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화 발데미온 공작 (62/65)


#62화 발데미온 공작
2023.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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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아리스테 님을 모시게 될 로사라고 합니다.”

리즈의 전담 시중인이 배정되었다.

파란빛이 감도는 검은 머리에 군청색 눈동자를 지닌 서른 전후의 여인이었다.

‘서른 전후라…… 미라벨하고 거의 동년배네.’

하지만 그녀와 미라벨의 공통점이라곤 나이밖에 없는 것 같았다.

살갑고 따스한 미라벨에 비해 이 여인은, 머리 색과 눈동자 색만큼이나 차갑고 딱딱한 인상에 건조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아리스테 님께서 황후 자리에 걸맞은 품격을 지니실 수 있도록 품위 교육도 병행할 것입니다.”

“교육…… 이라고?”

‘그런 말 없었잖아? 황후 자리에 앉아만 있으면 될 것처럼 말하더니!’

리즈는 거하게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궁내부로부터 아리스테 님과 아리스테 님의 가문에 대한 보고를 받았습니다만…….”

그러는 사이에도 이 무미건조한 시중인의 말은 이어졌다.

“꽤 사랑받고 자라셨더군요.”

“……?”

그런 말은 처음 들어 봤다. 내가 사랑받고 자라다니.

“뭘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닌가?”

“사가에서 아리스테 님의 시중을 전담했던 모르센 남작부인 말입니다. 그분이 꽤 금지옥엽으로 보살피셨다는 걸 압니다.”

“아…….”

미라벨만 놓고 본다면…… 그래, 그 말이 맞긴 했다.

“이런 말씀 드리게 되어서 송구스럽지만, 여기선 그런 보살핌은 기대하지 않으시는 게 좋으실 겁니다.”

로사의 목소리가 한층 더 삭막한 음조를 띠었다.

“황후의 자리는 어리광을 부려선 안 되는 위치니까요. 그래서 전 앞으로 아리스테 님께서 황후의 자리에 어울리도록 단련해 드릴 것입니다.”

‘뭐지? 이 살벌한 전개는?’

원작에서도 이런 내용이 있었던가? 대강 읽어서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없었던 거 같다.

아무래도 릴리아는 눈치가 빠르고 처세가 뛰어났으니까 교육이니 단련이니 하는 것들은 필요 없었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앞으론 뭘 하면 되지?”

“가장 기초부터 배우실 겁니다.”

“기초라 하면?”

“표정이요.”

“……?”

“아리스테 님께선 감정이 얼굴에 너무 잘 드러나십니다. 황후에 오르실 분은 그러시면 안 되지요. 그건 자기가 가진 카드 패를 상대에게 보여 주는 것과 똑같으니까요.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얼 느끼고 있는지 상대가 모르게 해야 합니다.”

언젠가 어머니한테서도 비슷한 걸 들은 것 같다.

‘남자들이 전쟁터에서 갑옷을 입듯, 여자들은 사교계에서 가식을 둘러야 한단다. 그것만이 어떻게든 약점을 들추어내려는 저 위선 덩어리 귀족들에게서 자기 자신을 보호해 줄 것이야.’

이제 보니 어머니에게도 나이만큼의 연륜은 있었다.

다만 연륜보다 강한 허세가 그걸 상쇄해 버렸을 뿐이지.

로사가 차 준비를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리즈는 거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정말 그녀가 말한 대로 자신의 얼굴이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지 어떤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아닌데.’

치켜 올라간 눈매, 오뚝 솟아오른 콧날, 고집스럽게 다물린 입매는 좀처럼 상대에게 휘둘릴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거야 지금 아무런 자극도 없으니까.’

리즈는 탁상 거울과의 의미 없는 눈싸움을 관두었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유리창 너머로 헤르시스가 있는 프레네 본궁의 황금 돔이 눈에 들어왔다. 태양 빛을 사선으로 받아 찬란하게 빛을 발하는 지붕이었다.

하지만, 그 찬란함과는 정반대로 리즈는 스스로가 작아지는 기분을 느꼈다.

