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그가 나를 찾고 있다 (55/65)


#55화 그가 나를 찾고 있다
2023.07.25.


16902858739141.jpg

 
두 사람은 함께 산을 내려왔다.

꽤 경사진 산을 여인은 날다람쥐처럼 잘도 미끄러져 내려갔다. 리즈는 치맛자락을 부여잡고 낑낑대며 내려갔지만, 주머니에 두둑이 든 금화 때문인지 마음만은 가벼웠다.

땅이 완만해지는 지점에 이르자, 멀지 않은 곳에서 불빛 여러 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조금 더 걸어가니 제법 많은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근처에 산지기들을 위한 술집이 있었는데 아마도 그곳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돈도 생기고 무사히 돌아오기도 했으니 한 잔 정도는 살 마음이 있었다. 리즈는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제 앞으로 내밀어진 하얀 손 하나가 리즈의 말을 가로막았다.

“덕분에 즐거웠다. 여기서 헤어지자.”

남장 여인이 악수를 청해 왔다. 갑작스러운 작별에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리즈는 이내 손을 잡았다. 생각해 보니 자신도 여기서 노닥거릴 시간이 없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악수한 손을 스르르 풀며 여인이 물었다.

“르블레뉴 지방으로 갈 생각이야.”

“남서쪽 해안 지방이네? 배라도 타려고?”

“그건 아니고, 되도록 수도에서 멀리 벗어나고 싶어서. 한데 네가 말하니 갑자기 타 보고 싶네?”

문득 오래된 전설 하나가 떠올랐다.

‘루젠시아의 남서단 해안에서 배를 타고 서쪽으로 백여 마일 가다 보면 섬 하나가 나온단다. 해풍에 절여진 풀밭 위엔 소와 양과 개가 한데 어울려 살고 있고, 과실과 곡물은 사시사철 풍요롭지. 물고기는 그물만 던졌다 하면 풍년이고, 울타리도 문도 없는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촌락을 형성하고 있어. 그야말로 낙원이 따로 없지. 다만 문제는…….’

그 섬이 선택받은 자에 한에서만 모습을 드러낸다는 점이었다.

리즈는 신이 자신을 빙의자로 선택했듯, 낙원도 자신을 선택해 줄지 궁금했다.

“꼭 성공하길 바라.”

여인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하지만 리즈는 그녀가 어쩐지 실패를 확신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럼 이만.”

그녀가 돌아섰다. 그러곤 붙잡을 틈도 없이 나무 덤불을 들짐승처럼 휙휙 헤치며 리즈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리즈는 여인이 사라진 자리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녀의 이름을 모른다는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다.

“나도 참.”

몇 시간이나 같이 있었고, 가벼운 주전부리도 함께 먹었고, 목숨을 위협받고 또 구해지기까지 했는데도 어떻게 그랬을 수가 있을까.

마치 뭐에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리즈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제 자신의 정신 상태에 짧게 유감을 표하고 걸음을 옮겼다.

완전히 평지에 이르고 거기서 조금 더 번화한 거리로 막 접어들었을 때, 리즈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을 떠올리곤 아연실색했다.

“젠장, 이 얼굴로는 돌아다닐 수 없잖아!”

리즈는 얼른 주변을 살폈다.

마침 저 멀리에 폐허가 되다시피 한 마구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옳지, 저기다.’

***

완전히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남장 여인이 길모퉁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리즈가 종종걸음으로 헛간에 들어서는 걸 지켜보며 혀를 끌끌 찼다.

“그래 봤자 조만간 들킬 거 같은데.”

문득 거리 저편에서 나타난 헌병 두 사람이 여인의 눈에 들어왔다.

근처 집집마다 순찰을 도는 듯했다. 그러니 분명 마구간도 둘러볼 터였다.

여인은 잠시 고민하다가 ‘쯧’ 혀를 차고는 그들 앞으로 달려갔다.

“저기, 나으리.”

여인이 제법 굵직한 목소리를 내니 헌병들은 제 눈앞의 곱상한 사춘기 소년의 정체를 의심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지?”

“저 본 것 같아요.”

