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릴리아의 본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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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화 릴리아의 본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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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화 릴리아의 본색
2023.07.29.
리즈는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탄식했다.
“세상에…….”
그제야 미라벨의 얼굴에 서려 있던 전에 없던 묘한 느낌을 리즈는 알아차렸다.
그리 오랜만도 아닌데 왜 이렇게 달라졌지 싶었다. 그게…… 그래서였구나.
배 속에 생명을 담고 있어서였어.
“잘됐어, 미라벨. 정말 잘됐어.”
리즈가 미라벨의 크고 거칠거칠한 손을 두 손으로 꼭 붙잡으며 제 일처럼 기뻐했다.
미라벨이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 덕분이에요.”
“내 덕분?”
“아가씨가…… 그 여관 가르쳐 주셨잖아요? 시설 좋으니까 꼭 가 보라고.”
“아…….”
그런 적이 있었지.
“근데 안 간 거 아니었어? 식당에서 밥만 먹고 온 거 아니었어?”
“그럴 리가요.”
미라벨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저를 너무 순진하게 보시는 거 아니에요? 저 서른 살이에요.”
“아…….”
‘그렇구나. 그럼 그때 식당에서 본 것은 이미 일을 치르고 난 뒤에…….’
리즈는 거기까지만 생각하기로 했다. 생명이 찾아왔다는 게 중요하지, 언제 어떻게 찾아왔는지가 뭐 중요할까.
“내가 사람을 잘못 봤네. 인정해.”
“하지만 전 사람을 제대로 봤죠.”
이번엔 반대로 미라벨이 리즈의 두 손을 꼬옥 붙잡으며 말했다.
“전 아가씨가 이렇게 잘되실 줄 알았어요. 당연하죠. 제 아가씬데요.”
그녀는 리즈가 황후가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리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전히 마음을 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아하니 상황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결정 난 것 같았다.
올 때 보니 이 저택 주위로 근위병이 몇 미터에 한 사람씩 배치되어 사방을 둘러싸고 있었다. 새처럼 날아가지 않는 이상 도주는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그대로 황궁행이다.
“그나저나 케인 그 녀석이 잘 떨어져 나가 주었어요.”
느닷없이 케인의 이름이 거론되자 리즈는 흠칫 놀랐다.
“그 녀석이 계속 아가씨 옆에 눌어붙어 있었으면 이런 기회가 있었겠어요? 사실 이제 와서 말이지, 그 녀석이 제 발로 나가지 않았으면 제가 쫓아내려 했어요.”
“……그래?”
리즈의 얼굴에 떠오른 애매한 표정을 미라벨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아무튼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그 빌어먹을 녀석이 아가씨를 쥐고 흔든 걸 생각하면…….”
비…… 빌어먹을 녀석이라…….
이 자리에 황제가 없는 것이 리즈는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황제 폐하는 정말 좋은 분 같았어요. 아가씨를 진심으로 사랑하시는 게 느껴졌어요.”
“……사랑?”
적응되지 않는 단어였다.
하긴, 적응되지 않는 것이 비단 그뿐일까.
십 년을 케인과 지냈다. 십 년을 그에게 미쳐 있었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그도 자신을 사랑한단다.
이런 해피 엔딩이 또 있을까 싶지만, 문제는 그가 더 이상 케인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다는 데 있었다.
자신의 남편이 될 사람은 황제 헤르시스였다. 자신이 미쳐 있던 노예 케인이 아니라.
그 속에 든 영혼이 같다는 걸 머리로야 알고도 남았지만, 마음은 그러지 못했다.
리즈는 아직 그가 낯설었다.
케인에게 쏟았던 애정을 헤르시스에게 고스란히 옮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혹여 그럴 수 있다 하더라도 그리 빠른 시일 내는 아닐 듯싶었다.
“참, 내 정신 좀 봐. 아가씨가 좋아하는 마들렌 좀 구웠는데 좀 가져올게요.”
미라벨의 말이 상념을 깨뜨렸다.
“아냐, 그러지 마.”
리즈가 만류했다.
밖에서 케인…… 아니, 헤르시스도 기다리고 있었고, 무엇보다 홑몸이 아닌 사람을 바삐 움직이게 하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보아하니 아직 초기인 거 같은데.