리즈는 자신이 제 그릇에 맞지 않게 과분한 자리에 앉아 있다는 생각을 지우지 못했다. 어설픈 처신으로 헤르시스에게 방해가 될 걸 생각하니 두렵기도 했다.

‘황후라니. 예비 황후라니.’

아직도 꿈만 같았다.

이제 그만 좀 깨어났으면…… 하는 꿈.

“휴우…….”

“한숨 쉬지 마십시오!”

회초리처럼 매서운 질책이 리즈의 정신을 찰싹 때렸다.

“표정 관리는 주변에 사람이 있든 없든 계속되어야 합니다.”

엄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로사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굵기도 달랐을뿐더러, 엄한 정도도 훨씬 달랐다.

리즈는 거울에 비친 목소리의 정체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돌아선 리즈에게 남자가 간단한 묵례로 예를 차렸다. 찻잔 트레이를 들고 옆에 서 있던 로사가 그를 소개했다.

“발데미온 공작이십니다.”

리즈가 표정을 갈무리 지으며 그에게 인사했다.

“오랜만이군요, 이샤르 경.”

리즈에겐 그 이름이 더 익숙했다.

***

이샤르 로뎀 닐그리드 발데미온.

최연소 재무관이자 황제 헤르시스의 오른팔.

시류에 쉽게 흔들리는 갈대 같은 가문들 사이에서 독보적인 지조와 절개를 자랑하는 발데미온 공작가의 14대 계승자.

그리고…….

한두 절기 전에 그녀에게 비프스튜 만들어 준 남자.

“여기서 이렇게 뵈니 그때와는 참 많이 달라 보이는군요.”

리즈가 말했다. 확실히 그랬다.

말끔한 정복 차림에 대귀족을 상징하는 푸른색 가슴 띠를 달고 있는 이 도도한 은발의 남자가 그날, 광목 셔츠 차림에 통 넓은 파자마 차림으로 제게 비프스튜를 대접하던 그 남자라고는 믿기 힘드니까.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그런데,”

이샤르가 말끝에 자연스레 질책을 덧붙였다.

“영애께선 그때와 달라지신 게 없군요.”

“…….”

“아무래도 교육 시간을 늘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국혼까지 도저히 못 맞출 것 같으니까요.”

웬만하면 참아 보려 했거늘.

“폐하가 교육을 맡긴 건 로사일 텐데, 어째서 경이 제게 훈수를 두는 것이지요? 제게 훈수 두고 싶다면 폐하의 허락을 받는 게 우선일 것 같은데요.”

리즈가 톡 쏘아붙였다. 하지만 이샤르는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고 대꾸했다.

“영애의 교육을 결정한 건 바로 접니다.”

“……?”

“폐하께선 모르십니다.”

리즈가 눈을 크게 뜨고 상대를 바라보았다.

이샤르가 말을 이었다.

“폐하께선 허락하지 않으실 게 뻔하니까요. 당연하죠. 힘들게 손에 넣으신 예비 황후를 불편하게 하고 싶진 않으실 테니.”

‘어쩐지.’

헤르시스답지 않은 모순이라고 리즈도 생각했었다.

그게 다 이 남자가 시킨 일이었다니, 비로소 의문이 해소가 되었다.

“용감하시네요. 믿는 구석이라도 있으신가 보죠? 이렇게 독단적으로 행동하시는 걸 보면?”

“믿는 구석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폐하께서 그런 걸 봐주시는 분도 아니시고.”

이샤르는 그 가문만큼이나 올곧았다.

“해야 할 일이니까 했습니다. 황후의 자리는 어린아이 소꿉놀이하듯 맡을 수 있는 역할이 아니니까요. 혹시 그렇게 쉽게 보고 따라오셨다면 지금이라도 그만두십시오.”

무례하고 괘씸하기 짝이 없는 남자였다.

하지만 헤르시스에겐 다를 터였다.

이런 드높은 절개를 가진 남자가 오른팔로 있는 한 헤르시스는 천군만마를 얻은 것처럼 든든할 터였다.

어쩌면 기억나지 않는 원작 후반 내용에 이 남자의 역할이 꽤 비중을 차지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 남자의 무례도 참아 줄 만했다.