“……뭐를 말이냐?”

소년이 손가락으로 헌병 한 사람의 오른손을 가리켰다.

그 손에 둘둘 말린 캔버스에 그려진 초상화 한 점이 들려 있었다.

“저, 정말이냐? 언제? 어디서?”

헌병이 눈을 크게 떴다. 절망으로 굳어 가고 있던 눈에 희망의 생기가 퍼져 나가는 순간이었다.

“조금 전에 저-쪽으로 가던데요?”

여인이 손가락으로 마구간과 정반대 방향을 가리켰다.

“고맙구나. 고마워.”

헌병들은 눈물이라도 쏟을 듯이 감격에 찬 얼굴로 소년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중 한 명은 머리까지 쓰다듬어 주었다. 그 투박한 손길에 가발이 살짝 흔들리자, 소년 속 여인이 어깨를 움찔했다.

하지만 그들은 별 의심 없이 자리를 벗어나 소년이 가르쳐 준 방향으로 황급히 달려갔다. 여태 축 처져 있던 사람들답지 않게 기운이 넘쳐 보였다.

여인은 긴장을 풀었다. 그러곤 부리나케 달려가는 헌병들의 뒷모습을 보며 잠시 킥킥댔다.

자선을 베푼 보람이 있었다.

권태로웠던 제 일상에 이토록 재밌는 일이 연달아 일어나니 말이다.

여인은 자신이 자선을 베푼 상대가 몸을 숨긴 곳을 잠시 동안 바라보곤, 픽 하는 코웃음을 마지막으로 몸을 돌렸다.

***

‘아무도 없는 거 맞지?’

리즈는 문틀 너머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 지나가는 사람들이 없는지 살폈다.

다행히 없었다.

그녀는 민첩하게 밖으로 나와선 원래 그곳을 거닐던 행인처럼 태연하게 걸었다.

골목을 서너번 꺾어 돌자 자연스레 인파에 섞여 들 수 있었다.

리즈는 눈앞을 왔다 갔다 하는 어중간한 다갈색 앞머리가 거슬렸다. 한옆으로 넘겨 귀 뒤에 꽂았지만 금세 빠져나왔다. 실핀이라도 꽂을까 하던 그때,

리즈는 갑자기 거리가 번잡해졌다는 생각에 주변을 살펴보았다.

사람들이 등에는 봇짐을 짊어지고, 앞에는 짐수레를 두고 뒤따르며 무리 지어 어디론가 이동하고 있었다.

‘뭐지?’

야밤에 쉽사리 볼 수 없는 광경에 리즈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그들이 향하는 목적지가 어딘지를 알고 나선 금세 고개를 끄덕였다.

행상인들이 수도 밖으로 이동하기엔 대낮보단 늦은 밤이 나을 터였다.

처자식을 포함한 일가족이 함께 움직이는 상인들도 몇몇 보였다.

리즈에겐 호재였다.

여자 혼자 성문을 넘는 것보단 이들 가족의 일원인 것처럼 섞여서 나가면 의심을 덜 사게 될 테니까 말이다.

리즈는 슬그머니 어느 대가족 일행에 합류했다.

노인과 어린아이는 짐과 함께 마차에 타고 있었고, 젊은 여인들과 장정들은 그 뒤를 걸어서 따르고 있었다. 이들은 갑작스레 끼어든 객식구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왜 이렇게 감시가 삼엄해졌을까요, 아버지? 전에는 이러지 않았잖아요?”

“언뜻 듣기론 사람 하나를 찾고 있다더구나.”

“대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기에 이렇게 헌병을 잔뜩 풀어서 찾는 걸까요?”

“글쎄 말이다…….”

부녀의 대화를 들으며 리즈는 잊고 있던 의문을 다시 상기시켰다.

‘날 누가 찾는 걸까? 진짜 어머닌가?’

그 외엔 달리 생각나는 사람이 없었지만, 사실은 그조차도 상당히 가능성이 희박했다.

리즈는 실물처럼 정교하게 그린 자신의 초상화를 기억해 냈다.

