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왜 절 찾아왔어요?
(57/65)
57화 왜 절 찾아왔어요?
(57/65)
#57화 왜 절 찾아왔어요?
2023.07.27.
리즈의 눈이 황망한 빛을 띠고 있었다.
제가 보고 있는 광경을 믿을 수 없어서였다.
혹시 꿈일지도 몰랐다. 제가 어제처럼 또 명상 중에 잠들어 버렸을지도 모르니.
리즈는 눈앞의 인물이 제 환상이 빚어낸 결과물임을 확인하고 싶었다.
“전하…….”
명상실을 조용히 울리는 리즈의 목소리에 헤르시스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래, 나야. 리즈.”
익숙한 저음에 리즈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긴 꿈이 아니라 현실이다.
그리고 이 남자는 기어이 자신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어…… 어떻게……. 왜…… 나를……?”
덜덜 떨리는 목소리 탓에 말이 제대로 맺어지지가 않았다.
물어야 할 게 너무 많아서 오히려 아무 말도 묻지 못했다.
“시간은 충분하니까, 한 가지씩 질문해.”
헤르시스가 어린아이를 달래듯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하지만 되레 두려움을 느낀 리즈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고 말았다.
“저런.”
헤르시스가 리즈가 벌린 거리만큼 좁혀 오며 안타까운 얼굴을 했다.
“얼굴이 많이 상했잖아. 식사도 제대로 못 한 거야?”
그 느릿한 움직임과 다정한 목소리가 몹시도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리즈가 두 손을 앞으로 내뻗으며 말했다.
“이, 일단 여기서 이러지 말고…… 나가요. 여긴 다른 사람도…….”
다른 사람도 있다는 걸 알려 주고자, 그리고 그사이에 어떻게 할지 생각할 시간도 좀 벌고자 손가락으로 입구를 가리켰다.
“……?”
빈 의자를 본 리즈의 눈이 동그래졌다.
조금 전까지 거기에 앉아서 인원수를 체크하던 사람은 어디로 간 걸까?
“내보냈어.”
“그, 그래도 다른 사람이 또 들어올 수도…….”
“경비 세웠어.”
“그게 무슨…… 여긴 신전에서 운영하는 곳이잖아요. 황실의 손이 미치면 안 되는…….”
“나중에 사과하면 돼.”
“…….”
리즈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래, 이런 남자였다!
그에겐 모든 게 너무도 쉽고 간단했다.
원래부터 그런 남자가 이제 황제의 권능까지 갖추었으니 뭔들 못 할까.
리즈는 체념 섞인 한숨을 푹 내쉬곤 물었다.
“왜 절 찾아왔어요? 제가 전하…… 아니, 폐하한테 뭘 잘못했나요?”
리즈는 다른 건 다 놔두고 제일 중요한 것을 물었다.
“뭘 잘못했냐고?”
그걸 몰라서 묻느냐는 듯 헤르시스가 눈을 느릿하게 깜박였다.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멋대로 집을 나가 버린 거지?”
리즈는 그가 쪽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거…… 폐하의 숙부님과 제 혼사를 대신 정리해 주겠다는 뜻 아니었나요?”
“어째서 그걸 그런 의미로 받아들인 거지?”
헤르시스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찡그렸다.
리즈가 대답했다.
“너무 모호했으니까요. 게다가…… 귀걸이도 들어 있었고.”
헤르시스의 얼굴에서 언짢은 기색이 서서히 사라졌다. 반대로 리즈는 기분이 가라앉고 있었다. 그날의 실망스러운 감정이 떠오른 까닭이다.
“알고는 있었지만, 넌 참 별것 아닌 것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군.”
헤르시스가 여유를 되찾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건 그냥 그대에게 돌려준 거야. 귀걸이 한 짝 들고 있어서 뭐 하려고? 낄 수도 없고, 팔 수도 없잖아.”
팔았지만 돈도 안 되더라는 말은 굳이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그럼 결혼은 어떻게 된 거예요? 약혼자가 정해졌다고…… 들었는데.”
리즈가 최대한 담담한 어투로 물었다.
