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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화 졸지에 예비 황후 (58/65)


#58화 졸지에 예비 황후
2023.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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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의 집 앞은 장관이 따로 없었다.

마을 사람들이 죄다 몰려온 듯 북적였고, 헌병들은 입구에서부터 마차에 이르기까지 마주 보고 늘어서선 머리 위로 검을 교차하고 있었다. 바닥에는 붉은 융단이 길게 깔려 있었다.

“예비 황후를 환영하는 의식이야. 마음에 들어?”

헤르시스가 눈매를 예쁘게 휘며 말했다. 하지만 리즈는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환영 의식인 줄을 모르겠고, 도주로 차단처럼은 보이네.’

빽빽하게 늘어선 이들 사이로 도망칠 틈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리즈는 체념했다.

‘일단은…… 그래. 일단은 따르자. 그러고 나서 생각하자.’

헤르시스가 리즈의 팔을 당겨 자신의 팔에 끼웠다. 그러곤 버진 로드를 행진할 때처럼 느릿하게 융단을 밟아 나갔다.

그들의 뒤편으로 검이 하나둘씩 찰캉 소리를 내며 내려와 아래쪽에서 X자를 만들었다.

그 의미가 ‘후진 불가’처럼 느껴져서 리즈는 또 한 번 간담이 서늘해졌다.

이제 진짜로 마차에 타는 수밖에 없었다.

마차 앞에 도착하자 헤르시스가 리즈에게서 팔을 빼냈다. 리즈는 그가 이제 마차에 쉽게 올라타도록 손을 붙잡아 주려나 보다 싶었다. 그런데,

“폐…… 폐하…….”

그는 리즈를 아예 번쩍 들어 마차에 올려 주었다. 승강단을 밟을 필요가 전혀 없었다.

여기저기서 감탄 섞인 신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리즈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리즈는 헤르시스가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질책했다.

“사람들 다 보는 데서 꼭 이러셔야 했어요?”

“사람들 눈이 뭐가 중요하지? 그대, 원래 그런 거 신경 안 쓰지 않았나?”

“…….”

“뭐, 황후라는 자리가 부담스러운가 본데, 그러지 않아도 돼. 그댄 그대로 있을 때가 제일 자연스럽고 예쁘니까.”

리즈는 이쯤에서 확실히 해 둬야겠다고 생각했다.

“저 황후 하겠다고 말한 적 없는데요. 하고 싶지도 않고요.”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 순 없어.”

“…….”

리즈는 헤르시스의 억지 앞에서 할 말을 잃었다.

‘아니, 황후라는 자리가 언제부터 내 의무가 되었지?’

“폐하, 황궁으로 곧장 모시면 되겠습니까?”

뚫린 앞창을 통해 마부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그래.”

“전 베리움 후작저로 갈게요.”

리즈가 말했다. 그러자 헤르시스가 단호한 목소리로 거부했다.

“안 돼.”

“…….”

“그댄 그 집에 돌아가고 싶나?”

“꼭 그런 건 아니지만.”

황궁으로 들어가는 것보단 나아서 그러지.

“갑작스러워서요. 생각할 것도 좀 있고.”

“황궁에 가서 해. 시간은 얼마든지 줄 테니까.”

안 본 사이에 그는 한결 더 고집스러워졌다.

‘케인일 땐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리즈는 갑자기 케인이 그리워졌다.

이 남자의 얼굴을 보고 있는데 전혀 케인이 떠오르지 않았다. 얼굴이며 성격까지 너무 홱 바뀌어 버려서 이젠 같은 사람이었다는 것도 믿어지지가 않았다.

“뭘 생각하는 거지?”

리즈가 심란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헤르시스가 물었다.

“케인이요.”

리즈는 솔직하게 말했다.

“이 광경을 보고 있자니 폐하와 케인이 같은 사람이었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아요.”

“그래?”

“…….”

“그럼 믿게 해 주지.”

“뭘 어떻게…….”

말이 끝나기도 전에 헤르시스가 셔츠 앞섶을 부욱-, 찢었다. 눈발처럼 날아가는 단추 사이로 그의 완만한 가슴 능선과 또…… 정점과…….

“이거 보이나?”

헤르시스가 쇄골 끝에서 손가락 두 마디 아래를 가리켰다.

그곳에 깊게 팼다 나은 흔적이 있었다. 리즈가 어린 시절 실수로 박아 넣은 미늘 촉 화살이 남긴 흉터였다.

제 과오가 뚜렷한 증거로 남아 있는 것을 보자 겨우 돌아왔던 리즈의 혈색이 다시금 창백해졌다.

“보, 보여요. 알겠으니까 이제 그만 단추 잠그세요.”