“그럼 포장해 놓을게요. 오 분만 있다가 내려오세요.”
“…….”
마지막으로 뭐든 해 주고 싶어 하는 미라벨의 마음을 알기에 그것까진 만류하지 못했다.
미라벨이 밖으로 나가고, 리즈는 잠시 방 안을 둘러보았다.
끝이란 걸 알고 보아서일까?
늘 쓰던 침대며, 서랍장이며, 거기 있는 줄 미처 인식도 하지 못하던 소품까지도 새삼 새롭게 보였다.
좀처럼 믿어지지가 않았다.
이 집을 떠나 처음 가출 길에 올랐을 때보다, 지금이 더더욱 영원한 작별인 것처럼 아련하게 느껴졌다.
그래. 분명히 영원한 작별일 터였다.
웬만해선 돌아오지 않을 테니까.
리즈는 조심스레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문고리를 돌리기 전에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방 안의 광경을 눈에 담았다.
달리 기록할 수 있는 수단이 없으니 머릿속에 담아 두는 수밖에 없었다.
한 폭의 캔버스화처럼.
“잘 있어라. 내 이십 년의 보금자리야.”
리즈는 아무도 듣지 않는 빈방에 대고 나지막이 작별 인사를 건넨 뒤 문을 나섰다. 그러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복도를 걸어갔다.
***
2층에서 1층으로 내려가는 층계 입구에 막 도착했을 때 리즈는 릴리아와 마주쳤다.
아니, 마주친 게 아니라 만난 거라 보는 게 맞을 듯하다.
릴리아가 그곳 층계 난간에 기대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으니까.
“축하해요. 언니.”
릴리아가 평소처럼 환하게 미소 지어 보이며 인사를 건넸다.
그 미소가 리즈의 눈에 묘하게 작위적으로 보였다.
게다가 안 본 사이에 릴리아는 몸도 얼굴도 부쩍 여윈 듯 보였다.
원래도 가녀린 몸이 이젠 나뭇가지처럼 앙상하게 보였고, 핼쑥해진 뺨은 오히려 그녀 쪽을 언니로 보이게 했다.
그럼에도 눈은 지나치게 빛이 났는데, 마른 얼굴에 눈만 보석처럼 형형하니 어쩐지 유령처럼 보였다.
집을 떠나 있었던 건 자신인데 어째서 얘가 더 몰골이 안 되어 보일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의아해하는 리즈에게 릴리아가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언니가 잘되어서 기뻐요.”
“고마워.”
딱히 진심처럼 느껴지지 않는 인사였다. 집을 나가기 전에 보았던, 어머니와 붙어먹고 자신을 깎아내리려 애쓰던 모습이 그렇게 보이게끔 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것을 일일이 따지고 싶지 않았다.
“너도 잘되길 바라. 너는 나보다 훨씬 더 영리하고 재주 많은 아이니까 분명 잘될 거야.”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릴리아가 눈을 더욱더 반짝이며 물었다.
“그럼. 늘, 언제나 그렇게 생각했어.”
리즈가 말했다. 좋게 헤어지고 싶은 마음에서 한 말이었지만 진심이기도 했다.
이중적인 모습을 제외하면 릴리아는 나무랄 데 없는 여인이었다.
상냥하고, 똑똑하고, 순발력이 좋았다. 무엇보다 사교 처세가 월등했다.
원작대로 그녀가 황후가 되었다면 분명 헤르시스가 초반 입지를 다지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니 리즈는 다시금 가슴에 납덩이를 얹어 놓은 듯 무거운 기분을 느꼈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나같이 말주변 없는 여자가 황후가 될 수 있을까?’
리즈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생각을 쫓아 버렸다.
이제 와서 그런 생각을 해서 뭘 하겠는가.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는데.
“그럼 나 갈게.”
리즈는 릴리아에게 담담히 작별 인사를 건네고 돌아섰다.
제가 계단 끝에 서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지만, 이미 한 발을 크게 내디딘 뒤였다.
무게 중심이 기저면을 벗어나고 있었다.
“으앗!”
“언니!”
뭐라도 붙들기 위해 내뻗은 리즈의 손을 릴리아가 순발력 좋게 붙들었다.