“두렵지 않으세요? 제가 경의 무례를 폐하께 고해바칠 수도 있는데?”

“각오하고 있습니다.”

‘각오하고 있다…….’

리즈가 이샤르의 말을 잠시 속으로 되뇌어 보곤 말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단 말씀이시군요.”

“트리가르 발데미온의 후손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트리가르 발데미온.

발데미온 공작령의 전신인 발데미온 왕국의 역대 군주 중 한 사람으로, 백여 명의 군사로 일 만에 달하는 적군을 섬멸시킬 정도로 지략이 뛰어나고 용맹한 장수였다고 역사서에 나와 있었다.

그자가 백 년만 늦게 태어났어도 제국의 이름이 바뀌었을 거라는 말은 공공연한 비밀조차도 아니었다.

‘그자에 견줄 정도로 스스로가 용맹하단 말이지.’

리즈는 동의할 수 없었다.

이자는 용맹한 게 아니라 교활했다.

‘내가 헤르시스에게 말하지 못할 걸 알고 있어.’

리즈의 생각을 증명하듯 그가 말했다.

“정말 두려운 건 죽음이 아니라, 이곳이 다시 몬타네르 대공의 수중으로 들어가는 일이죠.”

“…….”

“해서 부탁드립니다. 폐하를 위해 영애께서도 마음을 단단히 먹어 주십시오.”

그렇게 말하고 나서 이샤르가 고개를 살짝 돌려 로사에게 무언의 지시를 내렸다.

로사는 그의 사람답게 얌전히 자리를 비켜 주었다.

딸깍-, 문이 닫히자 이샤르가 눈빛을 굳혔다.

“혹시 그게 싫다면 지금이라도 도망가십시오. 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

“목숨을 걸고서라도.”

***

원로들과의 계속된 기 싸움이 헤르시스에게 남긴 것은 얼굴에 짙게 드리워진 피로의 그림자뿐이었다.

그들은 위압적으로 나와야만 겨우 고개를 숙였다.

그러지 않고 좋은 말로 설득하려 들면 듣는 시늉조차도 하지 않았다.

헤르시스는 머리가 복잡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 같았다. 죽여도 죽여도 수가 줄어들지 않는 바퀴벌레 같았다.

“아…… 정말 징글징글하다.”

헤르시스는 마른세수하듯 얼굴을 쓸어내리며 의자 목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문득 천장에 걸린 샹들리에의 촛불이 절반밖에 남지 않은 것에 시선이 가 닿았다.

시중인이 와서 갈아 끼운 게 얼마 전인 거 같은데. 벌써 저렇게 타 버렸나?

헤르시스는 그제야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취침 시간이 한참 지나 있었다.

그는 서류를 대강 정리하고서 집무실을 나섰다.

본궁 입구를 벗어나자 근위대원들이 당연한 듯 뒤를 따르려 했다.

헤르시스가 손을 들어 막았다.

“됐어. 나 혼자 가겠다.”

“그럼 등불이라도 밝혀 드리겠습니다.”

근위대장이 말했지만, 그마저도 묵살당했다.

어둠 속이야말로 헤르시스의 진가가 발휘되는 주 무대라는 걸 저들은 아직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이들 모두를 물리고도 헤르시스는 너무나 무탈하게 황후 궁에 도착했지만, 딱히 깨어 있는 리즈를 볼 생각으로 온 것은 아니었다.

그러기엔 시간이 너무 늦었고, 리즈는 보통 열 시 전후로 잠자리에 들었다.

“폐…… 폐…… 폐하!”

시중인들이 기별도 없이 찾아온 황제를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 아리스테 님께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럴 것 없다.”

헤르시스가 만류했다.

“자는 모습만 보고 갈 생각이야.”

‘다른 소득이 있으면 더 좋겠지만…… 보아하니 그건 한 절기 안에 성사되긴 어려울 듯하군.’

그렇게 스킨십에 대해선 일말의 기대도 없이 계단을 오른 헤르시스는 개미 새끼 한 마리 깨우지 않을 정도로 조심스레 문을 열고 침소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

생각지도 못한 광경을 마주하고서 멈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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