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일단 하나부터 낳자
(61/65)
61화 일단 하나부터 낳자
(61/65)
#61화 일단 하나부터 낳자
2023.07.31.
익숙한 목소리에 리즈가 눈을 번쩍 떴다.
헤르시스의 얼굴이 너무 가까웠다.
그의 숨결이 코끝을 간지럽힐 정도였다.
“허억!”
리즈가 몸을 일으키려 배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그전에 헤르시스의 단단한 팔이 리즈의 양옆으로 기둥을 만들었다.
리즈는 순식간에 굵다란 기둥 사이에 갇혀 버렸다.
갑자기 자신의 허벅지 사이에 놓인 그의 한쪽 무릎이 몹시 위험하게 느껴졌다.
‘이거, 잡아먹으라는 거지?’
이글대는 눈빛으로 보아 잡아먹지 못할 것도 없을 것 같았다.
“숨 쉬어.”
헤르시스가 말했다.
그 말에 리즈가 저도 모르게 파아-, 숨을 토해 냈다. 진짜 숨 쉬는 것도 잊고 있었구나 싶었다.
헤르시스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리즈를 풀어 주었다.
“이제 좀 괜찮아?”
“네…… 괜찮아요.”
몸을 일으킨 리즈가 주섬주섬 잠옷을 발목까지 끌어내리며 말했다. 그러고도 안심이 안 되어 이불을 턱밑까지 추켜올렸다.
“저 얼마나 잤어요?”
“한 여덟 시간.”
‘얼마 안 잤네.’
“……하고 이틀.”
“네에?”
리즈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제가 이틀을 잤다고요?”
“사흘이 될 뻔했지.”
세상에. 그렇게나 많이 자다니. 어쩐지 몸이 상쾌하고 가뿐하다 했다.
하지만 리즈를 내려다보는 헤르시스의 얼굴은 그리 상쾌하지 못했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남은 피가 말라 가는데.”
“…….”
리즈는 비로소 그를 자세히 보게 되었다.
여전히 수려한 외모의 그였지만, 머리칼이 살짝 흐트러져 있었고 눈매엔 피로가 감돌았다.
“그대가 잠들어 있던 이틀 하고도 여덟 시간 동안 나는 한숨도 못 잤어.”
“아…….”
기분이 묘했다.
맨날 퍼 주기만 하다가 받는 사람의 심정이 이럴까.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애정 표현이 감동스러우면서도 못내 어색했다.
“……죄송해요.”
달리 무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자 헤르시스가 말했다.
“그대가 죄송할 건 없지. 사죄는 의원이 해야지.”
“……?”
“사람을 사흘이 다 되어 가도록 깨우지 못하다니, 돌팔이나 다름없잖아.”
‘그건 의원 문제가 아닌 거 같은데…….’
“감옥에서 풀어 주라고 명해야겠군.”
‘아니, 그 이틀을 못 참아서 감옥에 가두기까지 했다고?’
리즈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문득 저 성깔머리로 그동안 남의 집 노예 생활을 어떻게 한 건지 궁금해졌다.
그간 용케도 칼부림이 안 났다 싶었다.
“그나저나 여긴 어디예요?”
“황후 궁.”
리즈의 물음에 헤르시스가 대답했다.
“당분간 그대는 이곳에 머무르게 될 거야.”
“폐하께선요?”
“나는 저기.”
그가 커튼으로 가려진 창을 가리켰다.
리즈가 조금 전에 내다본 프레네 본궁을 가린 창이었다.
리즈는 이불 안에서 맞잡은 손을 사정없이 꼬집었다. 좋아하는 내색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였다.
한 처소를 쓰지 않는다. 아직 낯설게 느껴지는 이 얼굴과 한 침대를 쓰지 않는다니……!
“아쉽겠지만 며칠만 기다려 줘. 그대에게 맞춰서 보수를 새롭게 하는 중이라. 보수가 끝나면 이곳은 허물어 버릴 거야. 황제와 황후가 각방을 쓰는 건 말이 안 되지.”
“…….”
