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벗어나긴 틀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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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화 벗어나긴 틀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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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화 벗어나긴 틀린 걸까
2023.07.26.
갑자기 모든 일들이 다 부질없게만 보였다.
약을 먹고 그 끔찍한 고통을 감내하던 순간. 그 남장 여인에게서 돈을 훔치고 목숨을 구걸하고, 산등성이에 올라 일어나지도 않던 유성우를 기다리던 순간. 그리고 또 끔찍한 고통을 겪던 순간.
뭣 하러 그랬을까.
이렇게 허무하게 잡히고 말 것을.
리즈는 한숨을 푸욱 내쉬며 체념했다. 이제 곧 제 차례가…….
“엇! 여기 좀 보십시오.”
“……?”
갑작스러운 상황에 리즈의 눈이 둥그렇게 커졌다.
딸의 이마를 살펴보던 헌병이 상관을 호출했다.
“여기에 이거, 흉터 맞지요? 폐하께서 말씀하신 삼 센티가량의 흉터.”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상관이 눈을 가늘게 뜨며 흉터를 응시했다. 흉터인지 반점인지 확신이 서진 않았지만, 일단은 의심스러운 사람은 모두 잡아들이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저희와 함께 가시죠.”
“안 돼요!”
어머니가 울부짖으며 달려들었다.
“쟤는 제 딸이에요. 댁들이 찾는 사람이 아니라고요.”
“그건 저희가 판단합니다. 일단 따님은 저희가 잠시 모시고 있겠습니다.”
“어머니이!”
“루이자-아!”
갑작스레 소란스러워진 틈을 타서 리즈는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모두가 이 소란을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보고자 성문 주위로 몰려드는 바람에 아무도 리즈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리즈는 기적적으로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너무 다급한 모습을 보이면 되레 의심을 살 수 있으니, 리즈는 산책이라도 나온 사람처럼 최대한 여유롭고 느긋하게 걸어 모퉁이를 돌아섰다. 그러곤, 보는 사람이 없자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목적도 방향도 없었다. 그냥 발 닿는 대로 아무렇게나 달렸다. 그러다 헌병을 마주치면 다시 태연하게 걸음을 늦춰 유유하게 산책을 즐겼고, 다시 시야에서 벗어나면 또 힘껏 달렸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 인적이 드문 곳에 다다른 리즈는 어느 건물 벽에 등을 붙이고선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긴장이 풀리는 동시에 힘마저 소진되자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리즈는 등을 기댄 채로 스르르 주저앉았다.
무릎을 끌어안으며 리즈는 생각했다.
‘루젠시아의 꽃.’
오랫동안 잊고 지낸 이름이었다.
운명에서 벗어났다는 착각이 잊히게 만든 이 세계의 이름이었다.
‘이제 벗어나긴 틀린 걸까?’
리즈는 한탄했다.
이게 운명의 힘인지, 황제의 독단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겠다.
황제는 알고 있다.
리즈가 그의 약에 손을 댔다는 사실을.
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제가 모습을 바꾸었을 수도 있을 거라는 걸 어떻게 짐작한 거지?
약은 그만이 아는 장소에 숨겨져 있었고, 리즈는 제 손이 닿았다는 것을 절대 알 수 없도록 처음처럼 완벽하게 복원해 놓았다.
그도 그 당시엔 딱히 알아차린 기색이 없었다. 분명 이번에 가능성을 타진해 본 것이 틀림없었다.
대체 그 남자, 상상력의 스펙트럼이 얼마나 넓은 걸까?
어떻게 하면 보통의 범주를 넘어서서 진실에 이를 수 있는 걸까?
갑자기 리즈는 두려워졌다.
집요하리만치 끈질기게 추적해 오는 그에게서 광기가 느껴졌다.
그가 기어이 자신을 찾아내서 과거의 빚을 청산할 것 같았다.
그게 바로 소설 속 제 운명이지 않았던가?
“……!”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란 리즈가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얀색 로브를 입은 남자 하나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리즈는 가슴이 쿵쾅거리고 이마엔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날 잡으러 온 건가?’
남자가 리즈 앞에서 멈춰 설 때는 심장이 멈춰 버리는 줄 알았다.
“당신의 마음에 평안이 깃들기를.”
