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화 돈 주고도 못 보는 광경 (54/65)


#54화 돈 주고도 못 보는 광경
2023.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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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트리아 대륙력 725년.

피켈로 23일.

원작에서 남주 헤르시스는 여주 릴리아를 유칼립투스 서식지로 유명한 테네르 산등성이로 데려간다.

호흡기가 약한 릴리아가 입궁 후 잦은 감기로 고생하자, 귀부인 중 한 명이 유칼립투스 향을 자주 들이마시게 하라 귀띔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참에 나들이도 할 겸, 헤르시스는 하루를 통째로 비워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곳에서 릴리아와 소풍을 즐겼다.

귀부인의 처방이 효험을 발휘한 덕분인지, 릴리아는 잔기침조차 하지 않았다.

황혼이 서산 너머로 물러나고 하늘이 남색으로 채워지자, 산 아래 대기 중이던 마부와 호위들이 주인을 모셔 가기 위해 비탈을 기어올라 왔다.

‘이만 갈까?’

자신에게 내밀어진 큼지막한 손을 잡으며 여주 릴리아가 상큼한 웃음을 지었다.

하늘에 은색의 실선이 순간적으로 그려진 건 그때였다.

별똥별이었다. 별똥별 수십, 수백, 수천 개가 밤하늘을 장식했다.

그 어떤 고급 크리스털 샹들리에도 이보다 더 아름답진 못할 듯싶었다.

밤하늘을 황홀하게 바라보는 릴리아에게 헤르시스가 불쑥 청혼했다.

‘나와 결혼해 주지 않겠어, 릴리아?’

그의 그윽한 눈망울 속에 유성우의 잔상이 아른거렸다.

릴리아는 수줍게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꽃도 없고 반지도 없었지만, 그보다 더 반짝이는 별들과 두 사람 사이의 깊은 사랑이 있었다.

달리 뭐가 더 필요하겠는가.

황제는 릴리아를 지그시 응시하며 천천히 얼굴을 내렸고,

릴리아는 그의 입술을 받아들이기 위해 턱을 들고 눈을 감았다.

그렇게 운명적인 계시 아래 감미로운 입맞춤으로 사랑의 정점을 찍어야 마땅할 이곳이건만…….

‘어쩌다 이렇게 되어 버렸는지.’

지금 이곳엔 운명적 계시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두 사람만이 나란히 선 채 한쪽은 삶과 죽음을, 또 한쪽은 흥미와 권태의 기로에서 얼굴을 굳히고 있었다.

“뭐야? 아무 일도 없잖아?”

남장 여인이 말했다. 리즈는 목소리의 떨림을 애써 감추며 대꾸했다.

“……조금만 기다려 보죠. 금방 시작될 테니까요.”

하지만 리즈가 보기에도 그럴 것 같진 않았다.

새카맣게 맑은 하늘을 밝힌 별은 접착제로 붙여 놓기라도 한 듯 견고하게 고정된 채 반짝반짝 빛을 내뿜고 있을 뿐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다른 건 몰라도 이 장면만은 정확히 기억하는데. 분명 이 날짜였는데.’

리즈는 어리둥절했다. 대체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혹시 이 세계 자체가 작가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라서, 모든 것이 남주와 여주의 사랑을 고조시키는 계기로만 작동하는 걸까?

이미 원작을 탈주하고 각자의 길을 걸어가게 된 두 사람에겐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장치라서, 그래서 일어나지 않는 걸까?

‘하아…….’

리즈는 눈을 질끈 감으며 속으로 탄식했다.

아무래도 그 추측이 맞는 것 같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바보 같은 리즈 베리움. 그런 것도 예상 못 하고 저 악동을 이곳에 데려오다니.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속으로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찰나, 갑자기 여인이 손을 들어 올렸다.

‘나…… 나 죽는 건가?’

리즈는 싸늘한 기운이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돈 주고도 못 보는 광경을 보여 주겠다며 1실버 더 내놓으라 큰소리쳤으니, 이젠 그녀를 기만한 대가까지 치러야 할지도 몰랐다. 아니, 치러야 했다. 분명히.