‘웬일로 따로 두는가 했네.’
리즈가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갑자기 중요한 일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아직 황후 하겠다고 확실히 말 안 한 거 같은데요?”
“나는 말한 것 같은데?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 순 없다고.”
그는 바위처럼 단단하고 완고했다.
일단 약혼부터 하고 천천히 결혼을 생각해 보자는 제안은 그에게 절대로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제 결정을 물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리즈는 그 문제는 일단 접어 두기로 했다.
“근데 보수는 왜 하는데요?”
“좀 구식이라. 섭정 대공이 쓰던 방이기도 했고.”
“아…….”
‘그자의 흔적을 지우고 싶은 거구나.’
리즈는 이해했다.
그리고 섭정 대공이란 말이 마침 나왔으니 물어보기로 했다.
“그자는 순순히 물러나던가요?”
헤르시스가 황궁에 들어가고 난 이후의 일을 리즈는 전혀 알지 못했다.
기회가 닿았을 때 확실히 알고 넘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생각했던 것보단 순순히 물러나더군.”
헤르시스가 픽 웃으며 말했다.
“하긴 어쩔 수 없었겠지. 정통성에 목숨 거는 원로들이 황실 직계손인 나를 두고 서자 출신의 그를 추대하지 않을 걸 잘 알 테니 말이야.”
“…….”
“그자가 지난 십 년간 아무리 원로들의 신임을 얻었다 한들, 그들 머릿속에 뿌리박힌 고정관념까지 뽑을 수 있는 건 아니거든. 아무튼 그 때문에 날 죽이려고 했는데 죽지 않고 돌아왔으니 일단은 물러날 수밖에.”
‘일단은’이라는 말이 유난히 귓속을 파고들었다.
황제가 되었다고 끝이 아니란 건 리즈 역시 진즉에 알고 있었다.
아니, 사실 ‘루젠시아의 꽃’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몬타네르 대공은 분명 제 지지 세력을 모아 후일을 도모할 것이고, 두 남녀 주인공은 그로 인해 시련을 겪게 된다.
그 시련을 슬기롭게 극복하여 행복한 결말에 도달하는 것이 대강의 후반부 줄거리였다.
그런데…….
‘그 시련이 대체 뭐지? 어떻게 극복하는 거지?’
리즈는 뒤 내용이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몇 번 생각해 내려 시도한 적은 있었지만, 그리 절실하게 파고들진 않았다.
자신이 그 여정의 동반자가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으므로.
또다시 불안감이 리즈를 엄습했다.
누군가 방 한구석에서 날이 벼려진 검을 든 채로 노려보고 서 있는 기분이었다.
운명을 바꾼 대가를 치르라는 듯한 눈빛으로. 하나라도 어긋나면 각오하라는 듯한 눈빛으로.
‘기억해야 해. 어떻게 하면 대공을 저지할 수 있는지.’
그렇게 리즈가 제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고 있을 때였다.
“숙부를 저지할 수 있는 아주 좋은 방법이 있어.”
마치 제 속마음을 꿰뚫기라도 한 듯 절묘한 타이밍에 헤르시스가 말했다.
리즈가 눈을 반짝였다.
“그게 뭔데요?”
“우리가 빨리 아이를 가지는 것.”
“…….”
“탄탄한 후계 구도만큼 공략하기 어려운 것도 없으니까.”
“…….”
“난 많을수록 좋은데, 그럼 그대가 너무 힘들겠지? 일단 하나부터 낳고 보자.”
대체 어떻게 하면 얘기가 그쪽으로 이어질 수 있는 걸까?
리즈는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사이 헤르시스가 은근하게 풀린 눈을 하고선 리즈에게 몸을 숙여 왔다.
“말 나온 김에 지금부터 만들어 볼까?”
“아…… 안 돼요!”
식겁한 리즈가 제 위를 정복하려는 그를 밀어내며 소리쳤다.
“결혼도 하기 전인데 뭘 만들어요? 안 돼요.”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
의외로 순순히 받아들여서 오히려 리즈는 놀랐다. 하지만…….