하지만 잠글 단추가 없어서인지 그가 벌어진 앞섶 그대로 리즈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생각해 보니 이건 불공평하군. 그댄 내게 자신의 흔적을 남겼는데, 난 못 남겼잖아?”

“그…… 그래서요?”

리즈가 벽에 몸을 바싹 물리며 물었다.

“같은 걸 남겨 줄까 해서.”

“…….”

“같은 곳에.”

‘미, 미쳤어.’

리즈가 덜덜 떨며 앞섶을 부여잡았다. 그러자 그가 야릇한 눈매를 지우곤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말고.”

헤르시스가 제자리로 돌아가 등받이에 몸을 기대자 리즈도 안도의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어쩌다 이렇게 진득하게 얽혀 버렸을까?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마차는 수도 중심부로 힘차게 달려갔다.

바스락 자갈 짓이겨지는 소리를 들으며 리즈는 돌연 초조해졌다.

이대로 입궁하면 다신 밖으로 나오지 못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후작저 사람들과 영원히 작별하는 건 하나도 아쉽지 않았다. 하지만 미라벨은…… 최소한 미라벨한테 만이라도 리즈는 인사를 하고 싶었다.

“폐하, 저 미라벨한테 만이라도 인사하고 가게 해 주세요.”

“…….”

“폐하는 아시잖아요. 미라벨이 제게 얼마나 각별했는지.”

헤르시스의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다.

그녀 말대로 미라벨은 리즈에게 있어서 언니, 혹은 어머니 같은 존재였다.

그 끈끈한 사이를 십 년간 지켜봐 온 헤르시스는 차마 그 청까진 거절하지 못했다.

“좋아.”

헤르시스가 승낙했다.

“정말요?”

리즈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대신.”

헤르시스가 제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뽀뽀해 주면.”

“…….”

리즈의 얼굴에 웃음이 사라졌다. 그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헤르시스가 눈매를 가늘게 떴다.

“그대가 자주 내게 시키던 건데 기억 안 나나?”

“하아…….”

리즈의 입에서 탄식이 절로 흘러나왔다.

이렇게 고귀한 신분이 되리란 걸 몰랐을 때 저지른 만행은 언제까지 자신을 따라다닐 건가.

보아하니 그는 물러서지 않을 듯 했다.

리즈는 결심했다. 후딱 해치우기로.

“알았어요. 해 드릴게요.”

리즈는 비장한 얼굴로 헤르시스를 마주 보았다. 그러곤 눈을 질끈 감고 그 입에 입술을 쪽 맞추곤 얼른 뒤로 물러났다.

헤르시스의 손이 어정쩡하게 공중에 있는 걸 보니 그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되게 빠르네.’

헤르시스가 입매를 삐죽이며 마부에게 명했다.

“베리움 후작저로.”

“예, 폐하.”

마차는 어차피 수도로 가던 길이라 크게 방향을 틀진 않았다.

황실 마차는 합승 마차와 급이 달랐다. 세 시간 내내 멀미로 기진맥진했던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리즈는 멀쩡했다.

승차감 좋은 마차는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진작 이런 마차를 탔으면 하룻밤 묵어가지 않고 곧바로 수도를 벗어날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생각을 해 봤자 무슨 소용인가.

리즈는 이것도 운명이려니 생각하기로 했다. 운명…….

‘내 운명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리즈는 새삼 제 앞날이 막막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릴리아의 몫이었던 황후 자리가 자신에게 오고 있다는 것만은 알 것 같았다. 그러니 릴리아의 의무도 자신이 짊어져야 할지 모른다.

‘원작 속 릴리아는 뭘 했더라? 앞으로 어떤 전개가 펼쳐지더라?’

끝이야 분명 해피 엔딩일 테지만,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이 좀처럼 기억나지 않았다.

어떻게든 되겠지…… 라고 안일하게 생각하기에 황후라는 자리는 너무 막중했다.

가슴에 돌덩이를 얹어 놓은 듯 묵직한 기분이 든 리즈는 머리도 환기시킬 겸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하지만 평화로운 청보리밭의 연둣빛 파도도 리즈의 마음에 스며든 막연한 불안감을 떨쳐 주지는 못했다.

***

“아가씨!”

리즈가 입구에 들어서자 미라벨이 울먹이는 얼굴로 달려왔다.

한차례 정답게 포옹을 나눈 뒤 미라벨이 말했다.

“정말 잘되었어요. 우리 아가씨가 황후라니. 어떻게 이런 일이…….”

“황후…….”

될지 안 될지 아직 안 정했다…… 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미라벨이 눈물까지 흘리며 좋아해서.

좋아하는 사람은 그녀 말고도 또 있었다.

“리즈야!”

어머니가 감격한 얼굴로 리즈를 반겼다.

“그래. 난 네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이렇게 될 줄 알았어. 당연하지. 내 딸인데.”