본인과 본인이 다른 사람 눈에 어떻게 비칠지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는 어머니가 딸의 얼굴을 그렇게 자세히 알 리가 없었다.

‘그럼 대체 누굴까?’

어렴풋이 떠오르는 사람이 있긴 했지만…… 에이, 설마.

리즈는 제 어처구니없는 생각에 픽 웃고는 재빨리 떨쳐 버렸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성문 앞에 다다랐다.

문을 넘으려는 사람이 많은 만큼 대기 줄이 길었다.

그런데 조금 이상했다.

줄이 줄어드는 것이 어째 더디다 싶어 보았더니, 헌병들이 사람들을 한 명 한 명씩 꼼꼼하게 살핀 다음 통과시켜 주는 것이었다.

‘굳이 저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딱 봐도 초상화랑 다른데.’

리즈는 묘하게 불안했다.

따지고 보면 불안할 게 전혀 없는데 말이다. 자신은 초상화 속 리즈 베리움과 눈썹 한 올도 닮지 않았으므로……. 그런데도 불안한 마음은 가시질 않았다.

드디어 리즈가 속한 일가족 차례가 되었다.

역시나 헌병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을 꼼꼼하게 검사했다.

그래도 남편과 아이들은 무난히 통과되었는데 문제는 아내와 딸이었다.

철컥-.

헌병들이 기다란 창을 X자로 교차시켰다.

아내와 딸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니 또 다른 헌병 대원 하나가 다가와서 말했다.

“협조 좀 부탁드립니다.”

“협…… 조요? 무슨 협조를 어떻게…….”

“얼굴을 좀 살펴보겠습니다.”

아내 쪽이 짜증이 묻어나는 투로 물었다.

“대체 이유가 뭐예요? 경계는 또 왜 이렇게 삼엄하죠?”

그러자 헌병 대원이 말했다.

“수배령이 떨어졌습니다.”

“수배령이라니, 누가 왜 내리셨는데요?”

딸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물었다.

“황제 폐하께서 직접 내리셨습니다. 왜인지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

리즈는 눈앞이 노래지는 것 같았다.

조금 전에 얼핏 떠올랐던 사람, 어처구니없다 생각하며 부정해 버렸던 그 사람이 정말로 자신을 찾고 있었다.

케인이…… 아니, 이젠 다른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을 황제가 리즈 자신을 찾고 있었다.

‘아니, 왜? 대체 왜?’

생각할수록 황당했다.

분명 약혼자가 정해졌다고 들었다. 즉위 전에 국혼을 먼저 할 수도 있다는 말이 나올 만큼 갈망하는 여인이 있다고. 거의 확정적이라는 말까지 들었다. 그랬던 그가 어째서 즉위 후로 국혼식을 연기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결혼할 여자도 있는 남자가 날 왜 찾는 거야……!’

갑자기 리즈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사람이 사람을 찾는 이유가 반드시 좋아서, 보고 싶어서만은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권력을 쥐게 된 이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과거에 대한 빚 청산이었다.

케인도 다르지 않을지 모른다.

과거에 자신이 그를 불쾌하게 만들었던 수많은 날에 보답하기 위해서 리즈를 찾는지도 몰랐다.

잘 해결되었다고, 다 지난 일이라고 생각한 것은 리즈 자신의 생각일 뿐, 케인은 하나도 잊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는 잊지 않았다.

리즈가 기억조차 못 하는 과거의 만행을 그가 얼마나 생생하게 들려주었던가.

“……!”

갑자기 리즈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다.

헌병이 어미 되는 쪽 여인의 이마를 까발려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리즈는 그들이 무엇을 보고자 하는지 알고선 경악을 금치 못했다.

“흉터가 없습니다.”

헌병이 말했다. 앞을 교차하고 있던 창이 열렸다.

“통과! 다음!”

철커덕-.

어미가 통과하고 딸의 차례가 되자 다시 기다란 창이 가슴 앞에서 교차되었다.

리즈는 심장이 터져 나갈 것 같았다.

이제 이 딸이 지나면 제 차례였다. 그러면 이 사람들은 제 이마에서 찾고자 하는 것을 찾을 수 있을 터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