“만들고 싶대서 곧바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니까. 그러니까 처음엔 아이 생각은 하지 말고 그냥 즐기는 걸로 하지. 그러다 보면 아이는 자연스레 찾아올 거야.”
“…….”
헤르시스는 헤르시스였다.
모든 말이 제게 유리한 논리로 무장되어 있었다.
‘아니, 즐기자고? 그게 아이를 만들자는 것과 뭐가 다른데?’
참으로 억지스럽고 기가 막힌 남자.
제가 억지 부릴 때 케인의 심정도 이랬을까?
리즈는 이 남자를 말로써 설득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아무리 그러셔도 안 돼요. 어떻게…… 어떻게…….”
리즈가 맨살 한 줌이라도 내보이지 않으려는 듯 이불을 눈 밑까지 끌어 올리며 말했다.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람이랑 잠자리를 할 수 있어요?”
그러자 헤르시스가 되레 기막히다는 듯 되물었다.
“만난 지 얼마 안 되다니? 우리 만난 지 십 년인 거 잊었나?”
“케인이랑 십 년 된 거잖아요.”
“내가 케인이야. 이 몸도 케인의 몸이고.”
“그건 아는데…….”
리즈가 고통스러운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마음은 그렇지가 않나 봐요. 아직은 폐하가 낯설어요. 이런 상태로 잠자리를 할 순 없어요.”
“후우.”
헤르시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고뇌가 진하게 농축된 한숨이었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하지.”
잠깐의 생각 끝에 그가 말했다.
“눈 가리고 하자. 몸은 똑같으니까 상관없지?”
너무도 기발한 해결책에 리즈의 입이 떡 벌어졌다.
잠깐 상상해 본 것만으로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폐하. 그건 좀 아닌…….”
“리즈.”
헤르시스가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로 리즈의 말을 잘랐다.
“자기 자신에게 질투한다는 말 들어 본 적 있나?”
“……아뇨.”
“나도 들어 본 적 없어. 그러니까 그만 밀어내.”
“…….”
그가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리즈를 내려다보았다. 눈빛이 그렇게 차가울 수가 없었다.
“이제 케인은 없어. 나 헤르시스 카스트리온이 그대의 남자야. 이 얼굴에 하루빨리 적응해.”
그는 냉랭하게 돌아서서 나가 버렸다.
리즈는 텅 빈 침소를 한동안 멍하니 응시했다.
그녀의 입에서도 역시 고뇌에 찬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저도 그러고 싶은데 잘 안 되는 걸 어떡해요.”
***
자기 자신한테 질투를 하다니.
제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상황에 헤르시스는 몹시 혼란스러웠다.
외골수 기질이 다분한 리즈가 곧바로 자신에게 마음을 열어젖힐 거라는 생각은 그 역시도 하지 않았다.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조금 걸리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각오도 되어 있었다.
하지만, 방금 전 그녀가 보여 준 태도로 보자면 그녀가 필요로 하는 시간은 자신이 어림잡은 시간과 단위 자체가 다른 듯했다.
며칠이 아니라 몇 달, 아니, 몇 년도 더 걸릴 것 같았다.
그걸 대체 어떻게 기다린단 말인가?
처소로 돌아가던 중 한쪽 벽면 전체를 차지한 전신 거울이 돌연 눈에 들어왔다. 헤르시스는 그 앞에 멈춰 서선 거울 속 남자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균형 잡힌 체격에 다소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거울 속 남자 역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일순 얼굴이 바뀌었다. 백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훈훈한 남자가 이쪽을 보며 사람 좋은 웃음을 띠고 있었다.
헤르시스는 제 상상이 빚어낸 환상을 가만히 응시하더니, 그 넉살 좋은 얼굴에 조소를 날려 주었다.
“저 얼굴이 뭐가 좋다고. 원래 얼굴의 반의반도 못 따라오는데.”
그는 거울을 깨뜨려 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뒤돌아섰다.
계단을 오르고 복도를 지나치는 동안 그는 자신이 앞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궁리해 보았다.
몇 년은 너무 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