“……?”
후드를 머리에 쓴 남자가 두 손을 모으고선 절을 하더니 리즈를 스쳐 지나갔다.
리즈는 어리둥절한 한편 긴장이 풀려 벽에 또다시 기대서야 했다.
언뜻 저런 행색에 저런 인사를 하는 사람들을 수도 중심부에서도 몇몇 본 것 같았다. 아니, 분명히 보았다.
순례자. 깨달음을 얻기 위해 스스로 고행길에 오르는 사람이었다.
‘귀족들 중에도 가끔 있었지.’
발이 부르트도록 걸은 일, 순례자의 집이라는 누추한 처소에 몸소 묵은 일을 어찌나 무용담처럼 자랑하든지.
그땐 꽤 대단하다 싶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가소롭기 짝이 없었다.
‘돌아갈 곳이 있는 자의 고생은 고생도 아니야.’
오갈 데 없는 처지에 비하면 확실히 그랬다.
리즈는 픽 웃음을 터뜨리며 힘겹게 벽에서 등을 뗐다.
계속 이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어디로든 가야 했다.
그런데 후들거리는 다리로 걸음을 옮기려고 보니 어디로 가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성문은 절대 안 되고, 여관도 안 된다.
이미 제 실물과 똑같은 초상화가 이 일대의 여관 전부에 배포되어 있을 테니.
그렇다고 모르는 사람의 집에 신세를 질 수는…….
“아!”
불현듯 리즈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내리꽂히는 것이 있었다.
‘당신의 마음에 평안이 깃들기를.’
그 남자다. 그 남자를 따라가야 했다.
***
하얀 로브를 입은 남자가 상아색 석조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멀찌감치서 지켜보며 리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곳이구나. 순례자의 집.”
순례자의 집.
고행길에 오른 순례자들에게 싼값에 숙식을 제공하는 장소로 신전에서 운영했다.
신전이 황실의 지배하에 놓이지 않은 독자적인 세력인 만큼, 신전에서 운영하는 순례자의 집 또한 황실의 군대가 감히 손을 뻗을 수 없는 곳이었다.
“저기라면 안전해.”
비록 남자만 받아들인다는 단점이 있긴 했지만, 그거라면 방법이 있지.
리즈는 근처 상점으로 향했다.
가게 문이 닫혀 있었지만 리즈가 문을 두드리니 주인장이 투덜거리며 나왔다. 그러고선 리즈가 구하고자 하는 물건에 평소 가격의 두 배를 불렀다. 흥정할 여유가 없었다. 리즈는 부르는 대로 주고 하얀색 순례자 망토를 손에 넣었다.
그것을 머리 위로 뒤집어쓰니 감쪽같이 성별이 감추어졌다…….
키가 작다고 반드시 여자라는 법은 없으니 괜찮을 것 같았다.
입구를 통과할 때 잠깐 긴장하긴 했지만, 최대한 굵직한 목소리로 남자 이름 하나를 제 이름으로 불러 주니 관리인은 별다른 제재 없이 통과시켜 주었다.
리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벼운 마음으로 제게 배정된 숙소로 향했다.
***
‘뭐야? 순 거짓말 아냐?’
순례자의 집에서 며칠 지내 보고서 내린 결론이었다.
오래전에 제게 이곳의 누추함과 열악함에 대해 열변을 토로했던 그 귀족의 말은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깨끗한 시설, 포근한 이부자리, 따뜻한 물, 단출하지만 깔끔한 식사.
완벽한 곳이었다. 딱 하나, 이 모든 것을 단체로 해야 한다는 것을 제외하면.
하지만 그건 리즈에게 주어진 크나큰 이점 하나로 상쇄할 수 있는 결점이었다.
여기에선 씻을 때를 제외하곤 로브를 벗지 못했다.
타인에게 현혹되지 말고, 오로지 자신에게만 집중하라는 의미로 생겨난 규율이었다.
다른 사람에겐 불편할지 몰라도 리즈에겐 그야말로 최적의 은신처가 아닐 수 없었다.
마치 신이 그동안 고생 많았다고 주는 선물 같았다.
“당신의 마음에 평안이 깃들기를.”
“당신의 마음에 평안이 깃들기를.”
