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헤르시스의 선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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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화 헤르시스의 선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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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화 헤르시스의 선포
2023.07.30.
등 뒤에서 싸늘한 기운을 느낀 릴리아가 겁먹은 얼굴로 비켜섰다.
헤르시스가 리즈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다행이다……. 등줄기에서부터 방사형으로 퍼져 나가는 서늘한 안도감을 느끼며 리즈는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쿵쿵 빠르게 뛰는 헤르시스의 심장 고동이 고막을 울렸다.
“릴리아 베리움, 너를 황족 시해 미수 혐의로 체포한다.”
그의 차갑고 단호한 음성 역시 가슴을 타고 리즈의 귀로 전해졌다.
언제 대기하고 있었는지 모를 근위대원들이 달려와 릴리아를 포박했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니?”
놀란 어머니가 달려오고, 시중인들도 웅성거리며 달려왔다. 그중엔 임신한 미라벨과 그녀의 약혼자 조너선도 있었다.
다들 하나같이 경악한 얼굴이었다.
어머니가 설명을 요구하는 눈으로 헤르시스와 리즈와 릴리아를 번갈아 봤다.
하지만 리즈와 릴리아는 그녀의 요구에 친절히 응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나머지 한 사람은 그럴 필요가 없는 입장이었다.
굳이 제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되는 위치에 올라 있었으므로.
헤르시스가 근위대장에게 턱을 까딱해 보였다. 그러자 근위대장이 일목요연하게 사건을 축약했다.
“릴리아 양이 예비 황후 폐하를 계단에서 밀어뜨리려 했습니다.”
“아니에요!”
릴리아가 소리쳤다.
“밀어뜨리려 한 게 아니라…….”
“구해 주지 않은 것뿐이지. 충분히 구해 줄 수 있는 상황임에도.”
헤르시스가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베리움 부인은 이제 모든 상황을 파악했다. 그리고 이 일을 크게 만들어 봤자 제게 좋을 일이 하등 없다는 판단 역시 재빨리 섰다.
부인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저…… 뭔가 오해가 있었던 거 같은데요, 자매끼리 살짝 다툼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런 다툼은 어딜 가나 흔하잖아요? 그리고 릴리아 쟤는 제가 잘 아는데 그럴 애가 아니에요.”
“과연 그럴까?”
헤르시스가 경멸하는 투로 이어 말했다.
“과연 그대가 잘 알고 있느냐는 걸 묻는 거야.”
“그, 그럼요. 저만큼 자식들을 잘 아는 부모는 또 없습니다.”
“…….”
헤르시스가 잠시 간격을 두고 물었다.
“그럼 어디 한번 말해 보겠어? 베리움 후작부인? 리즈의 생일은 언제지?”
베리움 부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리즈가 좋아하는 음식은? 좋아하는 음악은? 이마에 난 상처는 언제 어떻게 생긴 거지? 먹으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음식은?”
부인은 몇 번인가 입술을 달싹였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제 기억을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여 차별하고, 체면치레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여 관심에서 제외하고, 막말하고. 자식이 없어지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는 부모가 그런 것들을 알 리가 없지.”
“그…… 그건…… 폐하.”
“오늘부터 아리스테 베리움에게 친정은 없다.”
모두를 경악시킨 말이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베리움 부인이 제일 경악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절대로.
황실의 외척이 된다고 사교계에 공표하다시피 해 놓았는데…….
“폐하, 이…… 이건 아니 될 말씀입니다.”
어머니가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선 부들대는 손가락으로 릴리아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아이가 문제라면 제가 저 아이를 내치겠습니다. 사실 제 딸도 아니고, 지금이라도 호적에서 파 버리면 될 일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의 장모로 있게 해 주셔요…….’라고 말하려 했지만 헤르시스가 끊어 버렸다.
“리즈에게 친정은.”
헤르시스가 층계 제일 아랫단에 황망한 얼굴로 서 있는 인물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기 있는 모르센 남작부인뿐이다.”
모두의 시선이 일시에 그가 가리킨 방향으로 향했다.