“글쎄. 어떻게 된 걸까?”
헤르시스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궁금해?”
“……아뇨, 별로요.”
“미뤘어.”
그 순간 ‘네, 궁금해요. 말해 주세요.’라고 하지 않은 자신이 리즈는 어찌나 기특하던지.
‘대체 내가 뭘 생각하고 있었 거지?’
허탈한 감정이 들려는 찰나 헤르시스의 말이 이어졌다.
“신부가 도망가 버렸는데 결혼을 어떻게 하나?”
“…….”
***
리즈의 행방엔 도무지 실마리가 보이지 않았다.
“송구합니다, 폐하.”
계속해서 똑같은 보고를 듣고, 똑같이 면목 없는 얼굴을 보는 것도 지겨웠다.
무력감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지만, 그럴수록 이성적인 판단이 필요했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결과 두 가지 가정으로 좁혀졌다.
첫째, 리즈 베리움은 죽어서 어디 묻혔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였다. 오랫동안 알고 지내 와서일까?
헤르시스는 리즈와 자신 사이에 보이지 않는 끈이 연결되어 있다고 느낄 때가 있었다. 그녀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들었다.
그전에도 종종 그런 일이 있어 왔지만, 우연의 일치라고 여기곤 금세 잊어버렸다.
하지만 어느 날, 머리에 섬광이 내려치는 느낌이 수분간 지속되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리즈가 마차 사고를 당했다는 것을 전해 들으며 확실히 알게 되었다. 우연이 아니었다.
그녀가 사라지고도 제 몸이 멀쩡한 걸 보며 그는 그나마 안도할 수 있었다.
만약 그런 직감이라도 없었다면 돌아 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보다 확률이 높은 두 번째. 리즈가 육체를 바꾸었다.
두어 절기 전, 감쪽같이 사라진 리즈를 저잣거리 공터에서 찾아낸 그날. 혹시나 리즈가 약의 정체를 알게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어렴풋이 생각했다.
리즈를 찾고 새벽에 돌아왔는데, 자신의 방에 그녀가 왔다 간 흔적이 느껴졌다. 바뀐 건 아무것도 없는데도 막연하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게도 그 느낌은 자신이 약을 숨겨 놓은 나무판자에도 스며 있었다.
‘설마하니 그럴 리가.’
이전까지 리즈는 제 방에 들어와 본 적도 없었다. 그러니 이곳에 약을 숨겨 두었을 거란 사실은 더더욱 알지 못했으리라.
한동안 쓰지 않으니 감이 무뎌져서 헛것이 느껴지는구나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달리 방법이 없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수도를 이 잡듯이 뒤져도 리즈를 찾지 못하는 걸 보니 헤르시스로선 제가 헛것이라 생각하고 구겨 버린 가정을 다시 펼쳐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닐 수도 있었지만, 맞을 수도 있었다.
맞는다면, 그러니까 정말로 제 약에 손을 댄 것이라면 그녀를 놓치는 건 시간문제였다.
수도 밖으로 나가면 찾을 길이 없다. 아니, 어떻게서든 찾긴 찾을 테지만 그 시간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지금 이렇게 행방을 알 수 없는 상태로 흘려보낸 며칠에도 저 자신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자괴감에 시달리는데, 제국 전역을 대상으로 수색하는 그 긴 시간을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헤르시스는 제 숙부와의 파혼이 그 집에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키리란 걸 알면서도 리즈를 안일하게 방치해 놓은 자신이 증오스러웠다.
미라벨을 믿었고 또…… 리즈를 믿었다.
제 어머니의 구박이 하루 이틀도 아니니 잘 견디리라 믿었다.
‘미친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
아무리 넓은 빗물받이 통도 언젠가는 가득 차게 되듯이, 리즈의 감정받이 통에도 더 이상의 쓰레기를 받아들일 공간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왜 하지 못했을까.
망설일 여유가 없었다.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존재한다면 붙잡아야 했다.
“수색 대상을 바꾼다. 이마에 삼 센티미터가량의 일자 흉터가 있는 여인으로.”
