그가 손등으로 리즈의 목선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시선이 아래쪽으로 더 미끄러지는가 싶더니 다시 제 눈에 고정되었다.

“이런 식으로 하면, 그대가 말하는 시간 갖기가 되는 건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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