리즈의 몸이 뒤로 홱 돌았다. 다행히 계단에서 구르는 참사는 면했다.
하지만 릴리아의 손을 붙들고 계단 끄트머리에 서 있는 몸은 여전히 기울어져 있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곧추세우기가 힘들었다.
“릴리아, 나 좀 당겨 줄래? 조금만 당겨 주면 될 거 같아.”
하지만 릴리아는 당겨 주지 않았다.
이상함을 느낀 리즈가 릴리아를 쳐다보았다.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그녀에게서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느껴졌다.
불안감이 몰려왔다.
이 불안감은 릴리아의 입가에 슬그머니 미소가 떠올랐을 때 더욱 고조되었다.
그 의미심장한 미소로 말하자면, 한 사람의 생살여탈권을 손에 넣은 데서 나오는 여유가 묻어난 미소였다.
이걸 어떻게 요리할까…… 행복한 고민에 휩싸인 사람의 얼굴이었다…….
‘아냐. 그럴 리가 없어.’
리즈는 부정했다.
제 짐작이 맞는다는 걸 인정하는 게 두려웠다. 계단은 너무도 가파르고,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릴리아, 날 좀…….”
하지만 리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릴리아가 잡힌 손에서 손가락 하나를 꺼냈다.
“어째서 언니인 거지? 내가 아니라?”
“……뭐?”
되묻는 순간 또 하나의 손가락도 빠져나왔다.
“왜 언니냐고. 이건 너무 불공평해.”
“그게 무슨 소리야?”
도무지 알 수 없는 말에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남은 손가락이라도 안간힘을 다해 쥐고 있고자 애쓰는 언니를 릴리아가 감상하듯 바라보며 말했다.
“언니는 나한테서 다 빼앗아 갔어.”
“…….”
“케인도, 그 남자도.”
“그 남자?”
리즈가 물었다. 정말 몰라서 물은 것이었다.
“황제 폐하 말이야.”
릴리아가 아련한 눈빛으로 말했다.
“처음으로 가슴이 설렌 두 남자였는데, 어째서 두 남자 모두 언니인 거지? 둘 중 하나는 내 거여야 되는 거 아냐?”
리즈는 잠시 멍한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이내 피식-,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한순간에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그런 거구나. 이제 알겠어.”
다급한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리즈가 키득거렸다.
릴리아의 얼굴이 되레 의아해졌다.
“뭘 알겠다는 거야?”
“어째서 네가 주인공이 아닌지 알겠다는 말이야.”
“…….”
“주인공은 두 남자에게 동시에 가슴이 설레지 않거든. 고로 넌, 둘 중 누구와도 사랑할 자격이 없어.”
릴리아의 상상력은 보통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녀로선 주인공이니 뭐니 하는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순 없었다. 하지만,
제 언니의 말이 저를 자극하는 것임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 상황에서도 잘도 그런 소리가 나오네.”
릴리아가 손가락 두 개를 동시에 빼내기 위해 힘을 주었다.
“별로 두렵지도 않나 봐?”
‘아니, 두려워. 그러니 장난 그만 쳐.’
하지만 리즈는 그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이런 못돼 먹은 아이에게 굴복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아니, 아니다.
‘자존심이 무슨 상관이야? 이제 겨우 소망을 이룰 수 있게 되었는데. 원하던 사람과 가정을 이루고 살 수 있게 되었는데.’
더 중요한 것을 뒤늦게 깨달은 리즈가 다급한 얼굴이 되었다.
제가 말실수했다고, 그러니까 우리 이러지 말자고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늦었어.”
“…….”
“목이나 부러졌으면 좋겠네.”
릴리아의 남은 두 손가락이 리즈의 손에서 완전히 빠져나왔다.
탄성을 잃고 끊어진 고무줄처럼, 리즈는 일순 자유로워진 몸을 느끼곤 질끈 눈을 감았다.
곧이어 자신을 끌어당길 무시무시한 중력의 힘을 각오했다.
탁-.
그러나 갑자기 커다랗고 묵직한 손이 리즈를 붙들었다.
릴리아의 연약한 손아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단단하고 힘 있는 손이었다.
리즈는 슬며시 눈을 떴다.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헤르시스.
그가 자신을 붙잡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