그녀의 눈에도 눈물이 맺혀 있었지만, 미라벨의 그것과는 의미가 상당히 달랐다.

미라벨이야 순수하게 리즈의 출세를 기뻐하는 데서 나온 것이었으나, 어머니는…… 그저 자신의 신분 상승이 기쁠 뿐이었다. 황실 외척으로의 신분 상승.

“자, 자.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우리 같이 안으로 들어가자꾸나. 안으로 들어가서 그간의 이야기를…….”

“어머니.”

리즈가 차갑게 그녀의 말을 잘랐다.

“죄송하지만 지금은 미라벨하고 더 얘기하고 싶은데요.”

“아…… 참, 그렇지? 그럼 얘기 다 끝나면…….”

“얘기 다 끝나면 저 돌아가야 해서요. 오랜 못 있어요.”

딸의 차가운 태도에 예전 같으면 한마디 던지고도 남았을 부인이지만, 이젠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자신의 출세를 거머쥐고 있는 보석이니까.

“그래, 알았다. 뭐 오늘만 날이니? 내가 황궁으로 자주자주 찾아가마.”

너무도 어머니다운 반응에 리즈는 웃음이 나오려 했다.

대공과의 파혼 뒤에 제게 쏟아 낸 막말은 마치 기억도 못 하는 양 구시는 것을 보니 속이 좀 메스껍기도 했다.

이로써 새삼 확인되었다.

어머니는 더 이상 자신의 가족이 아니다.

장장 닷새간 실종된 딸이 돌아왔는데 그간의 안부를 전혀 궁금해하지도 않는 사람이 진정한 가족일 리가 없었다.

리즈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미라벨의 팔을 끌었다.

자신의 처소였던 곳은 여전히 먼지 한 톨 없이 깔끔하게 잘 정돈되어 있었다. 창가에 놓아둔 화분도 시들지 않고 싱싱하게 자라고 있었다. 그렇게 해 놓은 사람은 분명 미라벨이리라.

“말도 없이 사라져서 걱정 많이 했지?”

“걱정했냐고요? 식사도 못 하고 잠도 못 잘 정도로 안절부절못했죠. 하지만 그분만큼은 아니었어요.”

“그분?”

“황제 폐하요.”

미라벨이 아직도 눈에 선한 듯 그간의 일들을 하나씩 차근차근히 말해 주었다.

자신을 따로 불러 그간 리즈의 주변에 일어난 일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말하게 하던 순간, 그리고 낱낱이 고해바친 마님의 폭언을 말없이 듣던 순간에 그의 눈빛과 목소리가 얼마나 참담한 빛을 띠고 있었는지 전해 들으며 리즈는 마음이 술렁였다.

그가 그렇게나 자신을 생각하고 있었다고, 항상 잊지 않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묘한 감동이 가슴속을 간질였다.

“아가씨가 황후가 되다니…….”

미라벨이 앞치마 끝으로 눈시울을 훔치며 또다시 그 말을 꺼냈다.

“저기 미라벨, 사실은 나…….”

이번에야말로 아직 확정된 거 아니라는 말을 하려고 했지만, 또 실패하고 말았다.

“아가씨가 황궁에 가시는 길에 여기 들르지 않으면 어쩌나 했어요.”
“그럴 리가 있겠어? 여기 네가 있는데.”

“고마워요. 아가씨. 이 미천한 것을 돌아봐 주셔서.”

리즈는 미라벨의 거친 손을 두 손으로 꼭 쥐었다. 그러고선 이곳으로 오는 동안 결심했던 말을 꺼냈다.

“미라벨, 혹시 나와 함께 가지 않을래?”

리즈는 미라벨을 황궁에 데려가고 싶었다. 미라벨도 당연히 그걸 원할 거라고 생각했다.

“죄송하지만 아가씨. 전 그럴 수 없을 것 같아요.”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리즈는 어리둥절해졌다.

“아니, 어째서?”

그러자 미라벨이 잡힌 손의 반대쪽 손을 들어 리즈에게 보여 주었다. 금테를 두른 은반지가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져 있었다.

“저…… 조너선한테 청혼받았어요. 둘이서 시골에 내려가서 농사지으며 살기로 했어요.”

“아…… 그렇구나.”

리즈는 간단히 축하의 말을 건넸다. 하지만 제대로 된 축하의 말은 잠시 뒤로 미루기로 했다.

“하지만 미라벨, 황궁에 가면 보수도 더 받을 수 있고 좋을 텐데. 내가 조너선도 황실 마부로 있을 수 있도록 해 볼게.”

“아가씨, 저도 그러고 싶지만요. 이젠 아가씨를 제 몸보다 더 소중하게 아껴 드릴 자신이 없어요.”

미라벨이 제 아랫배를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제 몸속에 제 손길을 누구보다 필요로 하는 아기가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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