거기에 미라벨이 있었다. 미라벨이 그가 말한 모르센 남작부인이었다.
미라벨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그러곤 폐하께서 가리키신 게 쇤네가 맞느냐는 의미로 자신을 손가락질해 보였다. 헤르시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커다란 입을 두 손으로 가렸다.
조너선 역시 갑작스러운 신분 상승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한 기색이었다.
“오늘부터 베리움 후작령은 황실에서 관리할 것이다. 후작위는 그대로 두되, 베리움 부인 사후에 세습되진 않을 것이다. 또한 황실에 외척은 없다. 혹여 황실 외척 운운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려온다면.”
헤르시스가 날카롭게 벼려진 눈을 베리움 후작부인에게 내리꽂으며 충격적인 선언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땐 황실 모독죄로 수감될 각오를 하라.”
부인이 망연자실한 얼굴로 층계참에 풀썩 주저앉았다.
헤르시스는 근위대장에게 릴리아의 수감을 지시했다. 그러곤 리즈를 번쩍 안아 들고선 계단을 내려갔다.
넋이 나간 얼굴로 근위대원의 손에 이끌려 뒤따르는 릴리아를 헤르시스의 어깨너머로 보며 리즈는 오묘한 기분을 느꼈다.
참으로 얄궂은 운명이었다.
찬란한 운명을 맞이해야 마땅할 여주인공이 죄인이 되어 버리고, 죄인의 운명으로 죽음을 맞았어야 할 자신이 그녀의 자리를 차지했다.
하지만 그 역전된 운명에서 리즈는 아무런 통쾌함도 느끼지 못했다.
각 잡힌 옷깃처럼 반듯하던 릴리아의 흐트러진 모습을 보고 있자니 되레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모함당하던 순간에 느낀 괘씸함, 끝내 자신을 해치려 하던 순간에 다짐했던 복수심도 이젠 힘을 잃었다.
그토록 총명하던 녹안이 흐리멍덩해 진 것을 더 이상 볼 수 없어 리즈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이제 헤르시스가 보이기 시작했다.
고집스럽게 굳힌 입매, 차가운 눈빛. 한 치의 반발도 용납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고압적인 태도.
그 모든 냉랭한 태도가 자신을 향해 있지 않다는 것이 묘하게 그녀를 안심시켰다. 더불어,
그 덕에 죽지 않고 질긴 생을 이어갈 수 있다는 생각 또한.
긴장이 풀어진 리즈는 헤르시스의 품에서 까무룩 정신을 잃었고,
헤르시스는 늘어지는 몸을 더욱더 단단하게 품에 감싸 안았다.
***
“여기가 어디지?”
침대 캐노피가 낯설었다.
그것이 낯설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도 약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났기 때문이다.
리즈는 누운 상태에서 고개만 한옆으로 돌려보았다.
두꺼운 암막 커튼이 창문을 가리고 있었지만, 그 아래 바닥에 스며드는 빛은 가리지 못했다. 빛이 새하얗게 부서지는 걸 보니 아침이거나, 늦어도 정오쯤이리라.
이번엔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러자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시야에 채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먼 곳에 벽이 있었다.
가구들은 고풍스러운 미가 있었다.
광택제를 바르지 않아도 절로 윤기가 흐르는 저 장식장은 마호가니 원목으로 만든 게 분명했다.
벽면의 콘솔도 마찬가지고, 침대에서 가까운 협탁도, 안락의자도 죄다 마호가니였다.
귀족의 응접실에나 겨우 한두 점 놓일까 말까 싶은 고급 가구가 이 방엔 발에 챌 듯 많았다.
그리고 이 방 밖엔 더 많을 것이었다.
그렇다는 건 역시 이곳이…….
‘황궁이구나.’
리즈는 매트리스를 짚고 상체를 일으켰다.
조금 더 자세히 보고 싶어서였다.
그러자 누워 있을 때보다 한결 더 분명하게 보였고, 한층 더 확실하게 느꼈다.
‘무서워.’