복도에서 마주친 순례자와 의례적인 인사를 주고받았다.
봇짐을 짊어진 걸 보니 지금 퇴소하는 듯했다.
리즈는 조금 전에도 마주친 남자 몇이 봇짐을 짊어지고 나가던 것을 떠올렸다.
대부분 순례길에 잠깐씩 쉬었다 가는 터라 자신처럼 며칠씩 머무르는 사람은 잘 없는 듯했다.
‘이곳에서도 오래 있진 못하겠네.’
흔치 않게 장기 투숙하다 보면 눈에 띌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래도 며칠은 더 견딜 수 있겠지.
리즈는 제발 그 안에 자신을 향해 좁혀져 오는 포위망이 해제되어 주었으면, 하고 바라며 명상실로 이동했다.
여기선 매 식사 후 꼭 명상을 해야 했다.
명상실엔 신관이 상주하여 직접 인원을 확인했는데, 한 번이라도 빼먹으면 찾아다녔다.
좀 귀찮긴 했지만, 은신처를 싼값에 제공받는 데 대한 대가라고 생각하니 나름 할 만했다.
리즈는 명상실에 들러 관리인에게 아침과 똑같은 인사를 똑같이 하고, 관리인이 명부에 빗금 표시를 남기는 걸 확인하고선 깔려 있는 방석 아무 데나 앉았다.
장내엔 한 사람밖에 없었다. 조금 전에 대거 퇴소하더니 결국은 이렇게 되었구나 싶었다.
‘뭐, 한산하고 좋지.’
리즈는 이참에 제대로 된 명상을 해 보자 다짐했다.
그녀는 지그시 눈을 감고서 그간 수 차례 거듭한 명상 끝에 내린 결론에 종지부를 찍기로 했다.
이곳에 처음 올 때만 해도 황제가 제게 복수하려 하는 게 분명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생각을 거듭할수록 묘한 모순이 생겼다.
기회는 많지 않았던가.
자신의 침실에서, 불량배들을 만났던 공터에서, 황궁 앞 마로니에 대로에서. 그 외의 둘만 있었던 모든 장소에서 그는 자신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수 있지 않았던가.
하지만 침실에선 그저 시답잖은 이야기만 했고, 공터에선 자신을 구해 주기만 했고, 황궁 앞에선 가슴 아픈 과거사와 함께 키스만…… 선사하지 않았던가.
달콤하고 감미로웠던…… 키스…….
“젠장.”
리즈는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었다.
‘이 상황에서 잘도 그런 생각을 하다니. 구제 불능이 따로 없군.’
리즈는 다시 명상에 집중하기 위해 음욕으로 흐트러진 정신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떠오르는 그날의 감촉, 제 것에 부드럽게 얽히던 그의 말캉한 것이 떠올라 도무지 유익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오직 말초적인 쾌락에만 의식이 집중된 것 같았다.
‘이게 다 그 남자 때문이야.’
갑자기 화가 났다. 머릿속에 짜릿한 각인을 새겨 놓고서 제멋대로 떠나더니, 이렇게 또 제멋대로 자신을 궁지에 내몰고 있는 남자가 증오스러웠다. 마구마구 욕해 주고 싶었다.
“나쁜 놈.”
부족했다.
“나쁜 자식.”
아직 부족했다. 더 분명하게 그를 콕 집어서 욕해 주고 싶었다.
“이 나쁜 헤르시스 카스트리온 로스카를랭!”
아…….
갑작스레 쏟아 낸 이름에 리즈 본인도 놀랐다.
‘별일이네. 내가 이렇게 기다란 이름을 다 기억하다니.’
스스로가 내뱉어 놓고도 믿을 수가 없어 신기해하던 찰나, 명상실 한쪽에서 스르르 움직임이 일었다.
리즈는 그제야 이 명상실에 자신 말고 또 다른 순례자가 있었음을 기억해 냈다.
그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리즈는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고개 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너무 시끄러웠지요?”
그러자 뜻밖의 말이 되돌아왔다.
“의외군, 여전히 기억 못 할 줄 알았는데.”
남자가 로브를 내렸다.
리즈의 보랏빛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칠흑 같은 검은 머리에 맹수 같은 금안을 나른하게 접어 웃는 남자.
황제가 된 헤르시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