약은 겉모습은 일시적으로 바꿔 주지만 점이나 흉터와 같은 신체 특징은 없애 주지 못했다.
헤르시스는 명을 내린 뒤 곧바로 말을 달렸다.
칼리에르 외성 마을에 도착한 헤르시스는 헌병들의 수색망에 걸린 사람들을 쓰윽 훑어보았다. 자세히 살필 필요는 없었다. 한눈에 봐도 리즈가 아니란 걸 알았으니까.
“이게 다인가?”
“예, 폐하. 개미 한 마리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철저히 검사했습니다.”
헌병의 보고에 헤르시스는 생각의 방향을 돌렸다.
리즈는 아직 성문을 빠져나가지 않았다.
‘눈치를 챈 건가?’
그럴지도 몰랐다.
아무튼 성문을 빠져나가지 않았으면 아직 성안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것이다.
숙소에 돈과 보석을 그대로 놔둔 채로 도망갔으니 멀리 갈 여비가 없을 테니까.
헤르시스는 그녀가 몸을 의탁할 만한 곳을 떠올려 보았다.
자신이 아는 리즈라면 생판 모르는 사람 집에 몸을 의탁하려 들지는 않으리라. 누구에게 아쉬운 소리 하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므로. 또 그런 요령도 모르고.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문득 그의 눈에 한 무리의 순례자들이 골목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는 광경이 들어왔다.
그들의 행선지는 리즈의 목적과도 묘하게 부합되는 구석이 있었다.
최대한 눈치 보지 않고 머무를 수 있을 때까지 머무를 수 있는 곳.
저기다. 저곳밖에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헤르시스는 제 확신을 증명해 냈다.
“이 나쁜 헤르시스 카스트리온 로스카를랭!”
어떻게 정체를 드러내면 좋을까 타이밍을 고르던 찰나에 제 이름이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명상실에 또렷하게 메아리쳤다.
천천히 다가간 헤르시스가 말했다.
“의외군. 여전히 기억 못 할 줄 알았는데.”
담담히 말했지만, 사실은 가슴이 벅차올라서 숨쉬기도 힘들었다.
고뇌와 자괴감에 시달렸던 지난 시간들을 까맣게 잊게 만들 정도로 황홀한 순간이었다.
제 약을 훔쳐 냈건 아니건, 그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이젠 그걸 먹는다 한들 제게서 도망칠 수 없을 테니.
잠깐의 대화로 제게 품고 있던 리즈의 오해가 어느 정도 풀리는 듯하자 헤르시스는 곧바로 손을 내밀었다.
“가지. 나머진 가면서 설명해 줄 테니.”
“어…… 어디로요?”
리즈가 얼떨떨한 얼굴로 물었다.
“황궁으로.”
“어딜 간다고요?”
“…….”
“제가…… 거기에 왜 가요?”
왜 자꾸 당연한 걸 물을까?
“내가 거기 사니까.”
리즈가 망연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헤르시스는 그런 그녀를 감상하듯이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벽에 걸린 기름 등 불빛이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 한가운데 주홍색 점을 만들었다.
로브 속에 파묻힌 얼굴은 안 본 사이에 젖살이 빠졌는지 턱선이 한결 또렷해졌다.
다른 곳은 어떻지?
헤르시스는 조금 더 자세히 알고 싶었다.
마침 그럴 기회가 찾아왔다.
나른하게 휘어진 눈매, 그 속에 타오르듯 갈망의 빛을 머금은 금안. 금방이라도 겹쳐 올 듯 살짝 벌어진 입술. 노출된 부위 하나 없이도 야릇한 기운을 발산하는 그의 몸에 겁을 집어먹은 리즈가 저도 모르게 뒷걸음치다 제 로브 자락을 밟았다.
“으앗!”
갑작스레 뒤로 기우는 리즈의 허리를 헤르시스가 재빨리 받쳤다.
로브가 젖혀지며 드러난 숱 많은 붉은 머리칼이 공중에서 찰랑찰랑 물결쳤다.
“그대로군.”
헤르시스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번져 갔다.
“다른 덴 다 그대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