하지만 빤히 보이는 결말 앞에서도 삶의 의지는 줄어들지 않았다. 콱 죽어 버리는 게 나을 것 같은 수치 앞에서도 살고 싶었다. 비굴하게라도…… 그렇게라도.

리즈는 시선을 스르르 끌어 내렸다.

언덕이 꽤 가팔랐다. 모르긴 몰라도 여기서 밀어 저 아래 평탄부까지 구르면 다시 기어올라 오는 데 꽤 시간이 걸릴 터였다.

그사이에 어찌어찌 도망치면 될 것 같았다.

언뜻 병약해 보일 정도로 여리여리한 체구의 여인이니 암기는 잘 쓸지 몰라도 체력이나 순발력은 제가 더 나을 것 같았다.

“각오는 되어 있겠지?”

여인이 리즈를 돌아보며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돈도 훔친 데다 거짓말까지 한 대가를 치를 각오.”

리즈는 그녀의 손이 귀걸이에 닿는 것을 보았다.

“도둑질보다 거짓말 쪽이 더 나빠. 난 거짓말을 무척 싫어해.”

불현듯 언덕 맞은편 능선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여인의 가발 앞머리가 찰랑 흩날렸다. 그 머리칼 한 줌이 여인의 연하늘색 눈동자를 살짝 찌르고, 여인이 눈을 비비느라 귀걸이를 만지작거리던 손을 뗐다. 기회였다!

“이야압!”

우렁찬 기합 소리를 내지르며 리즈가 여인에게로 돌진했다.

하지만 막 몸이 닿으려는 찰나 여인이 놀랍도록 민첩하게 어깨를 틀었다. 덕분에 리즈는 비탈면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몸이 급격히 앞으로 기울었다.

멈출 수가 없었다.

빠르게 가까워지는 비탈면을 보며 리즈는 눈을 질끈 감았다.

***

“…….”

리즈는 이쯤 되니 분명하다고 결론지었다.

기껏 줄거리가 빤한 책 속에 빙의시켜 놨더니, 써먹을 생각은 못 하고 탈주할 궁리만 했던 멍청한 자신에게 신이 분노한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런 수모를 계속해서 당할 리가.

“진짜 가지가지 하네.”

조롱 섞인 목소리 하나가 어둠 속을 가르고 리즈의 귀에 꽂혀 들었다.

리즈는 사색이 된 얼굴로 제 눈앞의 가파른 비탈면을 보았다. 이렇게 보니 비탈면이 아니라 절벽이나 다름없었다!

여인이 목 뒤의 옷자락을 붙잡은 탓에 목이 졸렸지만, 그것 때문에 불편함을 호소할 생각은 없었다. 그랬다간 아예 놔 버릴지도 모르니까.

“너, 나 죽이려고 했지?”

“아뇨!”

남장 여인의 물음에 리즈가 펄쩍 뛰었다.

“그냥…… 살짝 밀려고만 했습니다. 말이야 바른말이지, 여기에서 좀 구른다고 죽진 않잖아요.”

“곧 죽어도 말은 잘하네.”

갑자기 여인이 리즈의 옷자락을 살짝 놓았다가 다시 붙잡았다.

순식간에 몸이 기울어지다 멈추자 리즈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여인이 짓궂은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살려 주세요, 말해 봐. 그럼 구해 줄게.”

‘정말 그거면 된다고?’

목숨을 구하는 방법치곤 너무 쉬웠다. 못 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리즈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내쉬며 메아리가 칠 정도로 소리쳤다.

“살리든지 죽이든지 맘대로 해! 어차피 덤으로 사는 거니까.”

“…….”

나…… 미친 걸까?

살려 달라고 싹싹 빌어도 모자랄 판국에 이 인간을 자극하는 말들을 쏟아 내다니.

난 이제 꼼짝없이 죽겠구나.

“덤?”

의외의 반응이 되돌아왔다.

여인이 리즈의 말을 잠시 곱씹어 보더니 짓궂은 장난을 멈췄다.

그러곤 여리여리한 몸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정도의 강한 힘으로 가뿐하게 옷자락을 잡아당기더니,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아이쿠!”