절제된 화려함, 세련된 고풍스러움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곳이었지만 리즈에게 가장 먼저 와닿은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묘하게 강압적인 공간이었다.
아늑함이라곤 없었다. 하지만, 그건 이곳이 황궁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봐서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는 문제였다.
‘좀 더 둘러봐야겠어.’
막 다리를 침대 밖으로 내렸을 때였다.
탁-, 탁-.
누군가 이곳으로 오는 듯했다.
리즈는 얼른 다시 누워 자는 척했다.
딸깍-.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혹시 헤르시스?’
갑자기 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그를 마주할 때면 늘 이런 긴장감이 엄습해 왔다.
“아직 주무시네?”
다행히 헤르시스는 아니었다.
귓가에 들려온 목소리는 여인의 것이었다.
곧이어 이마에 닿는 여인의 조심스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열은 다 떨어지신 것 같은데.”
그제야 리즈도 알았다.
‘내가 열이 났었구나.’
하긴, 열이 끓어도 이상할 게 없었지.
객지 생활 내내 불안감에 떨었고, 두 번이나 낙상의 위험에 처했다.
그 긴장감이 일시에 해제되었으니 제 몸의 세포들이 마음 놓고 불꽃 축제를 벌이는 것도 당연했다.
여인이 이불을 가슴 위까지 끌어 올려 주었다. 그러곤 다른 이상은 없나 살피려는 듯 잠시 머물더니 곧 방에서 나갔다.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자 리즈는 슬며시 눈을 뜨고 일어났다.
방금 잠든 것을 확인하고 나갔으니 당분간 누가 들어올 것 같지는 않았다.
리즈는 침대 바깥으로 다리를 내밀어 땅에 디뎠다.
바닥에 털 실내화가 놓여 있었다. 발을 조심스레 밀어 넣으니 복슬복슬한 털이 기분 좋게 맨살을 감쌌다.
리즈는 방 안을 한 바퀴 걸어 보았다.
모든 가구엔 먼지 한 톨 올려져 있지 않았다. 매일, 매시간 닦아 내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러자 위압감과 더불어 숨까지 막히려 했다. 여기서 계속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막막하게 느껴졌다. 도망가고 싶었다.
‘바깥 풍경을 보면 좀 나을지도 몰라.’
리즈는 몸을 돌려 창가로 걸어갔다.
커튼을 살짝 열어젖히고 창밖을 바라보는데, ‘아!’ 소리가 절로 나왔다.
창밖으로 보이는 웅장한 건물이 낯이 익었다.
금빛 돔형 지붕에 사면에 첨탑 하나씩을 세운 위용 넘치는 곳. 케인…… 아니, 헤르시스와 밤에 저택을 몰래 빠져나와 보았던 바로 그 건물.
루젠시아 황실의 상징인 프레네 본궁이었다.
그날 밤, 그토록 아련한 눈으로 바라보던 그곳의 권좌에 앉아 대신들을 호령할 헤르시스의 모습을 떠올리니 리즈는 왠지 뿌듯해졌다.
그러자 조금 전의 숨 막히는 부담감도 잊고서 자연스레 미소 지을 수 있었다.
따각-, 따각-.
또다시 대리석 바닥을 울리는 구둣발 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전의 그 여인일까?
리즈는 다시금 후다닥 침대에 몸을 던졌다.
그러느라 잠옷이 말려 올라가 허벅다리를 훤하게 드러냈지만, 등 밑에 깔린 이불을 빼내어 앞으로 두를 여유가 없었다.
‘아…… 몰라. 자다 뒤척인 줄 알고 알아서 덮어 주겠지.’
문이 열리고 문이 닫혔다.
방으로 들어온 시중인의 발소리가 침대 옆에서 멈췄다.
한데 이불을 덮어 줄 생각은 않고 빤히 바라보고만 있는 게 눈꺼풀 너머로 느껴졌다.
‘뭐야? 잠옷 말려 올라간 여자 처음 보나?’
다음 순간 리즈는 제게 몸을 낮춰 나지막이 소곤거리는 목소리를 들었다.
“이거, 잡아먹으라는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