리즈는 엉덩방아를 찧었는데, 하필이면 돌부리에 찧는 바람에 절로 악-, 소리가 났다.

통증이 가시는 데 꽤 시간이 걸렸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서, 엉덩이를 문지르며 엉거주춤 일어나니 여인이 그녀를 물끄러미 보았다.

‘또…… 또 뭘 하려고?’

리즈가 경계를 늦추지 않는 얼굴로 뒷걸음질 치니 여인이 말했다.

“안 죽여.”

“……정말이야?”

의중을 파악하는데 집중한 나머지 리즈는 제가 하대하고 있는 줄도 몰랐다.

“난 거짓말은 안 해.”

여인은 리즈의 하대를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죽이지 않겠다는 말도 진심인 듯했다.

인생 2회차쯤 되어 보니 그나마 보는 눈이 생겼는지, 이런 타입의 사람은 거짓말 따윈 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왜…… 나를 안 죽이는 거지?”

그래도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 없었던 리즈는 조심스레 물었다.

“나는 돈도 훔치고 거짓말도 했고, 허세도 부렸는데. 1실버는 족히 나가는 광경을 보여 주겠다고 했는데 못 지켰잖아.”

이런 말을 해서 득 될 건 하나도 없다는 걸 리즈는 잘 알았지만, 그럼에도 알고 싶었다.

그러자 여인이 픽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돈도 훔치고 거짓말도 했다는 건 인정. 하지만 허세는 아니었어. 십 골드는 충분히 나가는 광경이었어.”

‘이게 대체 무슨 말이야?’

의아해하는 리즈의 눈앞으로 여인이 손가락을 들이밀었다.

“이게 진짜 얼굴이니?”

“…….”

그 순간 산 저편에서 또 한 번 불어닥친 바람이 리즈의 머리칼을 흩날려 그녀의 귀엣머리를 눈앞에 대령했다.

붉은색이었다. 원래대로 돌아왔다.

이 남장 여인 앞에서 자신의 원래 얼굴로 돌아오고 만 것이다!

당혹스러운 리즈와 달리 여인은 흥미롭게 반짝이는 눈으로 상대를 요리조리 뜯어보았다.

“와아, 신기하다. 대체 어떻게 하는 거니? 마법?”

“……약이야. 아주 고통스러운 약.”

더 이상 속일 것도 없었으므로 리즈는 사실대로 다 말해 주었다.

이제껏 권태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던 여인이 처음으로 제 나이처럼 싱그럽고 활기찬 얼굴이 되어 말했다.

“고통스러워도 좋으니 나도 한번 먹어 보고 싶네. 있으면 한 개만 줘 봐.”

“없어.”

거짓말이었다. 여인이 고통에 몸부림칠 것이 걱정되어서가 아니라, 제가 먹어야 하기 때문에 주지 못했다. 수도를 벗어날 때까진 안심할 수 없으니까.

“혹시 헌병대가 쫙 깔린 게 너 때문이니?”

갑작스러운 여인의 말에 리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역시 거리에 깔린 헌병들이 들고 다니던 초상화를 본 것이 분명했다.

“맞나 보네.”

“이유는 묻지 마. 말해 줄 수 없어.”

사실 잘 모르기도 하고.

“물어볼 생각도 없어. 관심 없으니까.”

남장 여인은 그렇게 말하더니 허리에 찬 돈주머니에 손을 넣어 뭔가를 한 움큼 움켜잡아 리즈 앞으로 내밀었다.

“난 무슨 일이 있어도 약속은 지켜.”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어 받아 보니 금화 열 개였다.

리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자 여인이 말했다.

“구경값이야. 1실버보다는 더 나가는 것 같아서.”

“…….”

“체험까지 할 수 있었으면 더 줬을 텐데, 아쉽다.”

그 말에 리즈도 속으로 동의했다.

‘나도 약이 얼마 없어서, 네게 그 지옥 같은 고통을 맛보게 해 주지 못해서 아쉽네.’

“아무튼 고마워…….”

리즈는 갑작스레 주어진 큰돈이 얼떨떨했지만, 여인의 말대로 제 비밀을 밝힌 대가라 생각하고서 마음 편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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